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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마을 사람들은 우리 할머니를 '반 스님'이라고 했다. 할머니는 이모 할머니가 주지로 계신 절에 자주 가셨고 집에서도 반은 스님처럼 사셨다. 할머니는 당신의 세계관을 나에게 아주 실감나게 전하신 적이 있다.

아주 어릴 적, 내가 생각 없이 마루에 올라온 개미 한 마리를 죽인 적이 있다. 귀찮게 얼쩡거리는 개미를 파리채를 들어 후려친 것이다. 개미의 내장이 터져 튀었고 몸은 납작해져 꺼름칙했다. 얼른 후회가 들었다.

"이 노옴!"

갑자기 할머니가 무서운 표정으로 나를 쏘아 보셨다. 나는 겁이 나 "으앙"하고 울어버렸다. 당황한 할머니는 얼른 노기를 지우고 나를 무릎에 뉘여 다독이며 달랬다.

"우리 애기 착한 애기 귀하디 귀한 손주, 우리 애기 이쁜 애기 금자동이 은자동이, 샛별같이 예쁜 눈에 조랑조랑 맺혔구나, 해애기씨 별애기씨 석이보다 예쁠소냐, 조왕부인 시기마라 터주부인 시기마라."

한결 마음이 편안해져 울먹임이 잦아들 무렵 할머니의 타령에 다음과 같은 사설이 이어졌다.

"윤회업보 타고난 게 세상천지 생명이라. 개미를 죽이면 죽인 사람이 꼭 한 번 개미로 태어나 똑같이 당하는 법이니라."

나는 상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젠가 한번 개미로 태어나 아까처럼 죽을 생각을 하니 가히 어린 아이가 감당하기 힘든 공포였다. 다시금 요란하게 울어야만 했다.

할머니는 살생을 하지 않았다. 종종 파리채를 들기는 했지만 그저 휘휘 저어 쫓기만 하실 뿐이었다. 육식도 하지 않으셨다. 가족들에게까지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개고기만큼은 절대 금했다. 언젠가 누렁이를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개는 사람으로 환생하기 직전의 축생이라, 개고기를 먹는 것은 반은 사람고기를 먹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아버지는 결혼 전에 결핵을 앓아 죽을 뻔 했는데 개고기를 먹고 살아났다고 했다. 때문에 개고기는 아버지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어디서 개 잡는다는 소리가 들리는 날엔 갈비짝을 몰래 들여와 숨겨두었다가, 할머니가 잠든 한밤중에 부엌 바닥에서 소리 죽여 가며 일을 벌이곤 했다. 나도 고기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났다.

한번은 개갈비를 뜯다가 드르륵 부엌문이 열리는 기척에 뒤돌아보니 할머니였다. 개 갈비를 통째로 물고 있던 나와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다음날 아침 일찍, 할머니는 굽실대며 용서를 비는 어머니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보따리를 들고 집을 나섰다. 그렇게 절에 가신 할머니는 한동안 집에 오지 않았다.

바로 그해 여름에 있었던 일이다. 장마가 지고 물이 잦아들 즈음, 나와 사촌은 마을 앞 실개천으로 고기잡이를 하러 갔다. 이 때가 고기잡이 적기다. 불어난 물을 타고 올라온 큰 고기들이 수초 사이에 숨어 있었고, 흙탕물이 시야를 가려 어망과 발길질로도 쉽게 고기를 잡을 수 있었다.

어망을 대고 수초에 발길질을 하는데 물컹한 무엇이 미끈 밟혔다. 순간, 시커멓고 커다란 무언가가 펑 소리를 내며 뛰어올랐고, 나는 어마지두(무섭고 놀라워서 정신이 얼떨떨한 판:편집자 주)에 뒤로 나자빠졌다.

"가물치다! 이따만 해!"

어마어마한 대어였다. 허벅지까지 차는 물이었는데도, 녀석이 나아감에 따라 물결이 갈라지고 있었다. 우리는 가물치를 쫓아 이리저리 날뛰었다. 가물치가 숨어든 곳에 발길질을 하면 녀석은 다시 뛰어올라 달아나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한 시간, 얕은 물로 몰린 가물치가 쫓기며 나를 향해 곧장 다가들었다. 퉁 하는 손 감각과 동시에 어망을 번쩍 치켜 올렸다. 어망 가득 담긴 흉측한 무늬의 거물이었다. 어망을 끌다시피 하여 모래톱으로 집어던졌다. 물로 돌아가려고 펄떡펄떡 뛰는 것을 발길질을 해대며 가로막았다. 곧 숨을 못 쉰 녀석이 잦아들며 아가미를 헐떡거렸다. 그때까지 경험한 내 인생 최대 쾌거였다.

우물가의 커다란 함지에서 녀석은 몸을 똑바로 펴지 못했다. 길이는 내 팔보다 한 뼘이나 더 컸고, 숙부가 들어보고는 관반이 넘을 것이라 했다. 동네 어른들도 이만한 대어는 보지 못했노라, 족히 30년은 묵은 것이라 했다. 장마에 용암 저수지가 넘쳤을 때 넘어온 것이라고도 했다. 그토록 희귀한 녀석이 실개천으로 올라와 어린 아이의 손에 잡힌 것은 기연이었다.

다음 날, 가마솥에 장작불을 지피고, 닭을 두 마리 잡아넣고, 밤, 대추, 황기를 넣고 푹 고아 큰 집 작은 집 대가족이 한 끼니를 넉넉히 포식했다. 가물치의 내장과 껍질은 튀겨져 어른들의 술안주가 되었다. 내가 잡은 가물치의 뽀얀 살점이 식구들의 입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있노라니, 자식들 입에 먹성 들어가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배부르다는 의미가 대충 이해될 만했다. 누렁이도 한동안 제 머리만한 가물치 해골을 물고 다녔다. 그렇게 훌륭했던 한여름의 보양식은 할머니가 집에 없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할머니가 절에서 돌아오는 날, 엄마는 내게 가물치 잡아먹은 일을 함구하라 일렀다. 하지만 그만한 철이 없던 나는 자랑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다. 먼 길 오느라 다리쉼을 하는 할머니 앞에서 나는 실제보다 한 뼘쯤 크게 팔을 벌려 보였다.

"할무니, 내가 가물치 이따만한 거 잡았다."

할머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래서? ....어뜩했어?"
"잡아 묵었지. 흐흐."

할머니의 안색이 싸늘해졌다. 할머니는 노기 어린 무표정으로 일어나 엄마와 숙모가 있는 부엌으로 갔다.

"이 미욱한(하는 짓이나 됨됨이가 어리석고 미련하다:편집자 주) 것들아!, 아귀계에 가려거든 너희들이나 가지 왜 애들에게 업보를 씌우느냐?"

할머니가 그토록 화를 내는 것은 처음이었다. 할머니는 그 가물치가 영물이라고 했다. 물고기가 수십 년 묵으면 허공을 떠돌던 혼령이 얹혀 영물이 된다고 했다. 영물을 잡으면 마땅히 방생해야 하며, 함부로 죽이면 보복을 당한다고 했다. 그 말에 섬뜩한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 날 밤, 누렁이가 물고 다니다 울타리 밑에 버려둔 가물치의 해골 앞에서 나와 사촌은 할머니의 지시대로 연신 절을 올렸다. 두려움에 경건해진 마음으로, 복수는 말아달라며 진심으로 용서를 빌었다.

그런데 가물치가 순순히 용서하지 않았는지, 그해 여름은 재수 없는 일의 연속이었다. 다시 고기잡이의 적기가 찾아왔을 때, 나와 사촌은 또 고기 잡으러 갔다. 사촌은 낫을 들고 나섰다. 내가 텀벙거리며 고기를 잡는 동안, 사촌은 낫으로 흙탕물을 휘휘 가르고 있었다. 제 딴에는 고기들이 지나다 낫에 걸려들 줄 아는 모양이다. 물살을 가르는 낫이 휘뚝거리는 게 위험해 보였다.

한순간, "아야!"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사촌은 "에이! 벴네"하며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기에 낫에 살짝 벤 정도로 알았다. 그런데 얕은 물로 나와 보니 사촌의 정강이 살이 흉측하게 쩍 벌어져 있었다. 놀란 사촌은 요란한 울음을 터트리며 제 집을 향해 마구 뛰었다.

다행히 큰 상처는 아니었다. 살갗이 팽팽한 정강이라 쩍 벌어져 크게 보였을 뿐, 곧 딱지가 달라붙었다. 사촌의 상처에서 딱지가 떨어질 무렵 나는 아이들과 개천으로 멱을 감으러 갔다. 우선 더운 몸을 식히려고 바위에서 곧장 물로 풍덩 뛰어들었다.

"아-얏!"

발바닥이 뜨끔했다. 들어보니 깨진 소주병이 발바닥에 깊숙이 박혀 있었다. 요란한 울음을 터트리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군가 바위에서 소주를 먹고 병을 깨뜨려 넣은 게 분명했다. 울다 말고 할 수 있는 최고의 욕을 퍼부었다.

그 때문에 금쪽같은 여름방학을 하릴없이 허비하고 있었다. 더위가 한풀 꺾이면 아이들이 공터로 몰려나와 왁자지껄 떠들고 놀며 히히거렸다. 마음껏 놀지 못하는 게 제일 원통했다. 그나마 낮에는 까치발을 하고라도 움직일 수 있었는데, 해질녘만 되면 눈물이 날 만큼 상처가 욱신거렸다. 할머니에게 울며 고통을 호소했다.

"할무니... 아퍼... ."

대꾸없이 염불을 외던 할머니가 한순간 깨달은 듯 말씀하셨다.

"가물치가 복수를 하는 게다."

다음 날 할머니는 부엌과 우물에서 마른 고추를 태워 연기를 피우느라 연신 기침을 하며 눈물을 쏟았다. 원혼제를 지내기 전에 살육의 현장에 달라붙은 잡귀들을 내쫓는 것이라 했다.

그날 밤, 부엌에는 향이 오르고, 나와 사촌은 가물치를 삶았던 가마솥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할머니는 천염을 굴리며 염불을 한 후 눈물 어린 사설을 이었다.

"아이고 불쌍타. 어이고 딱해라. 펄펄 끓는 물에 데어 죽었으니 얼마나 아팠을까. 펄펄 끓은 기름에 튀겨 죽었으니 얼마나 뜨거웠을까. 원도 많고 한도 많겠소. 어린 것들이 몰라 큰 죄를 지었으니 부디 자비를 베푸소. 부디 넒은 아량으로 용서해주소. 용서할 수 없거들랑 이 할미에게 벌을 주소. 이 할미가 잘못 가르친 죄요. 이 할미에게 벌을 주소."

묘한 분위기에 감싸여 사촌과 나는 엉엉 울었다. 가물치의 해골을 고이 묻은 싸리나무 아래서 다시 절을 올렸다. 할머니는 가물치의 영혼을 실은 닥종이를 손 위에서 태웠다.

"원을 풀고 한을 풀고 그만 저 세상으로 가시오. 부디 축생의 윤회를 벗고 사람으로 태어나시오."

가물치의 영혼을 실은 재가 하늘로 올라갔다. 밤하늘 가득 별이 총총 빛났다. 그날따라 유난히 선명한 은하수가 신비하게 펼쳐졌다.

덧붙이는 글 | 전기도 TV도 없었던 어린 시절의 추억담이다. 불교, 샤먼, 토템... 설화의 세계가 지배했던 그 시절이 더욱 아름답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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