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남 여성신문 객원기자]산업선교회에서 한달간 사전 교육을 받은 뒤 조화순 목사가 처음 출근을 하게 된 곳이 동일방직 주식회사(인천시 동구 만석동)였다. 동일방직은 당시 종업원 수가 1300명에 달할 만큼 큰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조목사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딱 한명이었다. 1966년 10월1일, 공장으로 첫 출근을 하려는 그에게 조지 오글 목사는 이렇게 충고했다.
"당신은 한 사람의 노동자로서 노동을 경험하고 배우러 가는 겁니다. 누구를 전도하겠다는 건방진 생각은 버리세요."
이 말을 처음 들을 때만 해도 조 목사는 속으로 입을 삐죽거렸다고 한다. '목사라면 모름지기 언제 어디서든 전도를 해야지, 말이 돼?' 하면서. 그렇지만 잘난 체하던 그의 자의식이 무너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일단 공장에서 처음 받아든 작업복부터가 그를 의기소침하게 만들었다. 무명으로 된 허름한 작업복을 입고 모자를 쓴 자신의 모습을 거울로 보는 순간, "어디서 떨어진 듯 버림받았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조 목사는 회고한다. 가뜩이나 왜소한 자신의 체구가 더 왜소하게 느껴지는 것이 그렇게 초라해 보일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구내식당에 배치...반말 세례
그가 처음 배치된 곳은 구내식당. 이곳에는 주로 원호 대상자로 보이는 30대 과부들이 주방 일을 하고 있었다. 조 목사와 비슷한 또래의 여성들이었다. 낯선 환경에 쭈뼛거린 것도 잠시, "야, 이리 와서 이거 설거지해!" "야, 거기서만 꾸물거릴래? 이리 와서 이것도 해!" 쏟아지는 반말 세례, 잔소리 세례에 조 목사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몸이 아프고 괴로운 것은 뒷전이었다.
진정 감당하기 힘든 것은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수치심과 분노였다. '처음 대하는 사람한테 이래도 되는 건가?' '내가 누군데 감히….' 내부에서 치솟는 이런저런 반발심으로 갈등하면서도 조 목사는 시키는 대로 이를 악물고 일할 수밖에 없었다. 가라는 데로 가고,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것이 노동자의 삶이었다.
식당에서 몇 주를 전전한 끝에 배치된 작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주변 노동자들과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웃으며 말이라도 걸라치면 당장 작업반장으로부터 "저 여자, 왜 저렇게 말이 많아!"라는 불호령이 떨어졌다. 피곤한 나머지 작업대에 살짝 몸을 기댄 채 일을 하다가 "근무태도가 틀려먹었다"는 막말을 듣기도 했다. 막내 동생뻘인 18~23살의 여공들 앞에서 이런 수모를 겪다보니 당장에라도 일을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은 물론이요, 상대를 죽이고 싶은 충동마저 들더라고 조 목사는 고백한다.
억울하고, 분하고, 그래서 눈물로 밤을 지새우던 어느 날 조 목사에게 문득 내면의 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정녕 그러고도 목사냐? 목사라면 어찌 이런 일로 사람을 그토록 미워할 수 있단 말이냐?' 당시를 조 목사는 '껍질이 깨어지던 순간'으로 기억한다. 유복한 가정 출신의 엘리트로서, 목사로서 남들로부터 우러름을 받고, 대접받는 것을 당연히 여기던 삶을 그는 비로소 속죄하는 마음으로 돌이켜보게 되었다.
'아, 예수가 이렇게 모욕을 당하셨겠구나. 그분은 이렇게 고난과 모욕을 받으면서도 사랑으로 모두를 용서하셨는데, 나는 무어란 말이냐?' 이런 깨달음이 엄습하면서 그는 회한의 눈물을 쏟아냈다. 앞서의 눈물이 억울하고 분해서 흘린 눈물이었다면, 깨달음 이후의 눈물은 속죄의 눈물이자 회개의 눈물이었다.
깨달음 이후 그의 변화는 눈부셨다. 조 목사는 '하루가 다르게 스펀지처럼 모든 것을 빨아들였던 시절'이라고 당시를 회고한다. 그의 변화 속도에 오글 목사조차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6개월 공장 체험을 마치고 산업선교회로 돌아가서도 그는 어린 여성 노동자들과 돈독한 관계를 쌓아갔다.
위장취업 초기만 해도 조 목사는 이들을 잘 이해하지 못했노라고 고백한다. 툭하면 치고받고 싸우는 이들을 보며 '서로 조금씩만 참지, 왜 저럴까?' 의아해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애정을 갖고 이들을 보니 이들의 삶이 비로소 이해되기 시작했다. 김치도 없이 새우젓과 간장만으로 밥 비벼 먹어가며 3교대 근무를 서야 하는 고달픈 삶. 그러면서도 자기들 못배운 것이 한이 되어 시골에 있는 동생만은 공부시켜보겠다며 악착같이 돈을 벌어야 하는 삶. 이런 환경 속에서 악다구니를 쓰며 살아가는 것은 이들의 인성 탓이 결코 아니었다.
불꽃 같은 목사 vs 들불 같은 노동자
조 목사가 다가서자 여성노동자들도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예나 지금이나 조 목사가 지닌 최대 무기가 바로 친화력이다. 조화순 목사와 함께 일했던 이들은 너나없이 '잘 웃기고, 인간미가 있고, 사람을 사로잡는 힘이 있는 사람'으로 조 목사를 기억한다. 그를 만난 사람들은 어느 순간 그 앞에 무장 해제를 당하는 경험을 하곤 한다. 때로 옆집 누이처럼 소탈하고, 때로 어머니처럼 푸근한 그에게 어느새 자기 속내를 미주알 고주알 털어놓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 그를 연행해 가며 기세등등했던 안기부 수사관들마저 나중에는 "목사님,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자기들 인생 상담을 청했을 정도다.
그렇다고 마냥 푸근한 스타일인 것만도 아닌 것이 조 목사의 알짜 매력이다. 동일방직 2대 여성 노조지부장을 지낸 이영숙씨는 조 목사를 '평소에는 자상하면서 수줍음을 잘 타는 만년 소녀인가 하면, 옳지 못한 일에는 다이나마이트처럼 폭발하는 정의로움을 지녔던' 인물로 기억하는데('고난의 현장에서 사랑의 불꽃으로') 실제로 그랬다. 불의한 일을 당하면 거침없이 육두문자부터 내지르며 한치 타협 없이 맞서는 조 목사를 노동자들은 마음으로 신뢰하며 따르곤 했다.
동일방직 때도 마찬가지였다. 조 목사에게 이성문제로 주로 상담을 청하곤 하던 여성노동자들은 이윽고 임금문제나 공장 내 불합리한 처우문제를 놓고도 조 목사와 속을 터놓고 얘기를 하게 됐다. 당시 조 목사도 노동조합이나 근로기준법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거의 없었다. 그러나 '부당한 건 누가 뭐래도 부당한 것'이라는 특유의 뚝심으로 그는 문제를 하나하나 짚어나갔다. 노동문제 전문가를 불러들이고, 교수들을 끌어들여 강의를 듣고 하는 과정에서 조 목사와 여성노동자들은 함께 변화하기 시작했다.
조 목사는 지금도 "노동자들은 들불 같아. 일단 깨우치고 나면 주저함이 없어"라는 말을 곧잘 한다. 동일방직 당시의 경험이 그에게 이런 믿음을 심어주었다. 물론 의식화가 되었다고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사장이 겁나고, 과장이 두렵다며 여성노동자들이 동요할 때면 조 목사는 이렇게 특유의 직설화법으로 일갈하곤 했다. "이 바보들아, 과장도 똥 눠. 사장도 똥 눠. 그러니까 인간은 똑같이 밥 먹고 똥 눠. 이렇게 생각하면 다 별 게 아냐."
그렇게 산업선교를 시작한 지 6년 만인 1972년. 조 목사와 여성노동자들은 급기야 '거사'를 성공시켰다. 동일방직 최초로 여성 지부장과 여성 간부로만 구성된 노동조합 집행부를 탄생시킨 것이다. 이는 단위노조로서는 전국 최초로 탄생시킨 여성 지부장이기도 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동일방직 노조는 직원 복지문제 같은 데는 거의 관심이 없는 어용노조였다. 전 직원의 80%를 차지하는 여성노동자의 권익문제는 더더욱 관심 밖이었다. 그런 어용노조를 청산하고 마침내 여성노동자가 명실상부한 주체가 된 노조가 출범한 셈인데, 초창기에는 회사도 이런 노조에 크게 반감을 표시하지 않았다.
'나체시위 사건'으로 탄압 더 거세져
문제는 여성들이 중심이 된 이 노조가 작업 환경을 하나 둘씩 바꿔가면서부터였다. 노동자들이 뭉쳐 이전에 없던 월차 및 생리 휴가를 얻어내고, 식사시간 30분을 얻어내는 등 변화가 가시화되면서 노조를 대하는 회사의 태도는 적대적으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인근 사업장들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렇게 갈등이 고조된 가운데 발생한 사건이 이른바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의 나체 시위 사건이다.
농성 중 공권력 투입에 맞서 알몸으로 처절하게 저항하다 끌려간 여성노동자들을 접하며 조 목사는 군사정권과 자본의 폭력성에 몸서리를 쳤다. 그뿐인가. 그 일은 시작에 불과했다. 1976년의 어느 날 새벽, 산업선교회 사무실로 걸려온 전화를 조 목사는 잊지 못한다. 수화기 저편 목소리는 이렇게 다급하게 외치고 있었다.
"목사님, 큰일났어요. 남자 직원들이 새벽에 노조 사무실에 침입해 투표함을 부숴버리고 우리들을 마구 뒤쫓아다니며 똥을 뒤집어씌우고 있어요."
도저히 믿기지 않는 현실. 조 목사도 넋을 잃고, 양식 있는 시민들도 일제히 넋을 잃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