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지난 2일 방영된 이흥규 할아버지의 모습.
ⓒ SBS

"'어떻게 그런 사람들이 있느냐, 아직도 맞고 사느냐' 등의 말을 자주 듣는다. 주위에서 조금만 막아주고, 개입해주면 우리에게 오지 않을 제보들이 많다. 그런데 그게 안되니까…."

지난 2일 '현대판 노예' 편을 통해 50년간 노동착취·학대를 당한 이흥규(72) 할아버지의 비참한 모습을 고발해 시청자들의 공분을 샀던 SBS <긴급출동 SOS 24> 김형민 PD.

그는 지난 4월초 경기 화성시 한 마을에서 처음 이흥규 할아버지를 봤던 순간을 잊지 못했다. 할아버지가 리어카를 끌면서 일하고 있었는데, 김 PD나 같이 갔던 후배 PD나 동시에 육두문자가 튀어나왔다는 것. 그는 이를 '초보적 분노'라고 표현했다.

할아버지는 분명 나이가 많아 보였지만, '주인'이라 불리는 남자는 위압적으로 반말을 내뱉으며 일을 시켰다. 남루한 차림의 할아버지는 구부러진 허리로 '주인'의 눈치를 보며 쉬지 않고 일했다.

시골마을에 '현대판 노예'가 있다는 제보. 그 비운의 주인공과 첫 만남은 이렇게 이뤄졌다.

"할어버지의 고통에 육두문자가 그냥... 이건 초보적 분노"

▲ 50년간 노동착취와 학대를 받은 이흥규 할아버지.
ⓒ SBS 제공
이후 김 PD는 마을 주민들을 만나 사실관계를 확인했다. 이흥규 할아버지와 '주인' 부부, 면사무소 복지담당자, 관할 경찰서 관계자도 만났다. 이흥규 할아버지 가족도 찾았다.

20여일간 취재에서 밝혀진 내용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 마을의 '유지' 집안에서 50년간 노예나 다름없는 머슴을 해온 할아버지의 처참한 생활이 사실로 드러났다.

할아버지는 새경은커녕 제대로 된 식사조차 제공받지 못했고, 오물이 섞인 도랑에서 몸을 씻었으며, 배고픔에 음식쓰레기통을 뒤졌다. 어두운 밤 10시까지 혼자 일하던 할아버지가 귀가한 곳은 폐가 수준의 낡은 집. 각종 생활 쓰레기로 뒤덮인 방에 온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그에겐 '주인'의 구타까지 가해졌다. "그래야 말을 잘 듣는다"는 게 '주인' 남자의 항변.

제작진과 전문가들의 구조로 할아버지가 낡은 옷을 갈아입는 순간 김형민 PD는 다시한번 경악했다. 언제 입었는지 모르는 할아버지의 팬티는 아예 삭아 형체를 알 수 없는 누더기에 불과했다.

그 곳에 인간의 존엄은 존재하지 않았다. 김 PD는 "가해자 자체가 나쁜 사람이라기보다 인간과 인권 자체에 대한 개념이 없었던 것"이라고 진단했다. "최소한 밥은 굶기지 않았다"는 생각만 있을 뿐 자신이 한 일이 정당한 대우인지 아닌지를 몰랐다는 것이다.

취재과정에서 수십번도 더 들은 "(이흥규씨를) 먹여주고 재워줬다"는 말도 같은 맥락이다. 가해자뿐 아니라 일부 마을 주민도 그렇게 생각했다. 내치면 굶어죽었을 거 아니냐는 반문이다. 할아버지의 50년 인생을 학대한 게 아니라, 이른바 '거뒀다'는 사고방식이 강했다.

김 PD는 "벌써 사라졌어야 할 잔재임에도 '저런 사람은 이 정도 해주면 된다'는 인습, 관습이 한 인간에 대한 50년 학대를 가능하게 했다"고 안타까워 했다. 그는 "시골마을, 약간 어눌한 사람들, '그 집(가해자)에서 책임지고 있다'는 말로 폭력이 감춰지는 문제 등이 '현대판 노예' 사건의 공통된 특징"이라고 말했다.

한편 '현대판 노예' 방영 이후 제작팀에는 "우리 마을에도 이런 분이 있다"며 유사 제보가 쇄도하고 있다. 김 PD는 "일선 복지사나 관계기관 담당자들이 이런 문제를 체크해줘야 하는데 열악한 우리 사회의 복지시스템 자체도 이를 어렵게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취재하다 보면 어떻게 손을 쓸 수도 없는, 법의 사각지대에 놓인 경우가 너무 많다"고 고충을 털어놨다. 아이들을 집에 가두다시피한 채 학교에 보내지 않는 엄마가 '내 방침'이라고 고집하니까 대응책이 불가했던 경우를 사례로 들었다.

그래서 그는 "우리 사회의 복지 시스템에 대한 적극적인 홍보, 제도의 미비와 보완까지 전반적인 관심이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이흥규 할아버지 사건도 이를 제보하고 확인하는 창구가 좀더 넓었더라면 진작에 없어질 일이 아니었을까 하는 게 김 PD의 생각이다.

▲ 요양소에서 건강을 되찾고 있는 이흥규 할아버지 모습. 자신의 텃밭을 가꾸고 있다.
ⓒ SBS 제공
"후속관리도 하지만 방송으로는 한계, 사회가 달라져야"

지난해 11월 1일 '아들에게 맞는 어머니' 편으로 시작된 <긴급출동 SOS 24>(팀장 허윤무)는 '폭력추방'을 모토로 내걸었다. 우리 사회 곳곳에 숨겨진 폭력 문제를 실제 사례를 통해 조명하고, 해결방안 제시와 사후관리까지 병행하는 해결(솔루션) 프로그램.

18명의 PD와 13명의 작가, 사회복지사 출신의 사후관리 전담자 등 제작진과 30명의 전문가들이 솔루션 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그동안 < SOS 24 >를 통해 드러난 폭력의 실태는 끔찍하고 적나라했다.

아내에게 극심한 폭력을 일삼는 남편, 남동생을 상습적으로 때리고 여동생을 성폭행한 청년, 데이트폭력과 스토커, 6살짜리 딸에게 앵벌이를 시키고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 14년간 본드중독으로 뇌가 70세 노인만큼 늙어버린 남자, 원조교제 피해 소녀, 어머니를 폭행하는 10대 소년, 밤마다 휘파람을 불어 주민의 원성을 샀던 50대 남자, 아이들을 집에 가둔 채 학교에 보내지 않는 엄마 등.

방송 초기, 방치되고 은폐됐던 각종 폭력이 안방으로 생생하게 전달되자 충격만큼이나 논란도 뜨거웠다. '남의 불행을 상품화하느냐'는 비난과 '사각지대에 방치된 피해자들에게 해결책을 찾아줬다'는 평가가 엇갈렸다. 자극적 연출과 선정성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그러나 이들 폭력의 내면에는 가정불화와 가정폭력 등이 1차 원인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 속속 증명됐다. '폭력의 대물림'이 얼마나 무서운지, 폭력에 대한 우리 사회의 무관심이 어느 정도인지를 여실히 보여준 것. 피해자에 대한 제작진의 효과적인 대처, 체계적인 사후관리도 관심을 끌었고 시청률은 줄곧 두자릿수를 유지했다.

지난 9일 방송된 '쓰레기 모으는 엄마-수집강박 엄마' 편은 전국시청률 17.6%(시청률전문조사기관 TNS 집계)로 이흥규 할아버지의 50년 학대를 다뤘던 지난주보다 2.7%포인트가 더 올랐다. 김형민 PD는 이에 대해 "폭력에 대한 사회의 인식이 달라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그는 "후속관리까지 도와주며 최선을 다하지만 방송에는 한계가 있다"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회의 인식 문제"라고 강조했다. 김 PD는 "칼만 들어야 폭력이 아니다"며 "가정폭력·학원폭력·아동학대·노인학대·방임·감금·언어폭력은 물론 알콜중독으로 밤에 괴성을 질러 온 동네를 괴롭혔던 것 모두 폭력"이라며 거듭 인식의 전환을 당부했다.

"제작진도 '상담받자, 우울하다' 할 정도"
김형민 PD "사회인식 달라질 때 큰 보람"

김형민 PD는 현재 '현대판 노예' 후속편 취재에 열중하고 있다.

오는 16일 방영될 후속편에서는 이흥규 할아버지 근황을 보여주고 가해자 처벌 상황과 가족책임론 등 일부에서 제기된 의혹을 다룰 예정이다. 최근 접수된 '현대판 노예' 제보 중 유사 사례 1∼2건도 방영된다.

지난 95년 SBS에 입사한 김 PD는 그동안 <리얼코리아> <특명! 아빠의 도전> <인생대역전> 등의 프로그램을 연출했다. 다음은 김 PD와 전화 인터뷰 요지.

- 이흥규 할아버지를 취재하게 된 계기는.
"지난 1월쯤 제보가 왔는데 다른 취재 일정으로 4월에야 취재를 시작했다. 아무래도 작은 시골마을이다 보니 취재진 정체가 알려질 수밖에 없어서 애를 먹었다. 몸을 숨기기도 하고, 나갔다 들어오기도 하고 그랬다."

- 사회적 파장이 크다.
"이렇게까지 클 줄 몰랐다. 할아버지를 처음 봤을 때 육두문자가 튀어나왔다. 초보적 분노랄까. 인간에 대한 기본 예의가 없었다. '최소한 밥은 굶기지 않는다'는 생각이 강했지 이게 정당한 대우인가 아닌가에 대한 개념은 없었던 거 같다."

- 이씨가 학대받은 기간이 50년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가족, 특히 죽은 형의 책임이 가장 크다. 50년 전 일이라 이씨가 가해자 집안에 오게 된 경위, 젊은 시절 상태 등을 명확하게 밝히는 게 쉽지 않다. 형이 주도적으로 데려다 놓고 모른 척 했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형이 몸값을 받고 팔았다는 설도 있는데,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인신매매 자체가 말이 안 되고, 가해자 학대와는 무관하다."

- 이씨가 젊은 시절에는 구제를 요청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게 미스테리다. 의사 진단으로는 정신지체가 있었던 같지는 않다고 나왔다. 약간 어눌하고 순박한 시골 사람이었던 거 같다. 초등학교를 다녔다고 해서 그 학교를 찾아갔는데 초기 졸업장이 불타서 확인하지 못했다.

지금도 멀쩡하다가 어떨 땐 치매증상을 보인다. 학대결과로 추정되긴 하지만 언제부터 그런 증상이 나타났는지 밝혀지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이씨가 가해자 집안에 50년간 머슴으로 있으면서 새경을 한번도 못 받았고, 발견될 때까지 학대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 이씨 교통사고 등을 둘러싼 논란도 있는데.
"여러 설이 있는데 오래 전 일이고, 병원기록도 남아 있지 않고 주장이 서로 엇갈리는 등 사실파악이 어려워 다루지 못했다."

- 일부에서는 '가족책임론'도 제기되고 있다.
"가족에게 분명히 일부 책임이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밝히기 어려운 가족사도 존재한다. 문제의 핵심은 이씨 형인데 얼마 전 숨졌다. 상당한 문제점을 안고 있던 사람으로 본다."

- 마을과 일선기관 등 사회의 무관심도 큰 문제이지 않는가.
"이른바 '거둔다'는 정서가 강했던 것 같다. 주인 말고도 일부 주민들이 '먹여주고 재워주고' 라고 말하는 걸 수십 번 들었다. '저런 사람은 이 정도 하면 된다'는 인습이랄까? 관계기관 담당자들이 그런 문제점을 체크해줘야 하는데, 우리 사회의 복지시스템 자체가 매우 열악하다.

이번 면사무소 담당자도 이씨 존재를 파악하지 못한 게 아니다. 다만 '주인' 홍씨를 노인학대 가해자로 보지 못했다. 이씨에게 문제가 있으며 '주인' 집에 애착을 갖고 있다고 봤다. 그러나 생활 수급비 문제 등을 파악하지 못한 책임은 분명히 있다. '주인' 홍씨가 데리고 와서 수급비 신청을 했는데도 말이다."

- 유사 제보가 잇따르고 있다고 하던데.
"한번 방송되면 400~500건이 오는데 이번엔 1천건 정도 몰렸다. 특히 '우리 마을에도 이런 분이 있다'는 유사 제보가 많이 들어오고 있다. 어디 의지하기조차 힘든 사례가 많다는 것이다. 취재하다 보면 정말 손을 쓸 수도 없고, 법의 사각지대에 있는 곳이 많다."

- 말미에 가해자가 반성하는 모습이 보이던데.
"8일 가해자를 수사하고 있는 경찰서를 다녀왔는데 반성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본인의 인식 부족으로 이런 일이 빚어졌다고…."

- 어두운 주제를 다루다 보면 세상이 절망스럽지 않은가.
"농담으로 '우리도 상담 받자, 너무 우울하다'는 말을 자주 한다(웃음). 망상환자가 아이들을 가두고 학교에 보내지 않는 사안을 취재할 때 그 분을 설득하는 과정이 있었다. 장단을 맞춰주면서 1시간 설득했는데 그럴 때 진짜 머리가 도는 것 같다(웃음)."

- 그럴 때 어떻게 극복하는가.
"술을 많이 마신다(웃음)."

- 솔루션 프로그램이지만 후속관리까지 하는데 한계가 있지 않나.
"사회복지사 출신의 사후팀장이 있다. 계속 체크하고 상담하고 후속활동을 한다. 최선을 다하지만 방송에 한계는 있다. 중요한 것은 사회의 인식이다. 주위에서 조그만 막아주고 개입해주면 우리에게 제보 오지 않는다."

- 가장 큰 보람은.
"사회인식이 바뀔 때다. 데이트폭력을 다룬 적이 있는데 방송 뒤 '정말 나도 그랬다' 등의 반응이 오고 그런 문제점을 사람들이 알게 되면 기분이 좋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민주언론운동협의회(현 민언련) 사무차장, 미디어오늘 차장, 오마이뉴스 사회부장 역임. 참여정부 청와대 홍보수석실 행정관을 거쳐 현재 노무현재단 홍보출판부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