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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시 평방부 731부대 본부 건물. 전시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하얼빈시 평방부 731부대 본부 건물. 전시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 박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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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기억의 투쟁 중인 세균전 특수부대, 하얼빈 제731부대

온 몸에 소름이 끼치고 머리는 어지러웠다. 분노가 차올라 더 이상 할 말을 잃을 때까지 가이드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세균주입실험, 동상실험, 진공실험, 건조실험, 장기이식실험 등등….

1939년부터 1945년까지 만주 제731부대에서 행해진 각종 생체실험이다. 남겨진 서류상으로 확인 가능한 실험의 종류만 31가지. 잘 알려져 있듯이 실험대상자들은 '마루타'라고 불렸는데, '원목'이란 뜻이다. 30~40대 건장한 남성들만을 불법적으로 납치, 이곳 하얼빈시 외곽에 위치한 평방지구로 '특별이송'했다고 한다.

대부분 중국인들과 일부 러시아, 몽골, 조선인을 포함해 무려 3000여명의 무고한 인명이 잔혹한 실험 끝에 이곳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지금은 2층짜리 본부 건물만이 간신히 남겨져 <침화일본군731부대유적>이란 전시관으로 활용되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120㎢에 이를 정도로 방대한 규모의 군사지역이었다고 한다.

'마루타'를 소각시키던 보일러실, 거대한 굴뚝 두 개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마루타'를 소각시키던 보일러실, 거대한 굴뚝 두 개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 박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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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엄청난 규모의 지역을 외부와 철저히 고립시킨 채, 731부대가 연구하고 생산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전쟁에 사용할 각종 세균이었다. 콜레라, 장티프스, 탄저균 등  치명적인 세균을 생산한 지 10년만에 무려 630여kg에 달하는 양의 세균을 만들어냈다.

이런  가공할 만한 세균 폭탄들과 무수한 생체실험에 관한 자료들은 일제가 패망하면서 그대로 전승국인 미국에게 넘겨졌다고 한다. 일본의 제국주의가 저지른 잔악하고 흉포한 범죄를 용서해주는 대가로 바쳐진 그 무서운 결과물들이 또 다시 한국전쟁과 그외 수많은 전쟁을 통해서 활용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은 지나친 상상일까?

폐허만 남은 731부대의 생체실험 건물
 폐허만 남은 731부대의 생체실험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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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일 민족주의를 뛰어넘은 평화사상가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가 피격된 지점. 사각형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토 히로부미가 피격된 지점. 사각형으로 표시되어 있다.
ⓒ 박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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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 731부대 유적이 아직도 미해결된 20세기의 광기와 폭력을 일깨워주고 있다면, 안중근의 유적은 21세기인 지금까지도 유효한 동아시아 평화의 실마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우리는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던 하얼빈역을 찾았다.

안타깝게도 안중근의 역사적인 거사 현장에는 안내문 하나 없었다. 다만 다른 플랫폼 바닥과는 구별되는 삼각형(저격 지점)과 사각형(이토 히로부미 피격지점) 표시가 그려져 있었고, 이마저도 최근에 와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동아시아 민중 의병장의 자격으로 동양평화파괴의 주범을 처형했다"는 안중근의 최후진술에도 불구하고 중국에서 안중근은 여전히 조선인 독립운동가에 불과했다.

하얼빈 시내에 위치한 조선민족예술관 내 <안중근 기념전> 역시 상설 전시관임에도 불구하고 기념'관'이 아닌 기념'전'의 명칭으로 밖에 표기할 수 없는 것도 같은 이유라고 한다.

하얼빈 <안중근기념전>에 전시된 거사 장면을 묘사한 동상.
 하얼빈 <안중근기념전>에 전시된 거사 장면을 묘사한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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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안중근의 거사가 조선만의 독립을 위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는 사실은 그의 '동양평화론'을 통해 자세히 드러나 있다. 나아가 그의 이론은 오늘날 한ㆍ중ㆍ일을 비롯한 동북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이 처한 현실에도 유의미한 시사점을 제시해주고 있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안중근은 뤼순감옥에서 자신이 구상한 평화사상을 담은 '동양평화론'을 저술했다. 비록 사형 집행으로 '서'(序)와 '전감'(前鑑) 등 서론 부분만 쓰여진 채 미완성으로 남았지만 그것만으로도 안중근의 동양평화에 대한 사상적 깊이를 읽어낼 수 있다.

안중근은 구체적으로 △중국 뤼순에 한∙중∙일의 공동참가에 의한 동양평화회의를 상설화하고 △ 동양평화회의 주도로 한·중·일 공동평화군 창설하며 △한·중·일 공동개발은행을 설립, 공동화폐를 발행하고 △동아시아 곳곳에 동양평화회의 지부와 공동은행 지점을 설치할 것을 주창했다. 최근 참여정부를 중심으로 정치권과 학계 등에서 논의되고 있는 ‘동아시아 공동체론’을 안중근은 이미 1세기 전에 제안했던 것이다.
안중근은 당시 서양제국주의, 특히는 러시아의 침략주의에 공등대응하기 위하여 한ㆍ중ㆍ일 연대이념인 동양주의를 주창했다. 그리고 이러한 동양주의로 역내 일본의 침략주의를 묶어두려고 했다.

이것은 마치 2차대전 후 서유럽이 구소련의 위협에 공동대체하기 위하여 서유럽 공동체를 만들고 이를 통해 독일의 팽창주의를 유럽공동체의 틀로 묶어두려했던 것과 비교된다.

냉전 후 오늘날의 동아시아가 미국의 패권전략에 공동대처하기 위하여 한ㆍ중ㆍ일 연대, 동아시아 공동체가 요청된다는 점에서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한 세기를 앞선 동아시아 평화담론이었다.

이에 대해 <안중근, 하얼빈에서의 11일>의 저자이자, 하얼빈 조선족민족사업촉진회장인 서영훈(77)씨는 "그동안 안중근에 대해서 '민족의 원수를 갚은 의사'라는 평가가 주를 이뤘지만, 21세기를 맞아 평화의 관점에서 안중근을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면서, "그러한 점에서 안중근은 평화의 선구자"임을 강조했다.

안중근, 국경을 넘어 동아시아 연대를 꿈꾸다

하얼빈역에서 안중근의 거사 현장을 둘러본 뒤, 우리 일행은 기차를 타고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주도인 연길로 향했다. 3층으로 된 침대칸에서 7시간여를 보낸 뒤 도착한 연길역에서 다시 3시간 정도 버스로 이동한 곳은 바로 중국과 북한, 그리고 러시아 3국이 인접한 훈춘시 방천 국경공원이었다.

방천 국경공원 망해각에서 바라본 3국 인접 지역. 왼쪽은 러시아, 오른쪽은 북한이다. 저 멀리 두 나라를 이어주는 유일한 육로인 철교가 보인다.
 방천 국경공원 망해각에서 바라본 3국 인접 지역. 왼쪽은 러시아, 오른쪽은 북한이다. 저 멀리 두 나라를 이어주는 유일한 육로인 철교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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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 놀랐던 것은 이 곳 전망대에서 바라본 3국의 모습이 겉으로는 전혀 다른 나라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비슷한 풍경으로 연결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사실 대부분 우리들 기억 속 국경이란 곳은 높은 철조망에 삼엄한 경비를 취하고 있는 모습일 것이다. 비행기가 아닌 버스와 기차와 같은 육로를 통한 해외진출을 상상할 수 있게 된 것도 최근 일이 아닌가.

이런 폐쇄적인 관념을 키운 것은 '한반도'라는 축소된 역사적 인식과 그마저도 휴전선 이남으로 고립된 '분단 구조'에서 기인한 것일 것이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우리 일행이 이 곳에 방문한 목적인데, 바로 이렇게 3국이 인접한 지역에서 안중근 부대가 러시아와 중국, 조선을 넘나들며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을 확인하고자 했던 것이다.

실제로 그의 부대는 러시아에 터하면서 수시로 조선으로 진격하여 일본군과 교전한 후, 다시 러시아나 중국으로 피신하는 작전을 반복하곤 했다. 이와 관련, 유한대 임진철 초빙교수(51·생명평화재단 이사장)는 "당시 안중근은 3개국을 넘나들며 효과적인 독립운동을 수행할 수 있었다"라고 말하면서, "그 과정 속에서 안중근은 다국 간의 연합을 통한 제국주의 세력의 견제 가능성을 직접  체험했을 것이고, 이는 이후 동양평화론의 경험적 근거가 되었을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도움의 손길이 절실한 안중근 유적지, 훈춘시 취안허촌 초가

훈춘시 취안허촌의 안중근 초가
 훈춘시 취안허촌의 안중근 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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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마지막으로 방천에서 연길로 돌아오는 길에 취안허촌이라는 곳에 있는 작은 초가에 들렀다. 안중근을 비롯한 그의 동지들이 거사를 치르기 전인 1908년 4월에서 6월까지 이 곳에서 유숙하며 전략을 논의했다고 한다.

그저 겉보기엔 오래되고 낡은 옛 집이나 다름 없었지만 - 실제로 안중근을 기억할 만한 유물은 없었다 - 그래서 그런지 가만히 당시의 모습을 상상하기엔 딱 좋은 운치 가득한 곳이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탓에 하루에 한두 팀 정도의 한국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는 이 초가는 집 주인이 이사 간 뒤로는 몇 년 째 주변 조선족 이웃들이 자비를 들여 보존해오고 있는 실정이었다.

밭에서 일을 하다가도 관광객이 오면 초가에 대해 정성스레 설명을 해주고 있다는 관리인 최금화(34)씨는 "갈수록 조선족 가구가 줄어들고 있어서 걱정이다"면서, "최소한 1년에 두 번씩은 지붕을 갈아줘야 하는데, 비용(1000위안)이 만만치가 않다"고 말했다.

(안중근 초가 연락처 : 중국 길림성 연변자치주 훈춘시 경신진 권하촌 2조 ☎ 86-1363-069-7662)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지난 8월 21일부터 9월 1일까지 생명평화재단이 주최하고, 청년평화센터 푸름에서 주관한 <2007 동아시아 평화대장정>의 답사기입니다. 푸름 홈페이지(http://www.pureum.org) 열린 자료실에서도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태그:#평화, #안중근, #하얼빈, #731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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