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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먹을 줄 모르는 우무덩어리
ⓒ 주경심
"해먹을 줄도 모르는데 가져가면 뭐해요. 그냥 엄마나 드세요."

언제나처럼 고향집에서 휴가를 마치고 돌아오던 날 낡은 시골마당에서는 우무를 사이에 둔 채 작은 실랑이가 벌어졌다.

손주들이랑 사위가 시원한 콩물로 만든 우무채를 후룩후룩 마시는 모습에 바람 부는 갯가에서 아침저녁으로 주워와 말린 뒤 하루종일 푹 고운 묵을 아깝지도 않은지 바리바리 다 싸주시며 가져가라는 엄마와, 가져와 봤자 또 냉장고 한구석에서 우두망찰 세월만 보내다가 쓰레기통으로 직행해 버릴 텐데 그냥 두고 잡수시라는 나.

그래도 엄마는 여튼 부모라는 물건은 자식들한테 뭐든 퍼주고, 얹어줘야 두 다리 뻗고 잠을 잘 수 있으니까 뉘 집에 가져가서 버리든지 삶아 먹든지 그건 내 알 바 아니라며 기어이 적잖은 우무를 밀폐용기에 담아 행여 상할까 얼음까지 넣어서 보자기로 싸셨다.

그뿐이겠는가?

우무는 콩물에 채를 썰어 넣어야 제맛이라며 갓 수확한 백태까지 굳이 됐다는데도 두어 되 담아서 품에 안겨주셨다.

"해먹을 줄 모르는데…."

끝까지 고맙다는 말 대신 귀찮은 투정을 부리는 내게 엄마는 "콩 한 알 한 알이 다 느그 어무니 피땀이고, 우무채 덩어리가 다 니 어무니 뼈꼴이다 생각혀라"는 일침으로 나의 투정을 입막음하셨다.

하지만 집으로 오는 내내 나의 투정은 틀어놓은 수도꼭지마냥 계속 흘러나왔다.

"싫다는 걸 굳이 왜 주는지 몰라. 버릴 수도 없고, 해먹을 수도 없고… 안주니만 못 하다니까…."

엄마랑 실랑이를 할 때에도 차에 실을 때에도 먼 산 불구경하듯 아무런 대꾸도 없던 남편이 입을 연 건 그때였다.

"그냥 고맙습니다 하면 되지 뭐 그리 말이 많냐? 누구는 받고 싶어도 주시는 부모가 없어서 못 받는데… 호강에 겨워서 쯧쯧."

그 누구가 다름 아닌 남편임을 누구보다 잘 아는 나였기에 더 이상 투정은 부릴 수가 없었기에 집으로 오자마자 우무를 냉장고에 집어넣었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넘어가도 우무는 냉장고 안에서 전기요금에 일조를 기할 뿐 아무런 간식도, 군입거리도 되지 못했다.

남편이 팔을 걷어붙인 건 그때였다. 젊었을 적 산전수전에 공중전까지… 못하는 일 빼고는 다 해본 남편은 한때 사탕공장에서 공장장이라는 직책까지 맡을 정도로 사탕뿐 아니라 젤리를 만드는 기술 또한 특출했었다고 했다. 말로만 듣던 공장장의 그 실력과 능력을 드디어 내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우선 우무를 잘게 썬 뒤 냄비에 넣고 남편은 천천히 저어가며 녹이기 시작했다. 잠시 뒤 우무가 끓기 시작하자 소금과 설탕을 넣고 간을 맞춘 뒤 그것을 각각의 그릇에 넣었다. 그때까지는 그저 커다란 묵을 작은 그릇에 나눠 담는 정도였기에 뭔가 크게 기대하고 있던 내 입에서는 "애걔"라는 야유가 흘러나왔다.

그런데 야유를 퍼붓는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남편은 나눠 담은 우무 그릇 중 하나에는 커피가루를 조금 풀어서 저었고, 다른 그릇에는 과일들을 썰어서 담은 뒤 젓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주 비장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굳을 때까지 기다려봐!"

▲ 젤리로 재탄생한 우무
ⓒ 주경심

기다리는 시간은 참으로 지루했다. 금방이라도 달콤한 젤리를 입에 넣을 줄 알았던 아이들은 풀빵 구리듯 부엌을 드나들며 "언제 먹어? 빨리 먹고 싶은데…"라며 아직도 김이 뜨끈뜨끈 올라오는 젤리를 향해 처량한 눈빛을 날렸고, 나 역시 아이들 못지않게 남편의 팔을 붙들고 언제 먹을 수 있느냐며 재촉했다.

드디어 삽으로 태산을 옮기고도 남을 만큼의 지리한 삼십 분이 지나고 남편은 우리들 앞에 우무를 부었던 그릇들을 내려놓았다.

탱~~~ 손대면 톡하고 터질 것 같은 봉선화처럼 잘 굳은 젤리는 탱글탱글하고 맛나 보였다. 수저를 들어 한입 크게 퍼서 입에 넣었다.

"우와!!!"

감탄사가 절로 튀어나올 만큼 남편의 젤리는 맛있었다. 아니 훌륭했다.

이런 재주를 왜 이제까지 썩히고만 있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시중에서 산 것처럼 달지도 않고, 아토피 때문에 아무 거나 먹일 수 없는 작은아이에게도 안심하고 먹일 수 있는 그야말로 웰빙식품이었다.

어떻게 처리하나 걱정했던 우무 한 덩어리는 그렇게 남편이 변신시켜 놓은 젤리 덕분에 오 분만에 네 식구 입 속에서 자취를 감춰버렸고, 아이들의 성화와 나의 닭살 돋는 칭찬에 남편은 또 다시 가스레인지 앞에서 우무를 녹여서 젤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이번에는 냉동실에 넣었다.

녹여 먹는 아이스 젤리!!

벌써 내년 여름휴가가 기다려진다. 우무채의 화려한 변신으로 내년 여름휴가 때는 친정부모님께도 이 맛을 꼭 선봬드리고, 엄마가 해주는 우무채를 배 두드리며 받아먹기만 하는 대신 갯가를 돌며 파도에 밀려와 있는 우무를 주워서 이 천연 젤리를 일년내 맛봐야겠다.

태그:#우무, #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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