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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황성기 <대한매일> 도쿄특파원이 24일자 이메일 편지글 '도쿄통신'에 쓴 글입니다. 필자의 양해를 얻어 전문과 사진을 소개합니다....<편집자 주>

▲ 도쿄 우에노에 있는 이치란의 지점. 식사시간이 되면 언제나 차례를 기다리는 행렬을 볼 수 있다.
ⓒ 황성기
일본 라면을 드셔보신 적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드셔보셨다면 우리의 라면과는 다른 국물 맛에 대개 고개를 젓습니다. 그리고 한 그릇에 600엔이 넘는 고가에 다시 한번 고개를 젓지요. 경우에 따라서는 1000엔을 웃도는 라면도 있습니다.

살인적인 물가 운운하는 일본이라지만 라면 한 그릇에 1000엔이라면 아무리 천하일품이라도 선뜻 지갑에서 돈을 꺼내기 힘듭니다. 오늘은 너무나 기가 막힌 일본의 한 라면집을 소개할까 합니다.

규슈 지방의 후쿠오카(福岡)를 본거지로 한 이치란(一蘭)은 1960년에 창업, 43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라면집입니다. 이곳은 지금은 누구나 가서 돈만 내면 먹을 수 있지만 한때는 회원만이 라면 맛을 볼 수 있는 독특한 운영으로 화제를 불러모았던 곳입니다.

이 집은 몇 년 전부터 새로운 운영방식을 도입해 다시 입소문을 타고 있습니다. 제가 가본 곳은 후쿠오카의 덴진(天神)지점인데, 일본 전국 12곳에 있는 지점 어느 곳이나 똑같은 시스템입니다.

먼저 가게 앞에 설치된 식권 자판기에서 먹고 싶은 라면의 식권을 삽니다. 제가 갔을 때는 긴 행렬이 늘어서는 식사시간이 아닌 오후 4시30분쯤이라 줄은 서지 않았습니다. 가게의 여닫이 문 앞에서 유니폼을 입은 젊은 여종업원이 손님의 숫자를 파악합니다. 이 가게에서 유일하게 얼굴을 볼 수 있는 종업원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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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처럼 좌석마다 칸막이

이 종업원의 안내로 지정된 자리에 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숨이 막힐 듯한 비좁은 공간으로 들어서니 기다란 카운터에 도서관에나 있을 법한 칸막이로 한 사람분씩의 좌석이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옆 손님의 얼굴을 볼 수 없는 것은 물론 실내조명도 어두침침합니다. 의자에 앉으니 좌석 앞 부분에 어깨 정도까지 커튼이 내려져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보이지 않도록 한 가게의 '배려'입니다.

호출버튼을 눌렀습니다. 종업원이 물을 갖다주지만 내려진 커튼 때문에 종업원의 얼굴은 보이지 않습니다. 귀기울여 소리를 들으니 제 앞에도 저와 똑같은 상황의 손님들이 앉아 있는 듯했지만, 아무리 고개를 움직여봐도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테이블에는 손님들의 기호에 맞춰 라면을 주문하도록 주문표와 연필이 놓여져 있습니다. 주문표에 국물의 농도(묽게, 기본, 진하게), 면발의 상태(덜 삶기, 기본, 많이 삶기), 파와 마늘의 양(없음, 기본, 많음) 등을 체크한 뒤 다시 버튼을 눌러 종업원에게 건넵니다.

3분쯤 흘렀을까요, 제가 주문한 대로 맞춤식 라면이 옵니다.

라면을 나르는 종업원의 손만 보입니다. 맛은 다른 일본 라면과 그리 다르지 않았지만, 라면을 먹는 내내 재미있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이처럼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고 살아가고 있는 일본인들이 애처롭기 짝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제가 앉은 좌석에는 라면집이 붙여놓은 이런 문구가 있었습니다.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드시는데 집중할 수 있도록…"

그렇습니다. 이 라면집의 세일즈 포인트는 앞과 옆, 뒷사람에 신경 쓰지 않고 맛에만 집중한다는 데 있었습니다. 세일즈 포인트를 강조하는데 이러한 파격적이고도 엽기적인 공간배치, 세밀한 주문표 등이 화제를 낳고 그 화제가 사람 입을 통해 소문이 나면서 소문이 다시 손님을 부르는 그런 시스템입니다. 그래서 사람 눈을 특히 의식하는 여성들에게 인기가 있다고 합니다.

여성고객 끌어당기기에 성공

사람 눈을 의식하지 않도록 하는 음식점의 공간배치가 여성고객의 유치에 얼마나 영향을 주는지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240엔짜리 초저가 쇠고기덮밥 체인점으로 일본에서도 유명한 '요시노야(吉野家)'의 경우 좌석을 ㅁ자나 ㄷ자로 배치합니다.

한정된 공간에 최대한의 손님을 앉히기 위한 나름대로의 전략이지만, 밥을 먹으면서 앞 손님과 눈이 마주치는 경우가 있어 "아무리 싸지만 눈길이 마주치는 게 싫어서 절대 가지 않는다"는 일본인도 적지 않습니다.

반면 비슷한 튀김덮밥 체인점인 덴야(てんや)는 일자형 카운터를 고집합니다. 옆 손님을 일부러 쳐다보지 않는 한 다른 손님과 눈이 마주칠 일이 거의 없습니다. 눈이 마주치는 것은 주문을 받는 종업원 정도입니다. 이들 두 가게의 전체 고객 중에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을 볼까요. 요시노야는 30%를 조금 넘는 반면, 덴야는 일자형 카운터의 덕택에 40%나 된다고 합니다.

먼저 소개한 라면집 이치란은 이런 점에서 엽기적인 경영방식이 낳는 풍부한 화제성에 더해, 타인을 의식하지 않는 '나만의 공간에서의 라면 즐기기'를 고집하는 여성고객을 끌어당기기에 성공한 듯 보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치란에서 라면을 먹고 나오면서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음식이란 게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면서 품평도 하고, 다른 손님의 모습도 힐끗힐끗 보면서 음식 외의 맛을 느끼는 것도 쏠쏠한 게 아닌가요?

그렇게 생각하는 저에게 도서관 열람실 같은 좁디좁고 침침한 자리에서 커튼을 마주하고, 얼굴이 보이지 않는 옆자리 손님이 내는 '후르륵, 후르륵' 소리 밖에 느낄 수 없는 '초고독형' 시스템은 도저히 마음이 끌리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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