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1.

"갓 잡은 숭어에다 펄펄뛰는 새우요! 기름이 잘잘 나는 도루묵에 짭짤한 자반도 있어요! 하, 이 물 좋은 생선을 서방님 저녁상에 올리시면 당장 그날 밤으로 효과를 봅니다. 이부자리 깔자마자 극락에 오르시고 번듯한 아들딸을 꾸러미로 낳을 테니, 산삼 백사가 부친상을 당한 듯 통곡으로 울고 가는 생선이오!"

서른을 좀 넘은 생선장수가 넉살 좋게 외치자 지나가던 여염 댁들이 살포시 웃음을 머금고 생선 판에 모여들었다. 바로 옆에 자리를 튼 젓갈 파는 총각도 신명나게 외쳤다.

"젓갈이오, 젓갈! 옴천의 토하젓에 서산 어리굴젓, 연평도 조기젓에 남해 멸치젓이라, 광천에서 올라온 새우젓은 날씬한 오젓에다 통통한 육젓, 그윽한 추젓에다 살살 녹는 동백하라, 요렇게 곰삭은 젓갈 한 종지면 서방님께서 바로 기력을 회복하십니다. 이 젓갈 한 사발을 사시면 덤으로 보성 조개젓 한 종지를 드립니다! 새댁님들이 이 조개젓을 장복하시면 아무리 밖으로 나도는 서방님들이라도 절대 한눈을 팔지 않습지요."

올 고운 세모시는 어떻고 방금 쳐낸 인절미는 또 어떤가? 하다못해 엿가락도 한몫했고 어디서 얻어 마셨는지 흠뻑 취한 각설이도 제 흥에 겨워 이리저리 돌아갔다.

그런 장거리 풍경과 너무나 이질적인 사내가 장거리에 들어섰다. 제대로 다듬지 않아 이리저리 삐친 머리카락을 슬쩍 올려 대충 동이고 웃품에는 알몸 위로 종류를 알 수 없는 짐승가죽 조끼를 걸쳤는데, 그 사이로 드러난 근육은 마치 무쇠를 부어낸 듯 강단졌다. 아래는 도토리 즙을 먹인 무명바지를 꿴 품새에 칡덩굴을 엮은 걸망을 짊어진 것을 보아하니 산(山)사람이 분명해 보였다. 검붉은 얼굴에 푸실한 수염이 첫인상을 거칠고 사납게 꾸몄지만 그의 눈빛은 계곡의 시냇물 빛깔을 그대로 닮아 있었다.

장날의 번잡은 사람 사는 맛이라지만 산에서 나고 거기서 자란 그에게는 너무나 이질적이었다. 그는 완전히 산의 일부였고 굳이 가꾸지 않아도 모든 것을 나눠주는 산 이외에 모든 것이 낯설기만 했다. 그는 가급적 이런 곳에 오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사람이라 어쩔 수 없이 찾아들었고 여기에 온 목적을 충족시켜야만 했다.

"그래, 오늘은 웬일이냐?"

겨울 담벼랑에 매달린 시래기 다발처럼 말라버린 노인은 그가 내미는 걸망을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노인은 자신 만큼이나 낡아 보이는 작두(작두는 노인의 일부처럼 보였다)로 약초를 썰어대었다.

"흠, 이것들을 캐느라 고생이 많았구나."

노인은 그의 아비에게도 그렇게 말했고 지금의 그에게도 그렇게 말했다. 그의 아비는 예전에 죽었지만 노인은 그런 일들을 묻는 법이 없었다. 그가 아비를 따라 처음으로 산을 내려와 여기 왔을 때부터 보았던 노인은 그의 유일한 거래 상대이기도 했다.

"자, 여기 있느니라."

노인이 상목(上穆-고급의 베) 뭉터기를 던지듯 내어주자 황급히 그것을 받았다. 상목을 걸망에 집어넣고 인사를 하면 그것으로 거래는 끝이었다. 걸망을 메고 일어서려는데 노인의 음성이 다리를 잡았다.

"웬일이냐고 묻지 않았더냐?"
"예, 일전에는 태어날 자식 놈의 옷감과 미역다발이 필요해서 왔습고 오늘은 몸을 푼 안사람이 애처로워 보약이나마 지으려고 왔나이다."

잠시의 침묵이 이상하게 버거웠다. 일어서기도 무엇하고 이대로 있기에도 거북했다.

"그래, 아들이냐? 딸이냐?"
"예, 아들입니다만…."
"흐음, 하기야 그 산 속에서 살려면 네 놈 같은 사내면 좋겠지. 자, 이것을 받거라."

노인이 뭔가 묵직한 것을 던졌다. 영문을 알지 못한 그가 멀뚱히 눈을 굴리자 노인은 자상하게 웃었다.

"그것이 무엇인 줄 몰라서 그러는 게냐? 삼백 년은 족히 넘은 산삼이다. 네가 가져온 것 가운데 있었던 것이니라. 네놈이 알량한 품이라도 있다면 여기에 가져올 물건이 아니다."
"어르신, 하오나…."
"더 이상 긴 말 할 것 없다! 나는 받을 수 없으니 네 계집에게나 고아 먹이거라. 정갈히 씻은 솥에 첫 달 신 새벽에 길은 석간수(石間水)를 반쯤 채운 다음, 그 산삼을 넣고 산뽕나무 가지로 불을 때거라. 불은 너무 싸도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약해서도 안 될 것이다. 그저 뭉근하게 때다가 김이 오르면 불을 서서히 줄이면 될 것이다. 그것을 한 번도 쓰지 않은 베보자기에 짜내어 네 계집에게 먹인 다음 솥에 남은 찌꺼기는 버리지 말고 데워서 아이를 씻기거라. 산삼을 달이려고 작정한 연후에는 합방을 피해야 한다는 것쯤이야 네놈도 잘 알 테지."

노인이 약초를 써는 작두를 잡더니 익숙하게 손을 놀렸다. 그가 산삼을 집을 엄두를 못 내고 허리를 조아리는데 노인이 무심한 듯 말을 이었다.

"그래, 사내놈이라면 하초(下焦)는 튼실할 테지?"
"그, 그게… 소인 놈은 미처 보지를 못했나이다."
"허허허! 이런 미욱한 놈을 보았나? 참으로 한심한 아비로구나."
"안사람이 사내라고 말하기에 소인 놈도 그리 알뿐입니다. 그날 소인이 잠시 덫을 보러 나간 사이에 자식 놈이 태어났고 안사람 스스로 탯줄을 끊어 뒷감당을 했더이다. 돌아오니 이미 애를 씻어 강보에 싸버린 연후라…. 본래 씻기고 진 것 갈아 채우는 일이야 안사람의 몫이 아니더이까?"
"흐흠, 그럴 수도 있을 터이겠지."

노인이 그를 흘긋 바라보았다.

"그런데, 혹시 뭔가 이상한 점은 없었더냐?"

뜻하지 않은 질문에 당혹스러웠다. 노인의 질문은 범위가 일정하지 않았고 무슨 대답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곤혹스럽기만 했다.

그에게 시간의 개념은 숫자로 표현되지 않았다. 그저 계절이 오가는 것으로 가늠할 뿐이었다. 어미가 죽은 것도 여러 해 전이었고 그 이후 아내를 맞이한 것도, 다음해에 아비가 죽은 것도 그저 여러 해 전이었다. 그들이 사는 곳은 사람이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산 위에 있는 만큼 대처(大處)의 어떤 처자가 그런 곳에 시집을 오겠는가? 그의 아내는 하루거리의 등성이를 넘은 곳에서 데리고 왔다. 어디서나 그렇듯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끼리 가시버시를 지었으며 이미 늦은 총각이던 그는 아직 어린 아내가 사내를 받을 수 있을 만큼 적지 않게 기다려서야 합방(合房)에 이를 수 있었다.

그러기를 여러 해 만에 겨우 아기가 들어섰고 시나브로 낮과 밤이 지나가자 아내의 배는 달이 자라듯 점점 부풀기 시작했다.

산 속에서의 삶에서 쉰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았지만 그의 아내는 본래부터 쉬는 것을 모르고 자란 것 같았다. 심한 헛구역에 거의 먹지 못하면서도 따비밭 고랑을 일구었고 주변의 표고며 송이를 따내었다. 걱정이 된 그가 만류하고 돌아서면 뭔가를 만들고 있었고 보이지 않아서 찾을라치면 약초를 한 아름 메고 돌아오곤 했었다.

그러다가 애 떨어지겠다고 역정을 내는 그에게 비해서 아내는 너무나 차분했다. 아기를 가진 다음부터 아내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고 어떨 때는 소름 끼칠 정도로 자신의 일에 열중했다. 오히려 더 이상 만류하고 제지했다가는 그 서슬에 뱃속에 든 아기가 떨어질 것 같았고 그도 아내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일단 그렇게 마음을 정하자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무슨 생각이 그리도 길더냐?"
"예에!"

화들짝 놀란 그가 다시 눈앞의 현실로 돌아오자 노인은 무심하게 작두를 놀리고 있었다. 작두 옆에 썰려진 약초가 작은 무더기를 이룬 것을 보니 적지 않은 시간을 생각에 잠겼던 모양이었다.

"네 자식 놈이 태어난 시기에 무슨 일이 없었는가를 물었지 않느냐?"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하자 애가 선 다음 아내의 행동에 강한 의구심이 들었다. 하지만 굳이 그런 것을 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본시 산에서 나고 자란 소인 놈이 무엇을 알겠습니까?"

노인이 답답한 듯 혀를 찼다. 이제 그만 여기서 나가고 싶었지만 노인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네 놈은 용마(龍馬)가 났다는 소식은 들었느냐?"
"용마라니요?"
"하기야 산에 붙어사는 네놈이 무엇을 알겠느냐?"

작두를 밀친 노인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감히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는데 최근에 용마가 나타나 온 산이 쩌렁대도록 운다는 것, 그러자 관아(官衙)에서 나온 병사들이 용마가 출몰한다는 곳을 이 잡듯 뒤진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용마를 보고도 알리지 않으면 즉참(卽斬)으로 다스리며 인근 백 리까지 연좌를 가한다고 하느니라."
"하오나 그것이 소인 놈과 무슨 연관이 있으리까?"
"흐음…. 네놈 같은 무지렁이와 객쩍은 소리를 하는 것을 보니 나도 노망이 난 모양이로구나."
"…."
"그만 가보거라. 산행(山行)을 하자면 적어도 이틀을 꼬박 잡을 터, 네 계집이 기다리겠다."

노인이 다시 작두질에 열중하자 그는 서둘러 약전을 나섰다. 노인에게 받은 상목으로 필요한 것들을 바꾼 그가 바삐 마을을 나섰다.

태그:#아기장수, #정도령, #납량특집, #소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100권 출판을 목표로 하는 재야사학자 겸 작가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