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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백일을 지나면서 소아마비를 앓은 지체장애인입니다. 여섯 살이 될 때까지 걷지도 못하다가 학교 갈 무렵이 되어서야 아버지께서 산에서 만들어 오신 두 개의 지팡이에 의해 겨우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나마 초등학교는 바로 집 앞에 있어 다닐 수 있었지만 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 읍내에 있는 중학교에는 도저히 갈 수가 없었습니다.

버스는 한 시간에 한 대씩밖에 없어 콩나물시루는 저리 가라 할 정도로 김밥에 눌려진 밥처럼 꾹꾹 눌러져 가야 했던 그러한 버스였습니다. 읍내에 방을 얻어 하숙을 할 정도로 집안형편도 넉넉지 못하고, 헬렌 켈러처럼 가정교사를 둘 형편은 더더구나 못 되니 하는 수없이 저의 최종 학력은 초등학교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동권 보장이 잘 안 되어 있던 당시 장애인 교육의 현주소였습니다.

제가 잘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공부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크게 낙담을 한 저는 학교에 다녀오는 아이들이 보기 싫어 한동안 방안에만 처박혀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읍내 장에서 사다주신 천자문으로 한문 공부를 시작했고, 틈나는 대로 책을 읽고 신문을 읽으며 무엇이든 배우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영어가 복병이었습니다. 영어는 애초에 혼자서 할 수 없는 공부라 생각했습니다. 요즘처럼 책이나 테이프가 잘 나와 있고, 단어만 치면 발음까지 다 말해주고, 각종 동영상으로 배울 수 있는 컴퓨터가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랬다면 까막눈 신세를 빨리 면할 수 있었을 텐데.

그 까막눈으로 섬유공장에 취직을 했더니 원단에 쓰여 있는 알파벳으로 쓰여 있는 스타일 넘버를 읽기도 해야 하고, 따라 적기도 해야 했습니다. 알파벳 정도는 중학교에 다니는 언니의 어깨 너머로 외워두어서 다행이었지만, 영어가 저의 적임은 틀림없었습니다. 친구나 동료끼리 신나게 이야기를 하다가도 영어 이야기만 나오면 슬그머니 꼬리를 감추어야 하는 저 자신이 답답했습니다.

남동생이 대학교에 다닐 때 3일 휴가를 내어 집으로 내려갔습니다. 동생에게 우선 한글을 영어로 표기한 것만이라도 읽을 수 있게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3일 동안 꼬박 매달린 끝에 대기업의 영어표기 이름 정도를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정도면 이제 단어만 부지런히 외워도 될 것 같았지만 한 방에서 여러 명이 생활하는 기숙사에서 저의 최종학력을 내 놓고 광고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결혼을 하고 아이들이 초등학생이 되었습니다. 저희 때는 중학교에나 가야 배울 수 있었던 영어를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배운다고 하니 영어 학습지를 시키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이 일주일에 한 번씩 오셔서 수업을 하는 것을 어깨 너머로 보면서 저도 공부를 하였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비디오테이프를 보며 발음도 따라하고 단어도 외웠습니다.

그즈음 라디오 채널을 돌리다 교육방송에서 저 같은 완전 초보를 위한 <왕초보 영어>라는 프로그램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루에 한 시간씩 듣고 읽고 말하기까지. 저에게 딱 안성맞춤인 방송이라 당장 서점으로 달려가 책을 사 가지고 왔습니다. 기계 앞에 책을 펼쳐놓고 일도 하고 테이프에 녹음도 하면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녹음된 테이프를 반복해서 들으니 드디어 귀가 열리고 입도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전에는 팝송을 들으면 그 말이 다 그 말인 것만 같아 저걸 어떻게 알아듣나 궁금했는데, 단어들이 떨어져 나와 제 귀에 들린다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청취자들과 전화 연결을 하는 리스닝 퀴즈에 정답도 여러 번 맞추어 상품도 탔습니다. 영어 학원에 다니는 아이의 받아쓰기 시험에 단어를 불러줄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누구와 영어 이야기를 해도 웬만큼은 대화에 끼일 수도 있었습니다.

이렇듯 저는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만큼 혼자의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만 저의 꿈은 여전히 언제라도 공부를 하는 것이고, 아이들의 공부가 끝날 즈음 저의 공부를 시작할 생각입니다.

형편이 나아지면 중고라도 제 차를 하나 장만하렵니다. 그리하여 9년 전에 따놓은 장롱면허증이 먼지를 툴툴 털어내고 반짝반짝 빛을 발할 수 있도록 도와 줄 것입니다. 무거운 책가방을 들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힘들어서라도 선뜻 마음을 낼 수 없었던 일. 반드시 검정고시를 통과하여 대학 캠퍼스까지 밟아보는 것이 저의 소망입니다.

며칠 전 저는 열일곱 살 때 시작한 공장생활에서부터 지금껏 힘겹게 살아온 삶의 회고 같은 글을 하나 올렸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사람이 '무식한 것이 주제도 모르고 빚내서 집사고 택시사고 아이까지 낳았느냐'며, '무식하면 무식한 대로 시골에서 땅이나 파며 아이들은 중학교까지만 가르쳐 공장에 내보내면 되지 지랄한다고 도시로 몰려와서 세상 탓은 지랄 옆차기로 하느냐'는 어처구니 없는 댓글을 올렸습니다.

그 무식하다는 말이 열일곱 살 때부터 직장생활을 시작했다는 제 글의 서두를 보고 한 말 같았는데 정말 어이가 없고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왔습니다. 옆에서 함께 그 댓글을 본 두 딸들도 화가 나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습니다.

주제도 모르고 산다니요? 저는 너무나 충실하게도 제 주제에 맞추어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그토록 하고 싶은 공부도 못하고 불편한 몸을 질질 끌면서 지금껏 죽어라 고생만 하고 살았습니다.

저는 묻고 싶습니다. 어떠한 사정으로든 정규교육을 많이 받지 못한 사람들은 다 무식한 건지요? 그렇다면 저는 무식해서 죄송합니다.

태그:#소아마비, #지체장애인, #공부, #무식, #죄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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