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의 제왕>의 영화 제작 소식이 최초로 전파를 탔을 때, 톨킨의 원작을 읽어본 적이 있는 이들은 헛된 망상이라고 코웃음을 날렸다. 어찌 어찌해서 영화화에 성공하더라도, 그것은 데이빗린치의 <사구 (듄)>처럼 만신창이 범작의 운명을 타고 날 가능성이 농후해 보였다. 누군가 물었다. "그래, <반지의 제왕> 을 영화화 할 그 얼간이가 누구야?"

 피터잭슨
ⓒ 허지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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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 원정대가 산을 넘고, 간달프가 언덕에서 빛의 군사를 이끌고 나타났을 때, 그리고 결국 그 모든 마지막 신화의 주인공들이 중간 대륙과 이별을 고하고 요정들의 땅으로 사라져갔을 때, 세상은 그 '얼간이'를 향해 공손히 정좌했다. 그 시작부터 심히 창대하여 전 세계의 B급 마니아들을 열광시켰고, 호러 영화사에 있어서 깊은 족적을 남겼던 피터잭슨은 그렇게 해서 주류 영화감독으로 우뚝 섰다.

<호러 영화 산책>에서는 '피터잭슨 특집'을 마련하여, 그의 놀라운 영화들을 두루 섭렵해보기로 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 <데드 얼라이브>(92')를 만나본다. 한때 시네필(영화팬)들의 필수 시청 목록에 빠지지 않았으며, B자 테이프 판매자들에게는 불멸의 베스트셀러였던 <데드 얼라이브>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미 친숙한 영화이다.

라이오넬(티모시 발므)은 한없이 부드럽고 따뜻한 남자이다. 문제는 그가 대책 없는 마마보이라는 점이고, 더 큰 문제는 그런 아들을 착취하는 어머니(엘리자베스 무디)이다. 동물원에서 수마트라 원숭이에게 물린 이후로 어머니는 점차 좀비로 변해가기 시작하고, 라이오넬은 그런 어머니를 필사적으로 돌본다. 결국 좀비가 된 어머니에 의해 좀비들의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여기에 유산을 노리는 악마 같은 삼촌(이안 왓킨)과 라이오넬의 연인 파퀴타(다이애나 페넬버)가 가세하여 사태는 눈덩이처럼 커져 가는데….

 <데드얼라이브>의 포스터
ⓒ 피터잭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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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플래터 영화의 신기원을 이룩했다고 평가받으면서 피터잭슨이라는 감독의 이름을 전 세계에 알렸던 그의 통산 3번째 장편 영화 <데드 얼라이브>는 내부적으로 독특한 해석을 가능케 하는 내러티브 구조와 정신 분석의 탁월함이 돋보이는 작품이었으나, 대부분의 호러 영화들이 그러하듯이 '피투성이 효과'만 주목받은 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 갔다.
(*스플래터 영화: 막대한 물리적 분량의 피범벅 효과로 인해 '극적으로 강화된 고어'에서 비롯되는 '만화적인 과도한 폭력과 코믹화된 신체훼손'이 등장하는 영화. 최근에 이르러서는 <고어 + 코미디> 라는 한정된 의미로 인식되고 있다.)

실제로 대부분의 연출자들이 혀를 내둘렀다고 하는 이 작품의 고어 효과는 실로 엄청난 규모였다. 대부분의 작품들은 예산상의 문제가 아니라 내용의 전개에 있어서 전혀 불필요하기 때문에, 이러한 대규모의 피범벅 스펙터클은 시도하지 않는다.

그러나 피터잭슨은 아예 작정을 하고 이 기괴한 B 무비에 무려 3000 리터의 가짜 피를 쏟아 부었다. 덕분에 관객은 프레임을 뚫고 나올 것만 같은 피의 향연을 목격하게 되지만, 가슴뼈가 드러날 정도로 살을 파내거나, 잔디 깎는 기계로 좀비들을 갈아내는 등의 장면들은 대부분 (놀랍게도) 불쾌함을 유발하지 않는다.

'극적으로 강화된 고어(=피범벅) 효과'는 이미 리얼리즘을 포기하고 상상력의 한계를 시험하는 목적으로 진행되며, 관객들은 이 만화적인 표현들 앞에서 기괴한 웃음을 털어놓는다. 여기에 버스터 키튼을 연상시키는 티모시 발므의 탁월한 슬랩스틱 연기는 <이블데드>의 '애쉬'를 연상시키면서 두 작품 간의 긴밀한 공통분모를 생성한다.

실제로 두 작품(<데드 얼라이브>와 <이블데드2>)은 가장 성공적인 스플래터 작품임에 틀림없다. 답보 상태에 빠져 있던 고어 영화에 있어서 방법론적 이정표를 제시한 <데드 얼라이브>는 특유의 유머성향과 그로 인한 '거리두기'로 긴장과 이완의 미묘한 타협지점을 찾으면서 공공연하게 배출의 감정을 부여하고 있다.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인 웃음의 미덕은 스플래터에 대한 오해를 빚어내기도 했는데, '스플래터 = 고어 + 코미디'라는 다소 엉뚱한 공식이 바로 그것이다. 앞서 설명했듯이, 스플래터는 '극적으로 강조된 고어 효과'이며, 여기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비현실적인 신체 훼손'이 유머를 발생시키더라도 그것이 곧 스플래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오해는 <데드 얼라이브> 이후로 하나의 일반적 견해로 굳어졌으며, 지금은 '스플래터'라는 용어를 정의하는 가장 유력한 방법으로 사용되고 있다.

 관객은 프레임을 뚫고 나올 것만 같은 피의 향연을 목격하게 되지만, 가슴뼈가 드러날 정도로 살을 파내거나, 잔디 깍는 기계로 좀비들을 갈아내는 등의 장면들은 대부분 (놀랍게도) 불쾌함을 유발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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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이 작품 이후로 실질적인 스플래터 성향의 고어 영화가 사라졌다고 생각하지만, 트로마의 영화들과 소수의 할리우드 작품들(아이들 핸즈), 그리고 <언데드> 같은 영화들이 여전히 제작되고 있다. <데드 얼라이브>의 표현력은 상상력의 한계를 가뿐히 초월하면서 기존 호러 영화의 모든 일반적 관습과 전통을 무시하고 마치 새로운 문법이라도 된 양 자유롭게 펼쳐진다.

사실 이 작품의 기괴한 웃음은 재키 콩 감독의 87년도 작품 <블러드 디너> 의 영향을 받은 것이 명백하다. 허셀 고든 루이스의 <피의 향연>을 절묘하게 패러디한 <블러드 디너>는 <데드 얼라이브> 이외에도 무수히 많은 작품들에 절묘한 상상력을 제공했지만 아직까지도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괴작이다.

조지 A. 로메로의 전매특허였던 '기존 가치의 전복'이라는 70년대 좀비물 특유의 뉘앙스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이 작품은, 할리우드의 '가족중심적 가치'를 정면으로 부정하면서 모든 갈등의 중심에 '어머니'를 위치시키고 내러티브를 구성한다. 이 작품에서 모든 갈등의 주체는 어머니이며, 이 불완전한 공동체는 일종의 주종관계로 설정되어 있다.

주인공은 이 불합리한 관계 속에서 인생을 허비하고 있고, 개선을 위한 어떠한 노력도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어머니의 지배하에 있는 주인공이 일종의 '성장에 실패한 어른'이며, 앞으로의 과정이 성장을 위한 여행일 것임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결국 부정적 이미지의 극대화된 형상인 '변형된 형태(거대괴물)'의 어머니를 살해하는 과정(주인공은 어머니의 뱃속을 찢고 나오면서 노골적으로 성숙을 촉구한다)과 그로 인한 모든 갈등의 해소는 '어른이 된 아이'라는 테제의 또 다른 '피터 잭슨식' 변주인 동시에,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기묘한 극복 혹은 재구축이다.

 조지 A. 로메로의 전매특허였던 '기존 가치의 전복' 이라는 70년대 좀비물 특유의 뉘앙스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이 작품은, 할리우드의 '가족중심적 가치' 을 정면으로 부정하면서 모든 갈등의 중심에 '어머니' 를 위치시키고 내러티브를 구성한다.
ⓒ 피터잭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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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를 사랑했으나 그녀의 악마적 본색을 거부하고 살해하는 주인공은, 콤플렉스의 의식화가 인격의 성숙을 마련한다는 신화적 교훈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가족의 해체는 필연적으로 공포를 수반하게 되지만, 피터잭슨은 이 혈육살해의 끝에 가장 행복한 주인공들의 모습을 배치하면서 기존의 관습과 결별한다.

피터잭슨은 고전적 가족주의에 대한 명백한 적개심을 표현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성장'에 대한 집요한 관심을 멈추지 않는다. 후속작인 <천상의 피조물들>에 이르면 이러한 감독의 관심은 좀더 진지하고 깊이 있게 진행되는데, 소녀들의 섬세한 감성을 탁월한 영상 감각으로 표현한 이 환상적인 작품에서 서로를 사랑했던 두 소녀는 자신들의 사랑을 완성하고 어른이 되기 위한 방법으로 어머니를 돌로 쳐죽이는 선택을 한다.

<데드 얼라이브>의 성공으로 인해 피터 잭슨은 할리우드로 입성하게 되고 결국 <반지의 제왕>이라는 걸출한 작품을 만들어내면서 새롭게 조명을 받고 있다. 하지만 <데드 얼라이브>라는 작품의 성공에는 피터잭슨 이외에도 주목받지 못한 두 명의 유력한 인물이 존재했으니, 주연을 맡은 티모시 발므와 시나리오/각색을 맡은 스티븐 싱클레어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피터잭슨은 고전적 가족주의에 대한 명백한 적개심을 표현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성장' 에 대한 집요한 관심을 멈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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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원맨쇼에 가까운 연기를 펼치면서 <이블데드>의 브루스 캠벨을 연상시켰던 티모시 발므는, 채플린과 버스터 키튼을 벤치마킹한 것이 틀림없는(심지어는 외모까지) 놀라운 슬랩스틱을 선보인다. 이 작품이 온전히 코미디적 성향 때문에 주목받은 것이라면, 혹은 공포와 웃음 사이의 절묘한 호흡 덕분이었다면 그것은 모두 티모시 발므의 공덕이다.

또한 주목할 만한 인물인 스티븐 싱클레어는 이 작품의 시나리오와 각색을 담당했으며, 피터잭슨의 전작 <피블스를 만나요> 또한 그의 작품이다. 히치콕의 <사이코> 플롯을 기본으로 하여 로메로의 <좀비 3부작>과 후퍼의 <텍사스 전기톱 살인마>의 이미지를 덮어씌우고, 여기에 성장 드라마의 포맷을 적용시킨 절묘한 감각은 싱클레어가 작성한 문자의 힘이다. 싱클레어는 잭슨과의 인연을 지속하여 훗날 <반지의 제왕 - 두개의 탑>의 공동 각색을 담당하기도 한다.

이미 발표된 대로 피터잭슨의 다음 프로젝트는 할리우드의 괴수물 <킹콩>의 리메이크이다. 이제는 명실상부한 블록버스터 감독임에도 불구하고 호러/ B 무비에 대한 관심을 버리지 않는 모습은 가히 믿음직스럽다. 그의 재능이 할리우드의 막대한 자본에 의해 상쇄되지 않고, 오히려 빛을 발하기를 우리 모두는 기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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