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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해서 아탈라와 나는 마이크에, 테이세르와 중빈은 테이세르의 당나귀에 나눠 타고 베두인 마을로 향해 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베두인 마을로 가는 길은 내 예상과 완전히 달랐다.

순식간에 고대도시 페트라를 벗어나 길도 이정표도 없는 사막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뒤로는 관광객들의 무리가 점점 모래알처럼 작아지고, 그들의 웅성거림도 잦아들었다. 마침내 사위는 적막해졌다. 두 마리 당나귀가 발굽을 모래에 파묻는 소리만이 부드럽게 적막을 건드렸다.

관광객들에게 공개된 페트라의 유적은 그 옛날 화려했던 고대도시의 전부가 아니었다. 페트라에서 꽤 멀어진 지점까지도 유적들은 점점이 흩어져 있었다. 외지인의 발길이 전혀 닿지 않는 곳에서, 오직 베두인들의 시선과 사막의 열기와 바람 속에 믿을 수 없는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한 채로. 나는 뜻밖의 행운에 감탄하면서 고대의 시공을 거닐었다.

그러나 감탄은 길지 않았다. 가깝다던 베두인 마을은 보이지 않았고, 그들은 계속 조금만 더 가면 된다며 점점 사막 속으로 깊숙이 들어갔던 까닭이었다. 요르단에서 내내 나를 붙잡았던 긴장이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따지고 보면 나는 아탈라나 테이세르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테이세르는 어제 처음 만났으며, 아탈라는 다나에서 한번 보았을 뿐이다.

그들이 어제 저녁 만난 빨간 셔츠의 베두인 남성과 다르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지금 중빈과 내가 관광지를 벗어났다는 사실은 아무도 알지 못하고 있으며, 만약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진다 해도 도움을 요청할만한 문명의 사정거리에서는 이미 벗어난 지 오래다.

겉으로는 초대받은 손님의 품위를 간신히 유지하면서도 나는 속으로 걷잡을 수 없는 갈등에 휩싸였다. 설마 애를 건드리진 않겠지? 그렇다면 혼자 여행하는 여성 여행자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일이란 무엇일까? 강간이나 강도, 혹은 살인?! 강간보다는 차라리 강도가 낫다. 만약 이들이 강간범으로 돌변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에이즈에 걸렸다고 말할까? 실은 에이즈에 걸려 남편도 없이 혼자 생의 마지막 여행을 떠난 거라고? 다행히 모두 영어에 능통하니, 알아듣겠지. 그렇다면 살인은…. 요르단에서 관광객 상대로 살인사건이 일어났단 말을 들어본 적은 없다.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목구멍으로 올라오는 두려움을 꿀꺽 삼켰다.

강간이나 강도, 혹은 살인?

▲ 절벽 위를 뛰어가는 아이
ⓒ 오소희
흔히 혼자 여행하는 여성 여행자들은 모두 용감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적어도 나의 경우는 그렇다. 여행지에서 생기는 즉흥적인 선택과 판단의 순간에 이르러 호기심이 늘 이긴다는 것뿐, 그래서 호기심을 따르는 선택을 하지만 이후(나중에 생각해보면 코미디 같은) 잡념이나 상상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나는 페트라 쪽을 뒤돌아보았지만, 이제 보이는 것은 모래 둔덕과 가시덤불뿐이었다.

때마침 아이가 당나귀 위에서 잠이 들었다. 종일 뜨거운 태양 아래 놀았던 데다, 당나귀의 일정한 흔들림이 아이를 잠 속에 빠져들게 한 것이다. 나는 여전히 겁에 질려서, 오히려 아이가 잠든 것이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나쁜 일이 일어난다면, 차라리 아이가 못 보는 게 나아’ 비장하게 중얼거리면서.

그 순간 테이세르가 한쪽 입술을 비틀어 씨익 웃으며 아탈라에게 아랍어로 몇 마디 중얼거렸는데, 솔직히 나는 그 말이 “자, 이제 행동개시하자!”라는 말인지, “자는 것 좀 봐, 귀엽지?”하는 말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맘속으로만 갈팡질팡 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테이세르 앞에 안긴 아이가 깊이 잠들어 몸을 축 늘어뜨린다. 테이세르는 한 손으로 고삐를 단단히 쥐고 다른 손으로 조심스레 아이를 추켜세운다. 이번엔 아이의 고개가 뒤로 꺾여 얼굴에 직사광선이 내리쪼인다. 테이세르가 자신의 모자를 벗어 덮어준다.

미안한 말이지만, 그제서야 나는 그들을 믿기 시작했다. 그들이 좋은 사람들임을. 뜨거운 아이 얼굴에 그늘을 만들어주는 사람이라면 나쁜 사람일 수가 없다고. 나의 의심이란, 물리적 힘이 약한 존재가 고립된 장소에서 강한 상대에게 본능적으로 느끼는 한낱 기우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라고.

나의 어리석음을 채찍질이라도 하듯 아탈라가 테이세르를 향해 말한다.
“아이의 셔츠가 올라갔어. 배가 나왔으니 덮어줘.”

날아가는 새도 잡는다는 베두인 아이들

▲ 베두인 마을 초입. 가운데 지점에 한 아이가 앉아있다.
ⓒ 오소희
에고고, 미안해라…. 얼마나 더 그렇게 사막을 건너갔을까? 한 시간 가까이 시간이 흐른 것 같다. 테이세르가 놀라운 말을 한다.

“아이들은 학교가 끝나면 이 길을 가로질러 페트라로 갑니다. 장사를 하거나 부모를 돕기 위해서예요. 20분 정도면 도착하죠. 베두인 아이들은 강해요. 그리고 새처럼 빠르답니다. 그 애들이 사막을 건널 때는 일부러 신발을 신지 않아요. 모래가 신발 속에 들어오는 것이 거추장스럽기 때문이죠. 베두인 아이들은 자유로워요, 거추장스러운 걸 싫어하죠.”

나는 뜨거운 모래 위를 맨발로 질주하는 어린아이들을 상상해보았다. 한 무리의 새처럼 뜨거운 빛을 가르는 생명력 넘치는 아이들을…. 그리고 아파트 앞 상가에 있는 학원에도 셔틀버스를 타고 다니는 우리의 아이들을 잠시 우울하게 떠올려보았다.

“저기가 베두인 마을이에요.”

아탈라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현대식 건물 몇 채가 절벽 위로 모습을 드러낸다. 후세인 국왕이 베두인들에게 페트라에서의 상권을 양도하는 조건으로 그들을 정착시킨 마을이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아이들 서넛이 산이라기보다는 낭떠러지에 가까운 급경사 위에서 뛰어다니며 놀고 있었다. 이어지는 테이세르의 말은 더 놀라웠다.

“베두인 아이들이에요. 죽은 새를 발견했군요. 그리로 뛰어가고 있어요. 믿을 수 있나요? 때로 우리 아이들은 날아가는 새도 잡아요. 그리고 가지고 놀죠.”

나는 입을 떠억 벌렸다. 불과 한 시간 남짓 사막을 건너왔을 뿐이건만, 이제껏 한번도 몸담아 본 적 없는 야성의 세계와 조우하게 된 것이었다.

덧붙이는 글 | 2005년 아들과 함께 아랍 3개국을 여행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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