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주’라는 이름만 놓고 본다면 그는 이미 성공했을 야구 선수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올해로 프로 14년째인 이재주는 야구계에서 그닥 재주 좋은 선수는 아니었다.

 기아 타이거즈 이재주
ⓒ 기아 타이거즈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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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태평양 돌핀스에 정민태와 같이 입단했지만 이재주를 기억하는 태평양팬은 아무도 없었다. 이후 현대 유니콘스와 기아 타이거즈를 거쳤지만 역시 팬들에게 이재주는 100년 전에 태어난 물리학자의 얼굴처럼 생경하기만 한 것이었다.

게다가 활약상도 눈에 띄지 않았다. 14년간의 선수생활 동안 그는 단 한번도 규정 타석을 채운 적이 없었다. 그가 14년 동안 기록한 통산 296안타와 48홈런은 팀 동료 이종범이 단 2년만에 기록한 수치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게다가 도대체 정식 포지션이 무엇인지 그를 지도하는 코치들도 정의 내리기 힘든 눈치였다. 그는 당초 유망한 포수를 꿈꿨지만 그를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은 그저 대타 이재주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을 뿐이었고, 어쩐지 그에게 글러브는 어울리지 않는 액서서리처럼 보일 뿐이었다.

한국 프로야구 대타 홈런왕 이재주

물론 이재주를 기억하는 사람이 늘긴 했다. 몇 년전부터 그는 전문 대타요원으로 이름을 알렸고 스포츠 신문을 의지하지 않고서도 웬만큼 선수 이름을 분간할 줄 아는 팬들이라면 이재주가 한국 프로야구 사상 가장 많은 대타 홈런(17개)을 기록 중임을 알 수 있게 됐다.

비록 대타였지만 이재주 본인에게는 팬들에게 강한 어필을 한 셈인데 그의 대타 홈런은 야구 역사 140여년의 미국 메이저리그와 70여년의 일본 프로야구에 견줘도 손색이 없는 기록이다.1)

게다가 2005년 시즌에는 한 시즌 대타 홈런 기록인 5개를 쳤는데 이는 대타 전문요원이 정착된 메이저리그(데이브 한센) 와 일본 프로야구(오시마 야스노리)에서 각각 기록한 7개와 단 2개차였다.

특히 개인 통산 대타 홈런 세계기록 보유자인 일본의 다카이 야스히로에 비유될 정도로 실속 있는 홈런이 많았고 그러한 까닭에 기아가 뒤지고 있는 상황에선 어김없이 팬들은 이재주의 이름을 연호하기까지 했다.

기아 타이거즈 4번 타자 이재주

올해 기아의 4번 타자는 이재주다. 몇년간 기아를 외면했던 팬들이라면 고개를 갸웃거릴 일이지만 실제로 지난 8일 기아의 개막전 이후 7경기 가운데 6경기에서 그는 4번 타자로 출장했다. 개막전에서만 6번을 쳤을 뿐이다.

그러니까 기아 타선의 핵심 요원이 된 것인데 16일까지의 성적은 타율 .357, 2타점,2 출루율 .400, 10안타로 그리 나빠 보이지 않는다.지난해 79경기에 출전해 31안타를 기록한 바 있는 이재주가 시즌 개막 7경기만에 지난해 1/3에 해당하는 10안타를 기록했으니 출발치고는 괜찮은 편이다.

참고로 현재 기아에서 이재주의 타율과 출루율을 능가하는 선수는 ‘시라소니’ 이용규뿐이다.(타율 .500, 출루율 .545, 10안타,4타점)

사실 야구 전문가들은 시즌 전부터 이재주의 4번 투입을 예상했다. 기아의 미국 플로리다 스프링 캠프 때나 태국 마무리 캠프에서 이재주는 몸쪽 공과 변화구에 약한 자신의 단점을 극복하고자 혼신의 힘을 다했고, 코칭스태프도 변화하는 이재주에 흡족함을 느꼈다.

이는 시범경기 동안 홈런 4개(1위), 타점 10개 (3위), 장타율 .595 (3위) 라는 놀라운 성적으로 나타났고 누가 기아의 4번 타자로 적합한 지에 관한 의문표에 마침표를 찍게 됐다.

기아에 마땅한 4번 타자감이 없는 것도 이재주에겐 행운이라면 행운이다. 지난해까지 4번을 맡던 마해영은 LG 트윈스로 이적했고, 심재학은 스윙 궤적만 4번 타자였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장성호가 3번이 아닌 4번을 맡을 수도 없는 일이고 마이크 서브넥은 시범경기에는 좋은 타격을 보였지만 5번 타자로 적합한 선수다.

그나마 유격수 홍세완이 경쟁자였지만(실제로 홍세완은 시즌 개막전에서 4번 타자로 나왔다) 그가 개막전에서 좋은 타격내용을 보여줬다고 해도 4번 타자 자리를 유지하기는 힘들었을 전망이다.

홍세완의 몸에서 오른쪽은 팔이며 다리가 성치 않다. 게다가 그는 팀 사정상 유격수를 도맡아야 하는 처지라 4번 타자는 부담을 가중시키는 일이다.

결론은 간단했다. 이재주가 기아의 4번 타자를 맡아야 한다는 것. 그러니까 이재주의 4번 타자 입성은 어쩌다 주소가 잘못 적혀져 배달 온 행운의 선물이 아니라 이재주 본인의 노력과 팀 사정이 어울러져 빚어낸 예약된 선물이었다.

그렇다고 이재주의 4번 타자가 낙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시즌 내내 4번 타자를 맡으리라는 보장도 없을 뿐더러, 지금 이재주는 능숙하게 숙제를 해결한 우등생 같지도 않아 보인다.

우선 합격점을 주기에는 시즌 초반인데다 그가 상대한 팀이 고작 세팀(한화, 두산, 현대)에 지나지 않는다. 현재 1,2위를 달리고 있는 상위 3팀(SK, 삼성, 롯데)과는 한 경기도 하지 않은 상황이다.

거기다 이재주의 스윙이 개선됐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스윙 궤적이 크고 배트로 대나무를 가르려는 듯 부자연스러운 측면도 보인다. 여전히 변화구에는 취약하고 타점도 2점에 그치고 있다.

아직 그가 대타 전문일 때 보여준 화려한 적시타 능력은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물론 이재주만의 잘못이 아니다)

불안한 기아, 투타 부조화가 특히 심해

17일 현재 기아는 최하위다. 물론 시즌 초반인데다 7경기 중 5경기가 원정이었던 탓으로 지금의 순위는 큰 의미가 없다. 그러나 자칫 기아에게 현재 순위는 시즌 내내 붙박이장처럼 고정 될 수도 있는데 이는 투,타 불균형에서 비롯한다.

기아 투수진은 아마도 지난해보다 더 좋은 성과를 보여줄 것이고 주력 투수의 부상만 없다면 1997년 이후 가장 탄탄한 마운드를 선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무등산 호랑이’ 김진우는 4년전 그가 왜 '제2의 선동열'이라는 평가를 받았는가 확실히 보여줄 것으로 기대되고, ‘수줍은 거물 신인’ 한기주는 마운드에 올라서면 설수록 더 좋은 투구내용이 가능하리라 전망한다.

강철민도 더 이상 나빠질 것으로 보이진 않으며 외국인 선수 세스 그레이싱어도 서둘러 짐을 꾸릴 일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우려되는 부분이 있다면 역대 LG에서 기아로 이적한 선수 가운데 성공한 선수가 없다는 것.

따라서 마무리 투수 장문석의 활약상을 예상하기 힘들다는 것 정도인데 지난해에 비한다면 차라리 담담한 걱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타선은 거대한 석회암 동굴에 눈을 감고 들어가는 일처럼 암담하기만 하다. 올해 37살의 이종범은 여전히 1번 타자로 뛰며 450타석 이상에 등장해야 할 것이다.

그를 받쳐줄 선수가 없는 상황에서 그는 여전히 도루 20개 이상을 성공하려 들 것이고 부상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그는 많은 열정을 소비했고, 현재 상당히 피로한 기색이다.

손지환은 여전히 대안 없는 기아에선 필요한 선수일 것이고(단지 그것 뿐이다), 장성호는 그의 FA 선배들이 보여줬던 '만사 귀찮음'과 자신이 계획한 FA 성공 이야기 사이에서 적잖이 방황할 것이다.

앞서 언급했던 홍세완은 건강한 왼쪽에 비해 불행한 오른쪽 탓으로 2003년, 2004년과 같은 기분 좋은 시즌은 당분간 경험하기 힘들 것이다.

심재학은 여전히 크고 강한 스윙이 반드시 안타와 홈런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신념을 기록으로 증명해 줄 것이고, 신동주는 그를 응원하는 팬과 서정환 감독의 지원하에서도 예전의 경기력을 되찾지 못할 것이다.

여기다 김상훈은 어린 투수진을 감당하기에도 벅찬 듯 하다.

이 암담한 타선에서 그마나 희망의 씨앗을 찾는다면 이용규와 이재주, 그리고 서정환 감독의 서브넥을 향한 인내심 정도라 할 수 있다.

기아 '루키' 4번 이재주, 꿈은 포기하지 않는 자에게만 찾아온다

올해가 이재주에게는 마지막 기회가 될 전망이다. 만약 이재주가 지금 잡은 찬스를 놓친다면 그는 다시 대타로 밀려날 것이고, 그러다 조용히 은퇴할 것이다.

1997년 이후 번번히 우승컵 주변에서 맴돈 소속팀 기아는 더 이상 이재주를 테스트하지 않을 것이고, 올해도 하위권에서 헤맨다면 어떤 수를 써서라도 타자를 데려 올테니까 말이다.

현재 이재주는 긴 머리와 날카롭게 기른 콧수염으로 언뜻 보아 '무사'처럼 보인다. 그를 가리켜 일본 프로야구 니혼햄 파이터스에서 뛰고 있는 '오가사와라 미치히로'와 닮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어쨌든 그는 좀 더 강인한 인상을 풍기고 있으며 상대 투수들의 눈에도 결코 호락호락한 타자로 비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35살의 나이로 메이저리그 사상 최고령 신인 선수로 등장했던 고등학교 화학교사이자 투수였던 짐 모리스는 이렇게 말했다.

"꿈은 포기하지 않는 자에게만 찾아오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주전을 궤차는데 14년이 걸렸다. 게다가 명문 기아에서 4번 타자까지 올랐으니 이재주로서는 꿈을 이뤘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재주는 여기서 멈추지 않을 생각일 것이다.

이재주는 기아를 거쳐간 숱한 4번 타자들처럼 그 자신이 중심이 돼 팀에게 우승을 선물하려 한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이재주가 꿈꾸던 최고의 선물이 아닐까 싶다.

그러한 이유로 아직 이재주는 마지막 선물꾸러미를 풀지 않고 있다.

덧붙이는 글 *개인 통산 대타 홈런 기록

미국 프로야구 - 클리프 존슨(1972~1986) - 20개
일본 프로야구 - 다카이 야스히로(1964~82년) - 27개
한국 프로야구 - 이재주 (1992~ ) - 17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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