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도 여느 아침과 마찬가지였다. 침대를 정리하고, 샤워를 하고, 아침 식사를 하고.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이 익숙한 행동들은 나에게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준다. 하지만 평온은 오래 가지 못했다. 내 주위의 모든 익숙한 사람들이 다른 무엇인가로 변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신체 강탈자들의 침입> 의 포스터
ⓒ 필립카우프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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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들의 겉모습과 목소리, 나를 대하는 행동과 표정들 따위는 모두 그대로이다. 하지만 난 알 수 있다. 이 낯선 존재들은 내가 알고 있는 그 사람들이 아니다. 이들은 전염병처럼 급속하게 주위 사람들 사이로 퍼져가고 있다. 결국 나 혼자 남을 것이다.

그들은 나를 뒤쫒고 있다. 만약,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그 무엇인가로 이미 변했다면 나 또한 변해야 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내가 '나'라는 사실이 지금 이 상황에서 의미가 있는 것일까?

<신체 강탈자들의 침입(Invasion of the Body Snatchers)>(1978, 이하 강탈자)은 이러한 존재론적 질문에서 출발하는 영화이다.

어느 날 외계에서 날아온 씨앗이 샌프란시스코에 떨어져 순식간에 꽃을 피운다. 꽃에서 나온 열매는 인간들이 수면을 취하는 동안 그들을 복제하고 살해한 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대체하기 시작한다.

공중보건부의 생물학자 엘리자베스(브룩 아담스)는 최근 남편을 비롯한 주위 사람들이 보인 괴이한 행동들과 이 꽃이 연관 있다고 생각하고 동료인 버넬(도널드 셔덜랜드) 에게 알린다. 하지만 버넬은 이러한 엘리자베스의 주장을 믿지 못한다. 결국 시 전체의 사람들이 외계인에 의해 신체를 빼앗기고 그제서야 버넬을 비롯한 일행은 살아남기 위한 도주를 계획한다.

 얼마전 재발간된 잭 피니의 원작 소설
ⓒ 잭 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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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 핀리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강탈자>는 1956년의 돈 시겔, 그리고 1978년의 필립 카우프만, 마지막으로 1993년의 아벨 페라라에 의해 3번에 걸쳐 영화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직접적인 모티브를 얻어 제작한 영화들의 리스트를 뽑는다면 한두 페이지로는 모자랄 것이다. 조니뎁이 주연한 영화 <애스트로넛>(원제: 우주 비행사의 아내), 로버트 로드리게즈 감독의 <패컬티> 같은 경우가 바로 <강탈자>의 토양 위에서 탄생한 작품들에 해당한다.

도대체 <강탈자>의 무엇이 이렇게 끊임없는 인용과 찬사을 낳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강탈자>가 당시 시대상에 따라서 끝없이 변주가 가능한 요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 이것은 매카시즘에 의한 마녀사냥을 비판하기 위해 사용했으며, 이후에는 파시즘에 의한 통제와 획일화에 대한 비판으로, 최근에는 현대가족주의에 대한 비판의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강탈자>의 외계인은 에이즈가 될 수도 있고, 색깔 놀음으로 정치색을 논하는 정치인을 연상할 수도 있다. 또한 마녀사냥을 일삼는 대중의 무의식일 수도 있으며, 갖자기 공포 효과로 대중을 호도하는 황색 저널리즘으로도 의미 확장이 가능하다. <강탈자>에 은연 중에 내재되어 있는 비판의 메타포는 이렇게 당 시대의 가장 민감한 주제에 대한 효과적인 무기로 기능해왔다.

필립 카우프만의 1978년작 <강탈자>는 동제의 3가지 작품들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영화이다. <강탈자>라는 영화 자체를 하나의 특별한 스타일로 승화시켰다는 평을 받아 마땅한 이 영화는 지금 보아도 파격적인 특수 효과와 뛰어난 성격파 배우들의 열연으로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힐 만하다.

 도널드 셔덜랜드와 브룩 아담스의 젊은 시절을 볼 수 있다.
ⓒ 필립카우프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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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주연을 맡은 도널드 셔덜랜드이다. 아들인 키퍼 셔덜랜드와 함께 잘 알려진 이 성격파 배우는 셀 수 없이 많은 영화들에서 악역으로 등장하여 독특한 카리스마를 내뿜던 인물이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이 영화에서 셔덜랜드는 악역이 아닌 선한 의지를 가진 주연으로 열연하고 있다.

그와 함께 등장하는 앳된 모습의 제프 골드브럼은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유약한 모습으로 등장하여 재미를 선사하고 있으며, 그의 아내로 등장하는 베로니카 카트라이트는 끝까지 살아남는 강한 여성의 모습을 보인다. 베로니카 카트라이트가 TV 시리즈 <엑스파일>에서 '페이션트 X'로 등장하여 외계인의 존재를 주장하는 모습을 떠올려 보는 것도 이 작품을 재미있게 감상하는 포인트이다.

가장 흥미로운 점은 1956년 돈 시겔의 <강탈자>에서 주연을 맡았던 케빈 맥카시가 영화 속에서 작은 역할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놀랍게도 돈 시겔 자신 또한 극 중에서 택시 기사로 출연하고 있다. 이것은 원작의 적자임을 주장하는 감독의 위트로 해석될 만하다.

작품에 사용된 특수 효과는 당시의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매끄럽다. CG가 아닌 아날로그 특수 효과의 정점을 보여주는 이 작품의 특수 효과는 초반에 보여지는 우주의 모습부터 외계인의 변태 과정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채롭고 이색적이다. 특히 셔덜랜드가 자신을 복제 중인 외계인을 삽으로 찔러 으깨버리는 장면은 여타의 호러물들에서 보기 힘든 리얼한 고어(=피범벅) 효과를 선사한다.

 <강탈자>에 은연중에 내재되어 있는 비판의 메타포는 당 시대의 가장 민감한 주제에 대한 효과적인 무기로 기능해왔다.
ⓒ 필립카우프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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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면에서 주목해 볼 만한 점은 타인을 복제 중인 외계인은 놔두고 자신의 복제물만을 박살내는 셔덜랜드의 심리이다. 이것은 자신의 유일함과 거기에서 오는 존엄성을 지키려는 인간의 노력을 의미하며, 자아를 보호하고자 하는 인간 본연의 심리가 내포되어 있기도 하다.

이 장면에 강한 인상을 남기려 했던 감독은 이 작품에서 유일하게 상당한 강도의 고어 효과를 사용하는데, 셔덜랜드는 두 번에 걸쳐서 복제물의 얼굴을 짓이기고, 이 장면은 아무런 여과 없이 그대로 관객에게 노출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 작품은 파시즘에 대한 비판으로 설명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신체를 빼앗은 외계인들의 행동을 주목할 수 있다. 이들은 어디에서나 끊임없이 줄을 서고, 무표정하며, 개성을 찾아 볼 수 없다. 또한 도시의 어디에서나 방송을 통한 통제의 언어들이 끊임없이 전달된다.

'이것을 해라, 저것을 해라, 여기에 모여라, 저기에 집합하라'라는 메시지들에 이들은 아무런 반감을 드러내지 않고 일사분란하게 행동한다. 그리고 자신의 의지 없이 통제에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삶이 얼마나 행복하고 기쁨에 충만한 것인지 주인공에게 설명하려 든다.

 인간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지르는 이 잔인한 비명소리는 집단을 거부하고 개인으로서의 삶을 택한 이들에 대한 일종의 고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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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인간을 발견했을 때 보이는 행동은 놀라운 비명 소리이다. 인간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지르는 이 잔인한 비명소리는 집단을 거부하고 개인으로서의 삶을 택한 이들에 대한 일종의 고발이다. 놀랍도록 소름끼치는 이 장면은 감독의 의도 이상으로 관객에게 강한 충격을 주고 안겨주었으며, 1993년 아벨 페라라의 작품에서도 그대로 인용되고 있다.

<강탈자>는 외계인으로 표현되는 파시즘의 망령을 통해 이들의 통제가 얼마나 무섭고 빠르게 전염되는가를 보여주고 있으며, 이미 자신 이외에 모든 사람들이 외계인이 되었을 때(집단의 노예가 되었을 때) 자신의 고유함을 끝까지 지키려는 행동이 얼마나 가치있고 소중한 것인지 역설한다.

필립 카우프만의 <강탈자>는 영화라는 매체가 현실을 비추는 효과적인 거울이며, 또한 대안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설득력 있는 메시지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하겠다.

이 작품은 언뜻 보면 집단의 통제에 의한 삶이 이상적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개인의 의지가 상실된 삶이야말로 가장 비인간적인, 외계인과 다를 바 없는 상태라는 사실을 보여주며 개인의 의지와 존엄성을 수호할 것을 종용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허지웅의 <호러 영화 산책> 첫번째 연재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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