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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르바이잔의 민주화의 초상, 엘치베이 에불페즈 전대통령이 서거했다.

구 소련의 민족적 구성을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슬라브계통의 기독교 정교회 국가들과 아제르바이잔 등 터어키 계통의 이슬람 국가들이다. 물론 이 두 분류에 속하지 않는 국가들도 있다.

구 소련 15개 국가들 중에서도 가장 반 러시아 감정이 심했던 민족이 아제르바이잔이다. 공교롭게도 인류 사상 최초의 유전을 가지고 그 유전때문에 더 많은 착취의 대상이 되어야 했던, 신의 축복인 검은 보배 석유 때문에 더 불행해진 민족이 바로 아제르바이잔 민족이다.

이념상 동등 시민권과 동등한 법적 권리를 누린다고 하지만, 한반도의 작은 땅에도 지역적 차별이 있는 것처럼, 그 거대한 제 이 세계를 형성하던 소련 땅에서 남부 코카사스인들의 약간은 검은 얼굴들에 대한 북쪽 백색 슬라브인들의 멸시는 우리의 인식을 자연스럽게 한다.

구 소련이 중앙 집권적 권력이 이완되면서 가장 먼저 독립을 선언하고 뛰쳐나온 국가가 바로 아제르바이잔이었다. 물론 이 상황 가운데 직접적인 피흘림의 원인이 되었던 1989년의 아르메니아 인들과의 민족적 분규를 통해 맏형이었던 러시아에 대한 완전한 불신이 1990년 1월20일의 비극을 가져 오게 되었던 것이다.

러시아 군의 폭동진압 군인들의 무차별적 공격으로 대다수의 선령한 민간인 200여명의 목숨을 앗아간 사건이 일어났고, 러시아와 고르바쵸프에 대한 극도의 반감이 팽배한 상태에서 소련 정권의 붕괴는 곧 바로 아제르바이잔의 독립 선언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1991년 9월 독립을 선언한 아제르바이잔은 곧이어 최초의 자유 선거를 통해 당시 대학 교수였던 엘치베이 에불페즈 대통령과 그 정권을 탄생 시키게 된 것이다. 엘치베이 대통령은 당시 팽배한 반러주의와 민족주의의 이상을 가지고, 버터어키권의 단결을 이념으로 하는 범터어키주의자 (Turanist) 가 되어 친터소러 (터어키에 접근하고 러시아를 멀리하는) 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하고자 하여 많은 지식인들 사이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엘치베이 정권의 취약점은 이상은 강하나 현실에 부실했다는 점이다. 정치란 순수함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고 돌이키는 데까지 그에게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3개월 이내에 아르메니와의 영토 분쟁이 있는 나고르노 카라박 지역의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취임 일성을 했지만, 아제르바이잔 자체만의 문제가 아닌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도리어 전선에서 벌어지는 상황은 아제르바이잔에게 불리하게만 돌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아르메니아는 인구 350만에 순 산간지역뿐인 부존자원을 갖지 못한 약한 국가이고, 아제르바이잔은 인구 800만에 석유 가스 등의 풍부한 자원을 가진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아르메니아 군대에 의해 카라박 지역뿐 아닌 인근의 지역까지 해서 영토의 20 퍼센트를 빼앗기고 100만의 난민을 낳고 말았다.

그리고서도 상황은 전혀 유리하게 돌아가지 못하고 매일 신문의 부고란에는 5-10 명의 전사자 소식이 실리고 있었다. 자연히 지지부진한 정치과 실효를 거두지 못하는 정책, 자식을 전장에 보낸 부모들의 이반현상이 뚜렷하던 차에 전쟁터를 지켜야 할 34세의 기갑대장 소령이 정권에 반기를 들고 탱크를 앞세워 수도인 바쿠로 접근하면서 엘치베이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게 된 것이다.

이런 배경에는 러시아의 기획적인 복잡한 권력 다툼이 된 것이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주 에너지 공급처인 유전 국가의 독립으로 타격을 받았을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대립해 있는 아제르바이잔을 곱게 놔둘수 없는 입장이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러시아는 아르메니아에 군사적, 물량적 지원을 통해 아제르바이잔의 엘치베이 정권을 압박하고 또 한편으로는 친러적 성격을 가진 아제르바이잔 세력을 통해서 엘치베이를 축축하는데 성공하게 된 것이다.

이 정권 퇴진의 반란을 수습하고 나선 사람이, 소련 정권의 케이지비의 국장 출신이면서 당시의 국회의장이던 현 대통령인 헤이달 알리에프인 것이다. 알리에프 의장은 구데타의 주역인 수렡 후세이노프를 34세의 약관에 총리 자리에 앉히고 자신은 대통령 서리로 있다가 국민투표를 통해 대통령이 되었다.

알리에프 대통령은 관료및 정치인 출신으로서 노련하게 주변 강국들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전선에서 휴전협정을 끌어내어 총소리를 일단 멈추게 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이후에 총리이며 러시아의 사주를 받는 수렡 후세이노프를 몰아내고, 유일하게 남은 경쟁자이며 서방 상대의 사업을 장악한 자신의 후임으로 국회의장이 된 라술 굴리에프마저 몰아내게 되어 유일한 권력으로 현재까지 장기집권의 터를 닦아오고 있다.

쿠테타로 몰려난 엘치베이 전 대통령은 현 대통령인 알리에프 대통령과는 동향이지만 그의 생전엔 자유롭게 수도인 바쿠를 맘대로 드나들지도 못한 채, 고향인 나치반과 터어키 사이를 전전하다가 쫒겨난 지 6년만에 지병인 암으로 낯선 땅 터어키의 한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인민 전선이란 정당의 총재로서, 최초의 민선 대통령으로서 많은 지식인의 지지를 받았지만, 정치란 이념만으로 되는 것이 아닌지라 순수함에 상처를 많이 남긴 채, 비운의 최후를 맞게 된 것이다. 2000년 8월 22일 터어키 귤하나 병원에서.

23일은 바로 이 엘치베이 대통령의 초상날일 뿐 아니라, 러시아 잠수함과 함께 118명의 러시아 수병들의 장례식 날이 되었다.

역사는 많은 사실을 알고도 그 사실을 머금은 채, 도도하게 소리없이 흐르고 있을 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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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자는 현지에 8년간 살아오고 있으면서 언어학에 관련된 일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타 문화 속에 살면서 일어나는 문화적 차이, 이 민족속에 살아 있는 민속적 지혜, 민담, 설화, 기타 재미 있고 유익한 내용들을 소개하고 나누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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