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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리 집에서 가장 바쁜 사람은 아홉 살 아들이다. 규칙적으로 일어나 매일 집을 나서는 유일한 사람이다. 학원이나 숙제처럼 매일 해야만 하는 과제가 있는 사람도 아들이 유일하다.

"엄마, 나도 빨리 커서 백수가 되고 싶어!"

수많은 어린이의 꿈 중에 이토록 허무하고 어의없는 대답이 있을까. 하필 그 대답이 내 아들 입에서 나왔다는 생각에 기가 차서 웃음이 나왔다가 금세 심각해졌다. 

"어른이 되서 고작 되고 싶은 게 백수라고?"

아들이 백수가 되고 싶다는 포부를 밝힌 것은 요즘 우리 가족의 생활 방식과 무관하지 않다. 입사 15년 만에 육아휴직을 결심한 남편 때문이다. 남편은 휴학 없이 대학을 졸업한 동시에 지금의 회사에 입사했다.

동료들이 이직과 퇴사를 반복하는 지난 시간 동안 묵묵히 자리를 지킨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경기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신규 채용을 꺼리는 회사 탓에 무리하게 초과 업무를 해온 탓인지 지난해 몸과 마음이 병들기 시작했다.

스트레스로 신장에 무리가 와서 시술과 입원 치료를 받았고 퇴원 후 복용한 스테로이드 부작용으로 각종 피부병을 앓았다. 몸이 망가지니 어렵게 버텨 온 마음마저 병들기 시작했다.

우울증인지 번아웃인지 매일 같이 치밀어오르는 분노와 무력감을 견디기 힘들었다. 책임감과 인내심이 강한 남편의 성격을 고려할 때 상황이 심각해 보였고 우리는 그동안 모아온 적금 만기에 맞추어 과감히 육아휴직을 결심했다. 

자세한 상황을 알 리 없는 아들 입장에서는 아빠가 어느 날 출근도 하지 않고 매일 집에서 놀고 있으니 나도 빨리 커서 아빠처럼 백수가 되고 싶다는 말이 나올 법도 하다. 
   
등교하는 너의 뒷모습이 측은하게 느껴지느건 기분 탓일까?
 등교하는 너의 뒷모습이 측은하게 느껴지느건 기분 탓일까?
ⓒ 이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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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의 장래희망이란 자고로 부모의 열망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 아직 어린 아이는 부모가 은연중에 뱉은 말이나 평소 행동을 통해 미래의 자신의 모습을 상상한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90년대 말에는 주로 변호사, 의사, 선생님처럼 흔히 공부를 많이 한 전문직이 주로 초등학생 장래희망으로 거론되었는데 어려운 가정형편에 학업을 이어가지 못한 부모세대의 한이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000년대 초중반이 되면 청년들의 실업난이 뉴스에 오르내리기 시작했고 그 즈음 초등학생의 장래희망에는 공무원이 등장했다. 불안정한 경제상황으로 좋은 대학을 나오고도 취업을 못하는 사례를 경험한 부모세대는 안정적인 직업이 최고라고 생각했을 테고 아이들도 영향을 받은 것이다.

시간이 더 지나 스포츠 스타나 연예인이 고액의 연봉과 출연료를 받는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아이들의 꿈은 운동선수와 아이돌이 되었고, 평범했던 사람이 유튜버로 떼돈을 벌고 유명인이 되는 사례가 늘어나자 아이들은 너나할 것 없이 유튜버를 꿈꾸게 되었다.

팬데믹과 AI의 등장 이후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고조된 불안감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추구하기 보다는 정확히 손에 쥐어지는 '돈'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하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백수가 되고 싶다는 아들의 말은 어쩌면 그토록 휴식을 바라던 남편의 열망이 그리고 그것을 실현한 남편의 현실이 반영된 말일지도. 옛말에 아이 앞에서는 찬물도 함부로 마시지 말라고 했다. 아무튼 이번 일을 계기로 우리 부부는 아이 앞에서 만큼은 좀 더 건설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로 다짐했다. 

"여보, 유튜브나 게임은 아이 학교 갔을 때나 합시다."

태그:#장래희망, #육아휴직, #초등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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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목고 출신의 문화예술기획자에서 전업주부가 되기로 결심한 평범한 엄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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