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뷰티에서 단연 돋보이는 캐릭터는 케빈도 아니고, 케빈을 유혹하는 어린 미녀도 아니고, 남자친구랑 도망가기로 하는 케빈의 딸도 아니다. 바로 케빈의 이웃에 사는 대령이다. 왜 그런가. 두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케빈의 죽음에 대한 평가다. 이 반론아닌 반론을 쓰게 된 이유이자 홍기자님 글을 읽고서 생긴 의문. 그렇다면 케빈의 죽음은 영계나 밝히는데 대한 인과응보일까? 무기고에 총이나 잔뜩 쌓아두고 나치 문양이 그려진 접시를 애지중지 아끼는 옆집의 대령. 그는 아들을 타락시킨 범죄자를 응징한, 불쌍한 피해자에 지나지 않은가? 사실 대령도 케빈 못지 않다. 다만 보수적인 눈으로 보자면 대령이 불쌍해 보일 수는 있다. 그에게는 기독교(꼭 기독교일 필요는 없지만 미국이니까) 윤리나 도덕이라는 외투가 있으니까.

다른 하나는 대령이라는 캐릭터다. 지나친 억측일지 모르겠지만 "박정희"로 상징되는 부정적으로는 파쇼 군부, 혹은 긍정적으로는 반공/우익/근대화세력이라고 보면 어떨까. 혹 가깝게는 총선을 맞아 지역감정에 희망을 걸고 있는 사람들로 보면 어떨까. 줄거리상으로는 별 중요해 보이지 않는, 대령이라는 캐릭터가 자꾸만 눈에 거슬리는 것은 바로 그가 우리의 가부장주의를 대표하고 있는 듯 해서다.

구체적으로 그 대령네 집을 들여다 보자. 딱 두 장면이 생각난다. 하나는 가족이 소파에 나란히 앉아 텔레비전을 보는 장면이다. 케빈네 가족들이 은은한 음악에 은은한 조명 아래 식사를 하는, 처음 얼마간의 부엌 장면처럼 이것은 중산층의 평온함을 상징한다고 해도 무리 없으리라. 차이가 있다면 케빈네 식탁에서는 딸의 저주가 곧 터져나오지만 대령네 거실에서는 아무 말이 없다는 사실이다. 정말 아무 말도 없다. 단 두마디가 있긴 하다. 텔레비전 소리를 자기에게 말 거는 소리로 오해한 엄마가 묻는다. "뭐라고 그랬지?" 무심한 아들의 답. "저는 아무 말도 안했어요."

그리고 다른 장면. 대령의 아들은 이제 더 이상 견디지 못해 가출을 결심한다. 그때 아들은 어머니에게 작별을 고하러 가지만 거실에서 접시(묘하게도 나치 문양이 새겨진 접시같기도 하다.)만 멍하게 들고 있는 어머니는 아무런 말이 없다.

아메리칸 뷰티는 미국 영화다. 따라서 영화 속 메세지는 미국 사람을 겨냥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걸 "한국적"으로 읽어야 할 부분은 "영계산업"이 아니다. 바로 아버지로 상징되는 억압적 윤리, 도덕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정신분석에 대한 상식이 있다면 퍼뜩 느낌이 올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참으로 많은 아버지들이 있다. 피붙이만 아버지가 아니다. 자기가 당선되지 않으면 그 지역 공장은 싸그리 다 뜯겨 헐벗고 굶주릴 것이며 고향인재들은 제대로 자리 하나 못잡을 것처럼 떠들어대고, 또 자신의 리더쉽이 아니었으면 경제 발전 따위는 불가능했으리라 믿는 정치적, 경제적 아버지들. 이런 아버지들을 가능하게 하는데는 문화적 아버지, 아니 "할아버지"가 자리를 잡고 계시다. 바로 "춘향전"에 대한 청보위의 반응에서 보듯이 감독과 여배우를 포주와 창녀 비슷하게 취급해버리는 문화적 할아버지.

놀라운 것은,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그리 놀랍지 못하게도 그렇게 윤리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윤리적이지 못하다. 대령 아들에서 보듯이. 그렇다면 아버지들의 대응은? 그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지 않고 원인제공자를 찾아, 아니 만들어내서라도 그 녀석을 죽여버리는 것이다. 우리 아버지들의 폭력성은 거기서 온다. 그 아버지들의 정체 폭로. 그것이 아메리칸 뷰티에서 읽어야 할 주제의식이 아닐까 한다.

2000-03-08 15:30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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