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늦가을 무렵 인천의 도원구장에는 어느 때보다 팬들의 응원이 열광적으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태평양 돌핀스가 특유의 돌풍을 일으키며 사상 최초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했기 때문이다. 이제껏 패배라는 단어가 익숙했던 인천 야구팬들에게 그 날의 경기는 지역의 축제, 그 이상인 듯 보였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경기를 위해 구장 밖은 암표를 사서라도 보겠다는 사람들로 어느새 북새통을 이루었다. 장내는 꽉 들어찬 관중들의 열기로 그 혼잡함이 더했다. "박정현이다." 경기 시작과 함께 한 선수가 조심스럽게 마운드에 오르자, 관중들은 일제히 '박정현'이라는 이름을 외쳐대기 시작했다. 관중의 환호를 받으며 마운드에 오른 박정현은 이날 경기에서 삼성 타선을 상대로 14이닝동안 160개 정도를 던져 승리 투수가 됐다. 인천 야구의 르네상스기를 알린 이 날의 대혈전의 주인공 박정현 선수를 7월 30일 오이도 역 부근 카페에서 만났다.
 태평양 돌핀스에서 언더핸드 투수로 활약한 박정현
ⓒ 이종길
-실제로 만나보니 장신이다. 어린 시절 농구에서도 제의가 많이 왔을 법한데 야구를 택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중학교 2학년 때 친구들과 동네야구를 하던 중 내 모습을 보신 학교 야구부 감독님의 권유로 처음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 내 키가 188cm였는데 상대적으로 다른 학우들보다 키가 커 많이 부각되었던 것 같다. 하지만 큰 키에 비해 몸이 너무 말라서 운동을 하기엔 체력적으로 부담이 컸다. 농구와 같은 격렬한 스포츠는 감히 엄두도 못 낼 정도였다." -실제로도 경기를 보았지만 그 큰 키에서 언더핸드 피칭을 했다는 게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다. 잠수함 투수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처음엔 체력 부담 때문에 언더핸드 피칭을 연마하게 되었다. 마른 체력의 소유자들에겐 오버핸드로 던지는 것이 몸에 상당한 무리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후 고교시절에 체력을 키우고 오버핸드로 폼을 바꿀 기회가 있었는데 피칭을 계속하다 보니 아무래도 내 체형에 맞는 동작은 언더핸드라는 확신이 들더라. 그래서 그 이후부터 계속 언더핸드 피칭을 고수했다. 당시 언더핸드 피칭으로 138km정도의 구속이 나왔는데 지금처럼 140km대 이상의 빠른 공을 던질 수 있는 투수가 많지 않던 시절이어서 구속에도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진학한 고교가 야구부 창단 2년째를 맞이한 유신고였다. 거의 초창기 멤버나 다름없었는데 당시의 분위기가 남달랐을 듯하다. "그땐 정말 대단했다. 지금처럼 학부형 위주의 고교야구가 아닌 아마추어 마니아들이 꽤 많이 형성된 시기였다. 각종 방송, 신문들의 눈이 고교야구를 떠날 줄 몰랐고 그 비중은 사회적으로도 상당한 위치에 있었다. 거의 신생팀이나 다름없었지만 이러한 분위기는 내가 진학한 유신고등학교 역시 동일했다. 특히 당시 경기도 야구팀이 손을 꼽을 정도로 적어서 학교의 인기가 높을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입학 당시 야구팀 창단멤버로 16명 정도의 선배가 있었는데 나를 포함해 9명 정도가 2기로 들어왔던 기억이 난다. 그때 만난 선배 중엔 지금 프로야구 주심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는 전일수 선배도 포함되어 있다." - 고교 시절 황금사자기 대회에서 4강 업적을 이뤄냈는데. "그땐 유신고가 좋은 성적을 낸 것은 물론 내가 3게임에 모두 출장했다는 것이 참 행복했다. 생각해 보면 난 고등학교 시절 운이 참 좋았다. 내가 고등학교 1학년이었을 때만 해도 중학생은 3이닝, 고등학생은 5이닝 이상을 던질 수 없는 규정이 있었는데 이 규정 덕분에 1학년 때부터 기회가 많았기 때문이다. 또 이런 규정이 바뀌어 이닝 제한이 없어진 후엔 많은 이닝을 소화할 기회를 자연스럽게 얻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성장기에 많이 던질 수 있어서 그만큼 스피드도 급상승하게 된 것 같다." -고교시절 황금사자기 대회 외에 기억에 남는 경기가 있나. "고교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는 당시 전국 최강으로 군림하던 서울고등학교를 이긴 경기가 아닐까 싶다. 내가 9회 1아웃까지 소화하고 내려온 경기였는데 당시 2-1 짜릿한 승리는 아직도 내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있다. 당시에 내 방망이 솜씨도 한몫 발휘했는데 힘이 부족해서 그렇지 나도 맞히는 거 하나에는 자신이 있었다.(웃음)" - 당시 서울고의 주축 선수가 누구였나. "지금 현대에서 뛰고 있는 김동수 선수였다." - 김동수 선수는 현재도 선수생활을 왕성하게 해내고 있는데 너무 빨리 은퇴한 게 아닌가 싶다. "지금은 아니지만 예전엔 30세가 넘으면 노장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웃음) 솔직히 성적 부진 때문에 방출된 거다. 거기에 운도 크게 작용했고. 당시 SK 와이번스가 팀 색깔을 바꾸기 위해 개혁을 강행했던 게 내게는 불운이었다. 하지만 당시엔 이전의 쌍방울 레이더스 이미지를 극복하기 위해 구단이 사실상 큰 칼을 꺼내들 수밖에 없었다. 엄연히 말하면 그때 내가 뚜렷하게 보여준 것이 없어 방출되고 만 거다. 당시 나를 포함해 박재용, 김정원 등 26명이나 되는 이들이 함께 방출됐는데 야구사회도 냉정한 사회이기에 내 처지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 프로 데뷔 시절의 좋은 성적이 오랫동안 유지되지 못해 개인적으로 무척 아쉽다. 선수시절 194cm에 몸무게가 67kg였다는데 팔이 바닥에 스칠 듯한 투구 폼이 가뜩이나 마른 몸에 많은 무리를 준 것은 아닌가 싶다. "나도 그렇고, 이강철 선배도 무릎수술을 받았지만 언더핸드 피칭의 선수들은 대부분 오른쪽 무릎 연골에 상당한 무리가 가고 허리와 엉덩이를 많이 쓰다보니 팔보다는 하체에 무리가 많이 온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이러한 부상의 여파가 언더핸드 투수들의 생명에 상당한 타격을 입힌다는 점에 있다. 부상으로 인해 선수는 아프지 않게 던지려고 폼이 자연스럽게 변형되는데 이에 따라 볼의 끝은 밋밋해지거나 구속이 저하되기 쉽다. 나중에 잃어버린 폼을 다시 찾는 것 역시 쉽지 않다. 물론 어느 투수에게나 부상은 이러한 우려를 안겨주지만 언더핸드의 투수들에게 이러한 경향은 더 심한듯하다." - 89년 삼성과의 준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14회를 완투하고서도 3차전 4회에 다시 등판한 것을 박 선수의 부진 이유로 꼽는 사람들이 많다. "당시 1차전에서 14이닝동안 160개 정도를 던졌는데 이 때를 내 자신이 혹사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이틀을 쉬고 5이닝을 던진 3차전이 문제였으면 문제였다. 하지만 당시의 분위기는 나 자신조차 어쩔 수 없는 분위기였다. 이전의 인천 야구에 장명부 시절이 있긴 했지만 그때만큼은 팀 전체가 이러한 기회가 언제 오겠느냐는 분위기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대는 당시의 태평양 선수들을 넘어 인천 팬들을 하나로 만들 정도로 대단했다. 특히 준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최창호 선수가 삼성의 김용국 선수에게 만루홈런을 맞은 게 팀에게는 큰 자극제가 되었다. 2차전 경기 후 모두 다시 한번 해보자는 분위기를 넘어 비장한 각오를 하던 기억이 난다." - 하지만 당시에 절뚝거리면서 마운드를 내려왔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경기가 끝나기도 전에 바로 입원 절차를 거쳐 허리 디스크 판정을 받았다. 정말 속상했다. 당시는 혹사의 개념이 없던 시절이어서 혹사에 대한 생각은 하지도 못했고 단순히 내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 팀이라는 생각에 억울할 뿐이었다. 그런데 사실 당시의 부상 원인을 찾자면 단순히 3차전의 투구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다. 처음으로 풀 시즌을 거쳤기에 상당한 통증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교를 졸업하고 프로에 와서 풀 시즌을 지낸다는 것은 생각보다 힘든 일이다. 사실 2년차 징크스도 알고 보면 첫 시즌을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가다 생기는 후유증이 아니겠는가." - 재활 기간이 선수 시절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 듯하다. 초창기의 뛰어난 성적 때문에 재활 시에도 많은 부담을 가졌을 것 같은데. "1군과 2군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정신적으로 참 많이 힘들었다. '내가 왜 여기 있어야 하나?'란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특히 어렵게 1군에 올라와 중간계투요원을 맡으면 그런 생각은 더 많이 들었다. 당시엔 중간계투요원들은 몸을 일찍부터 풀었기 때문에 금방 체력이 저하되기 쉬운데 30개를 마운드에서 던졌다 하면 대략 70개 정도를 던졌다고 보면 될 정도였다. 나에게 정말 혹독한 보직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이러한 생활을 탈피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스피드를 올리려고 팔을 약간 올려서 던져보기도 하고 약간씩 내 폼에 변형을 주기도 했다. 그런데 실제로 팔을 약간 올려서 던져보니 볼에 스피드가 붙었다. 스피드가 붙은 상태에서 이전의 내 폼을 구사해도 같은 스피드가 기록될 정도였다. 아마 그 때가 쌍방울로 이적한 첫 해가 아니었나 싶다." - 어찌됐건 당신은 한국야구에서 기념비와 같은 선수임이 분명하다. 특히 고교투수 최초로 신인왕을 획득한 것은 한국프로야구역사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태평양 돌핀스 입단 초의 평균자책점 7.71이 1년 만에 달라진 비결은 무엇인가. "1988년도에 입단해서 처음으로 1군 경기를 했는데 그 때가 롯데와의 개막 2차전 선발이었다. 그런데 그 중요한 데뷔 경기에서 롯데 유두열 선수에게 만루홈런을 맞고 말았다. (웃음) 이후 2군으로 내려가게 되었는데 그 때의 2군 생활이 내겐 참 많은 도움이 되었다. 특히 2군에서 최창호 선수와 둘이서 거의 한 게임씩 완투했는데 많이 던지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던 것 같다. 타자들을 잡는 요령이 생겼다고나 할까? 특히 당시 OB 2군 팀과의 경기는 나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런 경험이 쌓이고 거의 1년여 만에 1군에 올라오니 개막 때 같이 운동했던 선배들이 여럿 보이지 않았다. 내가 없는 사이에 모두 팀에서 방출된 것이다. 그 때 이놈의 야구판이 장난이 아니라는 생각과 함께 세상의 무서움도 함께 깨닫게 되었다. 정신적으로 성숙해질 수밖에 없던 나날들이었다."
ⓒ 이종길
- 당시 김성근 감독의 '오대산 지옥훈련'이 태평양 돌핀스의 89년 영광을 이뤄낸 결정적인 요소로 꼽히고 있는데. "지옥훈련은 체력적인 문제보다는 정신적인 면을 향상시키기 위해 떠난 훈련이었다. 당시 팀 성적이 워낙 안 좋다보니 선수 개개인들이 하나로 융합하지 못했는데 이런 문제를 김성근 감독님은 지옥훈련을 통해 개선하려고 한 것이다. 오대산에 별장을 잡고 하루에 10시간 이상을 산행하고 내려와서 평지를 걷고 계곡얼음을 깨고 마사지를 하면서 정말 힘들었지만 재미있는 시간들을 보낸 기억이 난다. 특히 산을 모두 천천히 내려가려고 했는데도 다들 다리에 힘이 풀려 본의 아니게 빠른 걸음으로 걸었던 게 무척이나 재미있었다. (웃음) 힘든 훈련을 마치고 찬물에 들어갔을 때의 피로가 풀리는 느낌도 잊을 수 없을 만큼 좋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새벽에 팬티 바람으로 구보를 한 적도 있었던 것 같다. (웃음) 아무튼 당시에 김성근 감독의 이러한 훈련은 다른 팀에도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했는데 특히 삼성 구단은 포항의 해병대로 훈련을 떠났다가 큰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차디찬 겨울 바닷물에 들어갔다가 삼성의 이태일 선수가 심장마비로 고생을 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가끔씩 이 때의 훈련을 생각하면 아직도 쓴웃음이 나온다. (웃음) 그런데 나와 이런 김성근 감독님과의 인연은 생각보다 질기더라. 쌍방울로 이적하면서, 감독님을 다시 만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웃음)" -정말 질긴 인연이다. (웃음) 이런 감독님께 서운한 감정은 없나. "서운한 감정은 없다. 그 시대엔 지옥훈련이나 엄격한 팀 관리가 당연한 것이었으니까. 감독님은 사실 나에게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많은 관심을 주셨고 그만큼 많이 아껴주셨다. 태평양 시절에 내가 술을 좋아하는 걸 간파하시더니 나를 나보다 15살 정도 많은 삼촌뻘의 선배들(김일권 선수 등)과 같은 방을 배정하실 정도로 관리를 철저히 해주셨던 기억이 난다. (웃음) 감히 말하지만 감독님은 한국야구에 없어서는 안 될 분이다. 사적인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을 정도로 정말 야구밖에 모르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가끔 정명원, 최창호 선수와 함께 감독님을 찾아뵈면 아직도 야구 이야기만 세 시간 이상을 하실 정도로 정말 야구밖에 모르신다. 지금도 나의 코치로서의 삶을 간간히 지도해주시는 게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 인연이라면 정명원 선수 역시 빼놓을 수 없을 듯하다. 98년 현대의 창단 첫 우승 당시 정 선수가 박 선수의 공백을 아쉬워하며 울먹이던 기억이 난다. "너무나도 고마웠다. 우승을 이룬 정신없는 상황에서 나를 언급해준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사실 프로 초기부터 최창호 선수, 정명원 선수는 셋이서 함께 '우승 한번 해보자!'는 다짐을 할 정도로 두터운 관계였다. 아시다시피 당시 언론이나 매스컴에서 우리를 3총사 혹은 트리오로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떠난 후 이러한 다짐은 이뤄질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 때의 고마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감격스러웠다. 마치 나도 같이 우승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우리 셋은 처음부터 공통점이 많았는데 아마추어 시절에 그리 유명세를 타지 않은 선수들이었다는 점에서부터 우리는 서로 많이 의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관계는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아직도 연락을 주고 받고 있으며 앞으로의 인생을 함께 걸어갈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 다시 생각해봐도 1989년은 박 선수에게 그야말로 잊히지 않을 해일 듯하다. 당시 박정현-최창호-정명원의 태평양 영건 3인방은 해태의 이강철-조계현-이광우 영건 3인방과 견주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당시 라이벌로 생각했던 선수가 있었나. "라이벌이라기보다는 선망의 대상이었던 사람이 이강철 선수였다. 같은 언더핸드 피칭을 하는 것은 물론 내가 가지고 싶었던 여러 가지 변화구를 이강철 선배는 모두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 얼마 전 유감스럽게도 89년의 영광 중 하나인 최연소 10승 기록이 류현진 선수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어차피 기록은 깨지라고 있는 거 아니겠는가? (웃음) 현진이는 정말 대단한 투수다. 지금과 같이 선수층이 두꺼운 프로의 세계에서 저렇게 올라간다는 것은 분명 쉽지 않은 일이다. 사실 현진이의 투구를 프로에 와서 처음 본 것은 아니다. 이전에 그가 고교대회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직접 본 적이 있는데 왼손투수에다 던지는 각이 상당히 좋아서 당시 부상만 피한다면 롱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마 한화 방망이가 좋아서 내 신인 19승 기록이 깨지는 것도 이제 시간문제가 아닐까 싶다.(웃음)" - 메이저리그나 일본야구는 보는가. "자주는 아니고 거의 우리나라 선수 위주로 보는 정도다. 하지만 상무 코치시절에는 메이저리그를 참 많이 봤다. (웃음) 보면서 도움도 많이 되었고." - 눈여겨보거나 정말 좋아하는 선수가 있다면. "인상 깊게 본 투수를 한 명만 꼽는다면 일본의 와타나베 선수를 꼽고 싶다. 어느 투수나 자기 자신의 볼에는 자신감이 있어야 하는데 와타나베의 공을 보면 그러한 자신감이 절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특히 공의 강약 조절을 대담하게 해서 타자의 타이밍을 뺏는 기술이 그야말로 최고였다. TV중계를 보면서 '아, 저런 걸 내가 현역시절에 해봤어야 했는데'란 생각이 들 정도로 멋진 선수였다." - 야구선수였기에 TV중계로 야구를 보면 지금도 뛰고 싶은 마음이 절로 생기나 보다. "야구선수였기에 다시 뛰고 싶은 마음은 그 누구보다 간절하다. (웃음) 특히 코치로서 야구를 지도할 때 제자들이 던지는 걸 보고 있으면 '아, 저건 저렇게 해야 하는데'하는 생각과 함께 다시 뛰고 싶은 생각이 불쑥불쑥 생긴다. 하지만 그러한 아쉬움이 없는 선수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 선수 시절 경기장의 중심인 마운드에 오르면 주로 어떤 생각을 했나. "항상 '최고'라는 생각을 가지고 마운드에 올랐다. 투수는 최고라는 생각을 가지고 마운드를 오를 때야말로 자신감 넘치는 투구가 절로 나온다고 생각했다." -그런 야구를 놓지 못하고 얼마 전까지 상무에서 코치직을 맡았다. 코치의 눈으로 바라본 야구의 느낌이 다를듯한데. "선수 시절엔 한 선수(상대팀 타자)에게만 집중하면 그걸로 그만이었다. 하지만 코치직을 임하다보니 많은 선수들을 바라보아야 함은 물론 그 선수들에 대한 세심한 관리까지 신경써야 하더라. 쉽게 말해 한 이닝만을 생각하는 게 아닌 경기 전체를 꿰뚫는 눈이 요구되는 자리가 바로 코치의 위치라고 생각한다." - 그런 상무에서 만난 현역 프로선수에는 누가 있나. "김백만, 김상현, 김해님, 김광삼, 이동학, 김대우 등의 선수들이 있었다." - 김광삼, 이동학 선수의 경우 상무를 거친 후의 기량이 상당히 발전했다는 평가다. 훈련에 가장 주안점을 둔 부문은 무엇이었나. "내가 코치직을 맡았을 때 상무에 오는 선수들의 대부분은 각 팀의 1.5군이었다. 대부분 체력을 회복해야 하거나 정신적으로 자신감을 회복해야 할 선수들이었다. 그래서 가장 처음 선수를 만나면 그 선수와 될 수 있는 한 많은 대화를 하려고 노력했다. 대화를 통해 고쳐야 할 점과 심리적인 부분을 상담해주면 그 선수에 대해서도 자연히 알아가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사실 야구는 많은 분들이 공감하겠지만 상대방과의 싸움보다도 나 자신과의 싸움이라 할 수 있다. 시속 100km의 공을 던지더라도 자신 있게 던지는 공과 그렇지 않은 공이 큰 차이가 있다. 그것이 바로 야구 아닌가. 결국 자신감 회복을 가장 기본적으로 선수들에게 심어주려고 노력한 것 같다. 특히 김광삼 선수의 경우 변화구의 구사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았는데 좋은 직구가 있는데도 변화구를 자꾸만 고집하는 게 내심 안타까웠다. 그래서 직구에 대한 자신감을 심어주려고 나름대로 조언을 많이 해줬다. 어떨 때는 경기에서 직구만 구사하라고 요구한 적도 있었는데 얻어맞는다고 해도 어차피 야구는 타자들에게 맞으면서 배우는 거라고 이야기한 기억이 있다. 이후 SK 2군 팀과의 경기에서 김광삼 선수가 엄정욱 선수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 아주 자신감 있는 투구내용으로 30분도 안 되어 5회를 마치더라. 그때 속으로 얼마나 흐뭇했는지 모른다.(웃음)" - 요즘 집에서 쉬는 동안에 무엇을 하나. "야구 코치에 대한 공부를 한다. 야구를 계속 할 거라면 그만큼 공부도 꾸준히 병행해야 하지 않겠는가." - 야구인이라면 가정에 소홀해지기 쉽다는데 요즘은 제 몫을 톡톡히 해낼 듯하다. 자신이 가정적인 남자라 생각하나. "야구선수들은 의외로 가정적이다. 물론 내 아내의 생각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웃음) 결혼을 94년도에 했으니 벌써 10년이 넘었는데 내 주변에 있는 결혼 10년차 이상의 야구인들은 자신들이 대부분 가정적인 남자라고 생각한다. 물론 거기엔 나 역시 포함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웃음)" - 아무래도 야구 때문에 아직까지 하지 못한 일들이 많을 것 같다. 쉬는 동안 여행은 많이 다니나. "1군과 2군 생활을 병행하면서 여행이란 여행은 원 없이 다녔다. 그래서인지 여행에는 큰 미련이 없다. 집사람과 최근에도 많이 다녀왔고. (웃음) 아! 요즘 집에서 쉴 때 가끔 '카트라이더' 같은 온라인 게임을 즐긴다. 생각보다 재미있더라. 어느덧 레벨도 상당 수준에 올랐다. (웃음)" - 이전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앞으로 코치로서 선수육성을 잘 해낼 듯 보인다. 선수육성에만 매진할 계획인가. "얼마 전에 아마추어 코치 자격증을 획득해 야구감독으로서 새 꿈을 펼쳐나가려고 준비하고 있지만 선수 시절 많은 부상으로 아파하기도 했고 또 그런 선수들과 함께 있어서 그런지 나중엔 그런 야구인들이 마음 놓고 공을 던질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와주는 재활 트레이너를 해보고 싶다. 아무래도 미국에 전지훈련을 가서 트레이닝 등에 대한 여러 가지 시스템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나도 모르게 들었던 것 같다."
ⓒ 이종길
- '야구'란 두 글자는 앞으로도 '박정현'이라는 이름 앞에 항상 따라다닐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야구가 박 선수의 인생에서 무엇인지 말해 달라. "내가 생각하는 야구는 '인생'이다. 우리네 인생살이와 야구는 그 속성이 닮아있기 때문이다. 가령 인생의 굴곡이나 전체적인 흐름, 희로애락 등은 야구의 속성에서 절대로 빼놓을 수 없다. 야구 안에 삶이 있고, 그 삶 안에 야구가 있는 듯하다. 어쩌면 그런 이유로 알면 알수록 더 힘든 것이 야구인 것 같기도 하다. 이론적인 것만으로는 절대 계산되지 않는 오묘한 맛, 그것이 내가 야구를 계속 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 마지막으로 박 선수를 기억하는 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나를 기억해주는 분들이 있다는 것은 정말로 행복한 일이다. 날 기억해주는 사람들이 있음에 나도 지금 이렇게 웃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분들께 실력으로 많은 것을 보답해드리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하고 은퇴해 정말로 죄송스럽다. 하지만 훗날 선수 육성에 힘을 써 '아! 저 선수, 박정현이 키운 선수였구나'는 말이 나올 수 있도록 앞으로도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

덧붙이는 글 마지막으로 인터뷰의 성사를 도와주신 유신고등학교 이성렬 야구부 감독님, <스포츠2.0>의 박동희 기자님, <오마이뉴스> 김성훈 시민기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 기사는 스포홀릭에도 송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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