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초, 새해를 경건하게 시작하고픈 마음에 '연애도 착하게 하자'고 다짐했었으나, 얼마 못 가 깨져버리고 말았다. 결심은 물론이고 연애 자체가 끝나버린 것이다. 그 사랑의 종말은 당시 남자친구와 화해를 결의하며 봤던 이 영화 <클로저> 때문이었노라고, 나는 지금도 믿고 있다.(그리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①(물론 내 입장에서지만) 아닌 '넘'과 깨끗하게 정리시켜줘서. ②그때 당시 고작 만 20세였던 내게, 이렇게 훌륭한 영화를 만나고 알아볼 수 있게 해 줘서.)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보고 나면 기분 묘해지는 영화 <클로저>. 나는 이 영화를 시간 날 때마다 감상하곤 하는데, 같은 장면을 여러 번 봐도 늘 처음처럼 감동하곤 한다. 명감독 마이크 니콜스의 세련된 연출 스타일은 배우들의 진한 연기와 잘 어우러져 의미 있는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게다가 영화의 시작과 끝에 흘러나오는 명곡 'The Blower's Daughter'는 훌륭한 에피타이저-디저트의 역할을 해 준다.

<클로저> 쌉싸래하고 가슴 아픈 네 남녀의 사랑 이야기

달착지근한 로맨틱 영화에 질렸다면, 그래서 새로운 사랑 얘기를 보고 듣고 싶다면 이 영화 <클로저>를 강력 추천하는 바이다. 주드 로, 나탈리 포트만 등의 멋진 배우들이 나오는 데다,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대사 역시 예술이다. 고등학교 1학년 수준의 영어 듣기 실력만 갖춘 이라면, 영어 자막으로 감상할 것을 권한다. 아름다운 원래 대사를 의미 그대로 음미할 수 있을 것이다.(단, 영화 초반에 알리스와 댄이 버스 안에서 부고기사에 관해 얘기하는 장면은 조금 어렵다.)

철학자 자크 라캉은 그의 저서 <욕망 이론>에서 '사랑하는 자는 결핍하고 있는 자'라고 정의했다. 무엇인가를 결여하고 있는 인간은, 자신의 부족함을 타인 안에서 찾기 위해 사랑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라캉의 '환상의 공식'에 따르면, 결여하고 있는 주체는 환상의 장막 너머에 있는 대상을 사랑하게 되는데 이 장막이 벗겨지는 순간 열정적인 사랑은 끝이 나게 된다.

<클로저>에 등장하는 남자들은 지독히도 결핍된 자아를 가지고 있다. 댄(주드 로)과 래리(클라이브 오웬)는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쉴 새 없이 '진실'에 관해 칭얼대며, 안나(줄리아 로버츠)와 알리스(나탈리 포트만)에 대해 알고 싶어한다. 댄은 알리스에 대해 많이 알았다고 생각하고, 새로운 환상의 장막 뒤에 서 있는 안나에게 발걸음을 돌린다. 그러나 안나가 래리와 잠자리를 했다는 사실에 실망한 댄은 다시 알리스에게 돌아온다.

진실에 관한 집착이 사랑을 얼마나 병들게 하는가에 관하여

 영화 <클로저>의 알리스와 댄.
ⓒ 콜럼비아 트라이스타

 영화 <클로저>의 안나와 래리.
ⓒ 콜럼비아 트라이스타

그럼에도 댄은 진실에 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알리스에게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관해 - 래리와 잤느냐 혹은 안 잤느냐에 관해 - 묻고 또 묻는다. 결국 알리스는 떠나버리고, 댄은 알리스가 떠나고 난 뒤에야 자신이 알리스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알리스'라는 이름마저도 그녀의 진짜 이름이 아니었던 것이다.

겉모습은 매우 쿨해 보이는 래리 역시 댄과 다를 바 없다. 래리는 자신의 외도 사실은 순순히 털어놓으면서도, 안나에게 댄과 바람을 피웠다는 고백을 듣자 불같이 화를 낸다. 자신의 잘못은 순간의 선택이라 생각하면서, 안나의 외도는 용서받을 수 없는 잘못이라 여기는 것이다. 상대방에 대한 불신과 진실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사랑은 변질되고, 그들은 모두 상처 입는다.

영화 속에서 댄과 래리는 알리스에게, 그녀가 얼마나 어린가에 관해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하지만 등장인물 중 가장 성숙한 자아를 가진 것은 알리스이다. 뉴욕에서 배낭 하나만 달랑 메고 런던에 온 알리스는, 댄을 만나 열심히 사랑하고 그 사랑이 끝났음을 직감하자 미련 없이 다른 곳으로 떠날 줄 아는 여자이다.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은, 알리스의 사랑이 거짓된 것이라며 그녀를 비난하곤 한다. 그녀의 원래 이름은 '제인'인데, 댄과 사귀는 긴 시간 동안 댄에게 자신의 본명조차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작가와 감독이 '알리스'란 이름을 단순히 거짓을 위한 이름으로 지어 붙인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프로디테'가 '미의 여신'을 의미하듯, 영어로 '알리스'라는 이름은 '진실'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제인은 알리스라는 거짓 이름으로 댄의 곁에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이름에는 진실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알리스는 댄에게 자신을 '알리스'라고 소개한 그날부터, 새로운 마음으로 댄을 사랑한 게 아닐까?

알리스라는 이름을 가지면서 그녀는 스트립댄서에서 웨이트리스가 된다. 그녀는 스트립댄서 시절, 그리고 영화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고생깨나 했을법한 과거를 댄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다. 제인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오는 동안 겪었던 힘든 일들을 벗어던지고 '알리스'로서 댄과 새로이 걸어나가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남과 여, 정말 다른 별에서 온 사람들일까?

어쨌든 알리스는 거짓말을 했다. 이 거짓말은, 여자들이 연애를 할 때 아무리 울고불고해도, 자신의 바닥까지는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바람을 피운 유부남 80%가 자신의 입으로 아내에게 외도 사실을 털어놓는다는 통계를 본 적이 있다. 남자들은 나쁜 짓을 했음에도 상대방이 자신의 잘못을 이해해 줄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나는 남자와 여자가 근본적으로 크게 다르지는 않다고 생각해왔지만, 이 영화를 볼 때마다 남녀는 다른 별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확신을 가지곤 한다. 결핍된 자아를 가진 다른 별 사람들은, 오늘도 환상의 장막 너머에 있는 그 혹은 그녀를 쫓느라 일희일비하고 있지 않을까. 그들에게 이 영화 <클로저>를 권한다. 사랑은 말랑말랑 달콤하기도 하지만, 씁쓸한 부분도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어서. 왜냐? 난 심술궂은 솔로니까!

클로저 나탈리 포트만 주드로 줄리아 로버츠 클라이브 오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