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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을 일주일 앞둔 사촌동생이 가장 받고 싶어하는 선물은 2000원짜리 볼펜이다. MP3나 손목시계처럼 어마어마하지는 않더라도 예쁜 장식이나 달린 머리끈이나 캐릭터 티셔츠 정도는 요구할 줄 알았는데, 받고 싶은 선물 1순위가 고작 '볼펜'이라니!

사촌동생이 아직 중학생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 예상밖의 '소박함'이 일부분 이해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필통을 세 개씩 가지고 다니는 사촌동생에게도 없는 볼펜이 있다니, 그 사실이 더욱 의외다.

더 많은 볼펜이 필요해

실제로 동생의 필통 속에는 가장 만만한 검은색의 모나미 볼펜에서부터 쓸 일이 전혀 없을 것 같은 연두색 잉크의 볼펜에 이르기까지 40자루에 가까운 볼펜이 있다. 책상 위에 올려놓고 쓰는 도시락 크기 정도의 필통만 3개, 서랍 속에 보관되어 있는 것까지 합치자면 족히 10개는 되고도 남을 것이다.

'볼펜 부자'인 동생은 생일선물로 받고 싶은 볼펜이, 색깔은 갈색과 주황색의 중간 정도이면서 심이 가장 얇은 것이라야 한다고 설명했다. 동생이 원하는 볼펜을 선물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갈색과 주황색의 중간 정도의 색깔'의 볼펜을 무엇에 쓰려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나 역시 중학생이었을 시절 볼펜과 스티커를 모으는 일에 열을 올렸던 경험이 있는지라, 다양한 색깔의 볼펜은 그 종류에 비하여 실생활에 있어서는 그다지 쓸모가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 볼펜의 쓸모

오늘날처럼 인터넷 사용이 보편화 되지 않아서 사람들이 '이메일'의 존재를 잘 알지 못했을 때는 편지를 써서 주고받았기 때문에 다양한 종류의 볼펜이 유용했다. 종류가 여러 가지일수록 전하고 싶은 말을 다채롭게 표현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요즘에는 인터넷 메일이나 핸드폰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 대중화되어 편지를 쓰는 사람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노트 필기를 할 때 주로 사용하는 것은 그 중에서 가장 저렴한 검은색 볼펜이다. 제목이나 중요한 내용을 강조하기 위해 간혹 빨간색이나 파란색 볼펜을 썼지, 다채로운 색깔의 볼펜은 오히려 아끼느라 잘 쓰지 않았다.

사촌동생 역시 각양각색의 볼펜을 '수집'하기는 하지만, 그것들을 사용하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한다. 마치 우리가 유명한 작가의 소설책을 구입하여 읽지는 않고 단지 소장하는 것에 의미를 두는 것처럼 필통 속에 쌓여가는 볼펜들을 보면서 만족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볼펜을 수집하는 '그 애들'의 사정

사촌동생처럼, 그리고 학창시절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청소년들이 각양각색의 볼펜을 사는 데는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친구들과 정을 나누는 시간이 부족한 청소년들에게 학교와 학원과 집을 오가면서 손에 쉽게 잡히는 필기구는 누구보다도 돈독한 친구가 되어 준다. 또 다양한 색상의 볼펜은 필통 안이 액세서리가 되어 자신을 꾸며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고, 표현의 기회가 부족한 청소년들에게 자신의 개성을 표현할 수 있는 도구가 되어 주기도 한다.

한편으로 청소년들은 자신의 볼펜을 친구의 것과 비교하며 집단에 소속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는 가운데 우월감을 겨누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도시락만한 필통에 잘 나오지 않아도 버리지 않고 모으는 2000원짜리 펜은 소속감의 상징이며 자랑거리이다. 자신을 표현한 볼펜이 이력서처럼 노력의 결과를 상징하면서 묵직한 필통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필통 속에 숨은 문화

남녀 구분 없이 청소년들의 필통 속에는 20자루에서 40자루에 달하는 샤프와 볼펜들이 들어 있다. 내가 학교를 다니던 십여 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다. 다양하고 값비싼 필기구를 구입하는 현상은 청소년들 사이에 이미 하나의 문화로 통하고 있는 것이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정해준 교복을 입고, 교칙에 어긋나지 않는 두발을 하고서 모두가 같은 교과서로 획일화된 교육을 받는다. 때로 숨쉬기조차 힘들만큼 갑갑하다고 여겨지는 감옥 아닌 감옥, 학교. 그 속에서 내가 남과 다름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소위 '문제아'가 되어 선생님 눈 밖에 나거나 '범생'이 되어서 선생님의 눈 안에 들어야 한다. 하지만 두 가지 모두 쉽지 않은 일이다.

결국 학생들은 자신이 주위 친구들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자신을 스스로 표현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청소년들이 저 볼펜들로 공부를 하기도 하고, 자신의 생각과 상상을 그림과 글로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오히려 필통 가득 볼펜을 채울수록 청소년들의 마음은 더욱 공허해져 가는 것이 느껴지는 듯하다.

태그:#볼펜, #선물, #중학생, #사촌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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