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일 서울극장 영화 <해리 포터와 불사조기사단> 시사회장 입구. 기자들이 보안검색를 통과하기 위해 줄지어 서 있다.
ⓒ 오마이뉴스 천호영
[낯선 풍경] 공항이 아니라 극장입니다

지난 4일 오후 서울 종로3가 서울극장 1층 로비. 극장을 찾은 관객들로선 낯선 풍경에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극장 입구에 공항에나 어울릴 듯한 보안검색대가 설치돼 있었기 때문이다. 오는 11일 개봉을 앞둔 워너브라더스의 새 영화 <해리 포터와 불사조기사단>의 언론·배급 시사회를 위한 설치물이었다.

보안검색대 앞 안내문에는 그 사유에 대해 이렇게 적혀 있었다. "불법동영상 유통을 막을 수 있도록 여러분의 협조를 바랍니다. 캠코더 등 모든 촬영기기의 반입을 자제해주시기 바랍니다."

하단에는 반입제한 품목으로 좀 더 구체적으로 동영상 휴대폰·디지털 카메라·캠코더·스틸카메라 등이 열거돼 있었다. "만일 촬영이 적발될 시에는 압수 및 퇴장 조치를 비롯하여 부득이 법적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다"는 '경고'도 빼놓지 않았다.

90일 지나면 기사에 사진 내려라?

드문드문 시사회장을 찾는 기자로선 처음 맞닥뜨리는 상황이 당혹스러웠으나 이미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시사회장에서 심심찮게 벌어져 온 광경이다. 지난 <300>과 <스파이더맨3> 시사회 때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다른 기자들은 겉으론 불만 없이 익숙하게 행동했다. 줄지어 검색대를 통과하고, 검은 양복 차림의 보안요원들 앞에서 자신의 가방을 열어 보였다. 기자도 별 수 없이 가방을 열고, 취재용으로 휴대하던 카메라를 맡겨야 했다. 오죽하면 이럴까 싶기도 했지만 묘한 굴욕감이 느껴졌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객석에 앉아 보도자료 봉투를 열어보니 보도자료집과 함께 A4 용지 1장이 들어 있었다. '해리 포터와 불사조기사단 홍보자료 사용에 관한 협조문'. 홍보자료는 관련 기사에 한해 사용하고 저작권을 명시할 것을 '부탁'하고 있었다. 새삼스레 협조를 요청할 필요가 없는 사항이었다.

그러나 바로 아래 쓰인 문구를 보는 순간 황당했다. '자료는 최초 극장 개봉일로부터 90일까지만 사용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게다가 협조문 내용을 준수할 것을 약속한다는 증표로 협조문에 서명해 배급사인 워너브라더스코리아로 팩스를 보내라고까지 주문했다.

팩스를 보내지 않으면 홍보자료를 사용할 수 없고, 또 관련 기사에 사용한 스틸 사진도 날짜를 계산해 삭제해야 한다는 것인가.

[익숙한 풍경] 최신 개봉영화 DVD 3편에 1만원

<해리 포터와 불사조 기사단> 시사회 다음날 <화려한 휴가> 시사를 위해 용산CGV를 찾았다. 용산역 상가의 중앙 광장, 가판대 2곳에서 DVD를 판매하고 있었다. 최신 개봉영화들의 DVD가 즐비했다.

판매상에게 가격을 물었더니 "3개에 1만원"이라고 했다. 당연히 불법 복제물이다. 가판대 위에 올려진 모니터에선 개봉도 하지 않은 <다이하드 4.0>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대낮 공공장소임에도 판매상은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용산만 그런 것이 아니다. 도심 길거리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곳에서 익숙하게 만날 수 있는 풍경이다. 기자가 근무하고 있는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뒷골목에서도 점심시간마다 DVD 판매 좌판이 펼쳐져 직장인들을 유혹한다. 관공서들이 몰려 있고, 특히 대로 건너편에는 저작권 관련 주무부처인 문화관광부와 정보통신부 청사가 있는 곳이다. 역시 판매상은 전혀 거리낌이 없다.

영화 개봉도 초고속인 한국 인터넷 세상

▲ 영화 <해리 포터와 불사조기사단>의 한 장면. '홍보자료 사용에 관한 협조문'에 따르면 이 사진 역시 개봉 후 90일 뒤 삭제해야 한다.
ⓒ 2007 Warner Boros. Ent.
인터넷은 상황이 더 심각하다. 지금이라도 영화 동영상을 공유하는 P2P 사이트에 접속하면 최신 개봉영화를 별 어려움 없이 다운로드할 수 있다. 그 가운데 한 곳에 접속해보니 아직 국내 개봉하지 않은 <다이하드 4.0>은 물론 국내 시사조차 하지 않은 <판타스틱4 - 실버서퍼의 위협>까지 올라와 있다.

저작권심의조정위원회 저작권보호센터 조사에 따르면 지난 2005년 불법 영상제작물 유통에 따른 국내 영화산업의 피해 규모는 약 2560억원으로 추산된다. 2006년 통계는 현재 집계 중인데, 담당자 얘기에 따르면 "피해 규모가 계속 증가하는 추세"라고 한다. 이 때문에 국내영화의 비디오·DVD 등 부가판권시장은 거의 고사 직전이다.

국내영화의 사정이 이 정도니, 판매상과 네티즌의 '애국심'조차 기대할 수 없는 할리우드영화 배급사들의 불법 영상물에 대한 피해의식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전 세계 영화시장을 상대로 제작·배급하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는 사정이 좀 다른 듯 싶다. 게다가 막대한 제작비를 들여 화려한 화면을 선보이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경우 컴퓨터 모니터의 화면이 대형 스크린이 주는 감흥을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다.

실제로 개봉 초기부터 불법 동영상이 유통됐음에도, 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 통계에 따르면 올해 개봉한 <캐러비안의 해적 - 세상의 끝에서>는 현재까지 전국 관객 452만명을, <스파이더맨3>은 464만명을 각각 동원했다. 할리우드에게 한국은 아시아 영화시장의 '시험관'으로서 기능하며, 관객 동원력 자체도 이미 무시 못 할 수준으로 커졌다. 최근 들어 <트랜스포머>처럼 국내에서 세계 최초 개봉하는 사례까지 등장하는 것은 할리우드에서 국내 영화시장이 차지하는 비중을 잘 보여주고 있다.

[낯선 풍경이 익숙한 풍경으로?] "이제 극장에선 휴대폰 조심"

<해리 포터와 불사조기사단>의 배급사인 워너브라더스코리아 측에 전화를 걸어 시사회 때의 보안검색에 대해 따져 물었다. 담당자는 "미국 워너에서 가이드라인이 내려오는데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홍보자료의 개봉일 이후 6개월 사용'이나 '협조문 팩스 발송'에 대해선 "원칙적으론 그렇게 돼 있다"며 '이해'와 '협조'를 부탁했다. '일반 관객에게도 보안 검색을 할 것이냐'는 물음에는 "현실적으로 어렵지 않겠느냐"면서 "대신 스태프들이 극장에 나가 안내문도 붙이고, 극장 안에서 감시활동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달 30일 한미FTA 최종협정문에 양측 협상대표들이 공식서명했다. 한미FTA 협정문 제18장 제10조('지적재산권 집행') 29항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각 당사국은 공공 영화상영 시설에서 영화 또는 그 밖의 영상저작물의 실연으로부터 그러한 저작물 또는 그 일부를 전송하거나 복사하기 위하여 그러한 영화 또는 그 밖의 영상저작물의 저작권자 또는 저작인접권자의 허락 없이, 고의로 녹화장치를 사용하거나 사용하려고 시도하는 인에 대하여 형사절차가 적용되도록 규정한다."

<해리 포터와 불사조기사단> 시사회장에서 벌어진 보안검색은 예고편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곧 낯선 풍경이 익숙한 풍경이 될 수도 있다.

지금은 단지 극장 안 소극적 감시활동에 그치고 있지만, 앞으로는 모든 극장 입구에 보안검색대가 설치돼 '해리 포터'나 '스파이더맨'을 만나려면 가방을 열어 보여야만 할지도 모른다. 또 극장 안에서 무심코 휴대폰을 꺼냈다가는 도촬(盜撮) 미수범으로 몰려 형사 처벌을 받을 수도 있다.

불법동영상 유통은 문제지만...

오해 없기를 바란다. 할리우드 영화 제작·배급사들이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데 대해 시비를 걸 생각은 없다. 불법영상물 판매로 수익을 올리고 있는 판매상은 말할 것도 없고 인터넷으로 불법동영상을 유통하고 있는 네티즌들을 옹호할 생각도 없다.

그렇지만, 시사회장에 보안검색대를 설치하고 극장 안에서 감시활동을 펼치는 등 기자와 관객 모두를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는 행위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만 할까.

더구나 워너브라더스코리아는 지난해 공정거래법 위반 혐의로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경고 조처를 받았다. 배급시장에서의 독과점적 지위를 악용해 지방극장에 자사 영화의 배급을 거절하는 불공정 거래행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자신은 정작 국내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기자와 관객에게 준법을 강요하는 이중적 행태에서 할리우드의 '오만'을 느끼는 사람이 기자만은 아닐 듯 싶다. 스크린쿼터조차 유명무실해진 데 이어 한미FTA가 정식 발효되면 그 오만의 콧대가 어디까지 치솟을지 벌써 두렵다.
2007-07-07 17:41 ⓒ 2007 OhmyNews
해리 포터와 불사조기사단 할리우드 불법동영상 저작권 보안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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