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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덕궁 돈화문. 파란 많은 생을 살다 간 태조 이성계의 대여가 통과한 문이다.
ⓒ 이정근
국장이 선포되었다. 관리들은 모두 소복에 검은 각대를 매고 오사모(烏紗帽)를 썼다. 온 나라가 100일간 초상집이다. 의정부에 조묘(造墓) 등 4도감과 옥책(玉冊)을 비롯한 13색(色)을 설치했다. 예조에서는 경외의 음악을 정지하고 도살과 혼인을 금했다. 뿐만 아니라 사가의 대소례(大小禮)와 이른 아침 시장이 서는 것을 폐쇄했다.

청성군(淸城君) 정탁과 공안부윤(恭安府尹) 정부를 명나라에 보내어 부음(訃音)을 전하게 한 태종 이방원은 궐내에 거려(居廬)를 준비하라 명했다. 사가의 여막이다. 창덕궁 동남방 작은 집에 거려를 마련한 태종 이방원은 소의(素衣)에 백모(白帽)를 쓰고 국사를 전폐했다. 식사도 육류를 뺀 나물 반찬에 간소하게 들이라 일렀다.

서운관원 유한우, 이양달, 이양을 거느리고 산릉 자리를 알아보던 하륜이 양주 검암산(儉巖山) 자락에 능침 자리를 정했다. 오늘날 동구릉이다. 훗날 문종과 그의 비 현덕왕후 권씨의 현릉이 옮겨오는 것을 시작으로 철종시대 익종의 수릉이 아홉 번째로 자리 잡았다. 조선 5백년을 관통하는 동안 당대의 풍수가 추천한 것으로 보아 명당은 명당인 모양이다.

아홉 릉이 몰려있는 동구릉, 과연 명당일까?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도참의 대가 하륜이 무악을 천거했으나 정도전에 밀렸다. 태종이 개경에서 환도할 때 무악을 주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태종 역시 무악을 좋은 후보지로 인정했으나 태조 이성계 때문에 한양으로 결행했다. 동전 점은 구실에 불과했다. 아버지가 사랑하는 여인 강비가 잠들어 있는 한양으로 가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한양에 건설한 경복궁과 창덕궁은 조일전쟁(임진왜란) 때 불타고 도성은 쑥대밭이 되었다. 전란 중에 연산군의 아버지 성종이 잠들어 있는 선릉을 비롯한 수많은 왕릉이 도굴되었지만 건원릉은 말짱했다. 조선 왕국은 518년 만에 망했다. 하지만 동구릉은 오늘날에도 건재하다. 기이한 일이다. 도참과 풍수지리가 맞고 안 맞고를 떠나 무악의 꿈을 실현하지 못한 하륜이 태조 이성계에게 보은한 셈이다.

조묘도감제조(造墓都監提調) 박자청이 석수쟁이 등 공장(工匠)을 거느리고 역사를 시작했다. 경기도와 충청도 그리고 전라도에서 장정들이 징발되었다. 조선 최대의 산역이 검암산 자락에서 이루어졌다.

조선은 국장인데 명나라는 아니었다. 채홍사 임무를 띠고 한양에 들어와 있던 명나라 사신 황엄은 국장은 아랑곳 하지 않고 예쁜 처녀를 빨리 내놓으라고 성화였다. 사가의 혼인을 금지하고 팔도의 처녀 80명을 뽑아 올렸으나 황엄은 7명만 간택하고 나머지는 퇴짜를 놓았다. 조선은 초상집인데 황제에게 바칠 처녀를 더 내놓으라 하니 답답할 뿐이다.

▲ 소여를 타고 뒤따르는 임금. 사진은 지난 27일 동구릉에서 거행된 기신제의 재현장면입니다.
ⓒ 나영준
발인하는 날이다. 태종 이방원이 빈전(殯殿)에 나아가 견전례(遣奠禮)를 행하고 영구(靈柩)를 받들었다. 태조 이성계의 육신이 창덕궁 돈화문을 벗어났다. 종친과 백관이 앞에서 인도하고 태종과 정종은 소여(素輿)를 타고 뒤를 따랐다. 도성에 머무르는 대소신료는 흥인문 밖 5리 에서 하직하고 거가를 따르는 백관은 말을 타고 오시에 검암에 도착했다.

태종 이방원이 영구를 직접 받들어 석실에 안치했다. 그리고 한줌 흙을 쥐어 그 위에 뿌렸다. 목이 메었다. 경복궁 앞에 진을 치고 '아버지의 과오를 인정하고 항복하시오'라고 압박 했던 불효를 용서해달라고 빌고 싶었다. 그러나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어디에선가 '벌써 용서했는데 아직도 그걸 모르고 있었느냐?'라는 아버지의 말씀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또 한줌 흙을 쥐어 뿌렸다. 자꾸만 목이 메어 온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초가을 흰 구름 사이로 어머니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다. 방긋 웃는 모습이었다.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지만 어머니 곁으로 보내드리고 싶었다. 신덕왕후 강씨를 목메게 그리던 아버지였지만 이 문제만큼은 불효하고 싶었다. 이승에서 못다 한 지아비와의 사랑을 저승에서나마 원 없이 풀도록 해드리고 싶었다.

▲ 건원릉에서 재현된 기신제
ⓒ 나영준
하관을 행한 태종 이방원은 상왕 정종과 함께 능역을 거닐며 산세를 살폈다.

"검암산이 불암, 수락, 백운산을 타고 한북정맥을 지나 백두대간에 맞닿아 있다 합니다."
"강 건너 검단산이 아비산이라면 검암산은 어미산 같구려."

"아버님께서 영혼이나마 영흥에 가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르다 말씀입니까."

"형님!"
파격이다. 임금이 상왕을 형님이라 부르는 것은 법도에 어긋난다. 그렇지만 태종 이방원의 눈빛은 어린아이처럼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따르는 시종도 없으니 형님이라 부르겠습니다. 형님도 어렵게 생각지 마시고 아우로 하대해 주시오. 동북면에서 물장구치고 놀던 때가 그립지 않씁네까?"

강한 동북면 억양이다. 정종은 빙그레 웃고만 있었다. 이방원과 이방과는 열 살 터울이다. 방원은 방간이 바로 위 형 이지만 방과를 더 따랐다. 코 흘리게 어린아이가 큰형 따라 다니며 심부름은 죽도록 하면서 혼만 났다. 그래도 방원은 방과 형이 좋았다.

"형님은 욕심이 너무 없어 탈입네다."
"아우님은 너무 많아서 탈이지요."

"제가 저 혼자만을 위하여 욕심낸 거 아닙네다. 아버님을 제 손으로 모시고 저도 저의 아들의 손에 묻히고 싶어서 욕심을 낸 것 입네다. 부르면 토를 달지 못하고 가야하는 것이 사람이지만 제가 늦게 가게 되면 형님은 제가 책임지겠습네다."

태종 이방원이 항상 걱정한 것이 왕조의 연속성이다. 부왕이 아들의 손에 묻히지 못하는 상황을 왕조의 몰락으로 간주했다. 왕이 타인의 손에 묻히면 다시 꺼내어 질 수 있다는(副棺斬屍) 두려움이 그의 뇌리를 항상 떠나지 않고 있었다. 이러한 관점으로 이해한다면 조선 왕조는 단종 시대에 막을 내린 것이나 다름없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 봉분에 억새풀이 무성하다.
ⓒ 이정근
장사를 마친 태종은 자시(子時)에 건원릉을 출발하여 환궁했다. 심야의 강행군이다. 돌아오는 길에 장사를 총감독하는 사헌집의(司憲執義) 이관을 불렀다.

"부왕의 유지에 따라 동북면 영흥에 모시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능침의 봉분에 잔디를 심지 말고 영흥의 억새풀을 심도록 하라. 이것 또한 부왕의 뜻이다."

"명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오늘날의 건원릉 봉분에는 잔디가 없다. 무성한 억새풀이 자라고 있다. 억새풀의 특성상 자주 깎아주면 죽게 되므로 1년에 한번 한식날에만 깎아주기 때문이다.

장례를 마친 태종은 산릉의 재궁(齋宮)에 개경사(開慶寺)라는 이름을 내려주고 조계종(曹溪宗)에 붙여 주었다. 능침사찰이다. 산릉을 잘 관리하라고 노비 150구와 전지 300결(結)을 정속시켰다. 불교를 척결하는 임금으로서 배치되는 처사라는 상소가 있을 것을 염려한 태종은 지신사 황희를 불러 일렀다.

"불씨(佛氏)의 그른 것을 내 어찌 알지 못하랴마는 이렇게 하는 것은 부왕(父王)의 대사(大事)를 당하여 시비(是非)를 따질 겨를이 없다. 내 생전에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니 거론하지 말도록 하라."

온 나라가 국상이고 임금이 부왕을 하관하던 그 시각. 임금의 아내 정비(靜妃)는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민제의 집을 찾아가 아버지를 문병하고 있었다. 그 자리에는 귀양처에 있어야 할 민무구와 민무질이 있었다. 딸이 아버지의 병환을 문안 하는 거야 나무랄 수 없지만 안치된 몸으로 유배지에 있어야 할 죄인이 도성에 들어와 있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태그:#건원릉, #동구릉, #검암산, #검단산, #개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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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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