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사람이 얼마나 사는지를 물으면 대개 큰 오차 없는 답이 돌아온다. 2023년 기준으로, 총 인구 5155만 명. 인구의 절반 가량이 수도권에 몰려 사는 도시화된 나라가 한국이란 것을 국민 대부분이 알고 있다.

하지만 한국인에게 그들이 잘 눈을 돌리지 않는 부분을 물어보면 당장 혼란스러운 결과를 마주하게 된다. 한국 인구수 중 4% 가량은 한국 거주 외국인으로 이뤄져 있고, 그 수가 200만 명을 넘는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이러한 지식의 편차는 곧 관심의 편차이며, 한국 땅에서 외국인들이 맞이하는 여러 어려움의 배경이 된다.
 
한국인이 더욱 관심 없는 주제가 있다. 다름 아닌 동물이다. 한반도에 살았던 모든 인간 가운데 그 어느 때보다 많은 고기를 섭취하는 것이 오늘의 한국인이다. 어디 고기뿐일까. 젖소로부터 우유와 치즈를 얻고, 실험용 동물에겐 오로지 인간을 위한 수많은 지식을 획득한다. 동물원과 수족관엔 학술이나 관상을 위해 필요한 동물들이 그득 들어차 있고, 반려동물이란 이름으로 웬만한 인간보다 나은 대접을 받고 사는 동물도 수두룩한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인은 이 나라에 얼마나 많은 동물들이 살아가고 있는지를 짐작조차 하지 못한다. 제 삶과 그토록 긴밀히 엮여 있는데도.
 
전술했듯 무지는 관심의 부재를 드러낸다. 한국인은 동물로부터 많은 이익을 취하면서도 그들의 삶과 죽음에는 관심이 없다. 그리고 이는 고스란히 그들의 열악한 처우로 이어지게 된다. 매일같이 돼지고기를 먹는 이가 돼지의 죽음은커녕 일생동안 그 모습을 두 눈으로 본 적도 없다는 사실이 이상하지 않은 세상이다. 이러다간 어느 아이가 감자를 나무에 주렁주렁 열리는 것으로 그려두었다는 이야기처럼, 돼지도 공장에서 태어나 자라나는 것으로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이미 그런 모습일지도 모른다.
 
 영화 <당나귀 EO> 포스터

영화 <당나귀 EO> 포스터 ⓒ 찬란

 
칸이 주목한 당나귀 한 마리, 도대체 왜?
 
지난해 칸영화제는 코로나19의 전 세계적 확산으로 위축됐던 영화산업이 부활의 날갯짓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음을 알렸다. 수준급 작품이 부족했던 지난 몇 년 간의 흐름에서 탈피해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 작품이 한꺼번에 여럿 도착했던 것이다.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과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브로커>도 출품돼 관심을 모은 이해 칸에선 루벤 외스틀룬드의 <슬픔의 삼각형>이 최고 영예인 황금종려상을 품에 안았다. 봉준호의 <기생충>을 연상시킬 만큼 지적인 블랙코미디로, 유럽 평단의 기호를 그대로 저격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흥미로운 건 이해 칸이 평소보다도 많은 작품에 상을 주었다는 점이다. 2등 격에 해당하는 그랑프리, 즉 심사위원대상엔 두 작품이 선정됐다. 하나는 루카스 돈트의 <클로즈>이고, 다른 하나는 클레어 드니의 <정오의 별>이었다. 이중 어느 하나도 칸영화제의 선택에서 미뤄둘 수 없을 만큼 특별한 성취라는데 심사위원들의 중지가 모인 것이다.
 
그 뒤가 바로 심사위원상인데 이 또한 두 작품이 영광을 안았다. 지난 '씨네만세 542'에서 소개했던 <여덟 개의 산>과 함께 폴란드의 노장 예지 스콜리모프스키의 <당나귀 EO>가 심사위원상을 받았다. 2009년 제62회 칸영화제에서 박찬욱의 <박쥐>가 안드레아 아놀드의 <피쉬 탱크>와 공동수상했던 것처럼, 칸이 두 영화 모두를 놓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볼 수 있을 테다. 이와 관련하여 올해 2023년 제76회 칸영화제 심사위원상은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폴른 리브스>가 단독 수상했으니 심사위원상이 매년 두 작품에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하겠다.
 
<당나귀 EO>는 칸영화제의 눈 높은 심사위원단이 그 작품성을 인정한 작품이다. 영화를 보다보면 <헤어질 결심>과 <브로커> 같은 작품에 앞서 심사위원들이 이를 선정한 이유를 금세 알아챌 수 있다. 그만큼 특별하고 유효하며 기존에 없었던 시도가 인상적인 것이다.
 
 <당나귀 EO> 스틸컷

<당나귀 EO> 스틸컷 ⓒ 찬란

 
동물보호단체가 깨뜨린 EO의 평온
 
영화의 주인공은 EO라는 이름의 당나귀다. 그는 첫 장면에서 무대 위 쓰러진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오의 곁에는 드레스 차림의 젊은 여자가 있고, 그녀는 울음을 울며 쓰러진 이오에게 숨을 불어넣는다. 그 모든 노력 끝에 이오는 벌떡 일어서고, 관객들도 일어나 박수를 보낸다.

이오는 무대 위에 선 배우이며, 그 무대는 바로 서커스다. 말하자면 이오는 서커스단의 당나귀다. 여배우와 함께 연기를 하는 당나귀, 인간과 교감하는 우아한 당나귀다.
 
서커스단의 삶은 그리 만만치 않다. 동물을 조련해 사람들 앞에 내보이는 것 또한 서커스단의 업이다 보니 이곳의 다른 동물들은 험난한 삶을 살아간다. 이오는 그를 아끼는 여단원의 도움으로 비교적 편한 삶을 사는 듯도 한데, 연기를 하지 않는 일상의 시간 동안에는 짐수레를 끄는 보통의 나귀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러던 어느날이다. 서커스단에 웬 사람들이 잔뜩 몰려오고 동물보호단체 사람들이 피켓을 들고서 이오를 데리고 가는 단원의 앞을 가로막는다. 그가 나서서 항의하니 한 사람이 말하기를 법에 따라 서커스단의 동물들이 정부에 압류되게 되었단다. 동물학대로 서커스단의 모든 동물을 구조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당나귀 이오는 그렇게 저의 전부였던 서커스단을 떠나게 된다.
 
 <당나귀 EO> 스틸컷

<당나귀 EO> 스틸컷 ⓒ 찬란

 
인간이 돌아보지 않는 세상, 이 당나귀는 보았다
 
이오가 닿는 곳은 말 농장이다. 이오의 삶을 단박에 파탄 낸 동물보호단체 사람들은 말 농장에 도착해 저들이 얼마나 좋은 일을 하였는지를 자축한다. 사진을 찍고 즐기는 그들 뒤로 이오는 제 목에 주렁주렁 달린 당근을 뜯어 씹을 뿐이다. 사람들이 떠난 뒤 이오는 마굿간에 덩그러니 남겨진다. 크고 미끈하게 빠진 말들이 힘껏 내달리는 농장에서 이오는 짐수레를 끄는 일을 한다. 부러움이 뚝뚝 떨어지는 시선으로 건장한 말들을 보지만, 그 말들과 이오 사이엔 결코 닿을 수 없는 먼 거리가 놓여 있단 걸 모두가 안다.
 
저 말들과 제가 같아질 수 없음을 깨닫는 어느 날인가, 이오는 트로피가 가득 세워진 선반을 넘어뜨린 뒤 농장에서 쫓겨나게 된다. 이후의 삶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하다. 농장으로 팔려간 이오는 잘 적응하지 못한다. 벌목현장과 장애아동들의 곁에서 시간을 보내지만 끝내 적응하지 못하고 마침내 농장을 탈출하게 되는 것이다. 어느 숲길에선 사냥꾼에게 총을 맞은 늑대가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훌리건들의 싸움에 휘말리며, 온갖 동물을 폐기하는 폐기업자에게까지 흘러들어간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고도 말고기로 살라미 소시지를 만드는 업자에게 팔려가니 이오의 일생이 인간으로 치면 그 어떤 재난을 겪는 이보다도 기구하다고 하겠다.
 
영화는 스스로 제 삶을 선택할 수 없는 이오의 파란만장한 삶을 묵묵히 뒤따른다. 말 한 마디 없이 멍청하다 싶을 만큼 투명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이오에게 인간의 모습이란 탐욕스럽고 추잡하기가 그지없다. 어쩌면 이 또한 인간의 단면임을 이 영화는 말 없는 동물을 통하여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장면들이 생생한 취재를 바탕으로 한 사실은 명확해 보인다. 동물보호단체가 구조한 동물들의 처리와 관련한 문제들이 종종 터져 나오고, 입양을 시킬 수 없는 동물들이 전보다 못한 곳으로 팔려나가 처리되는 경우도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는 현실이다. 한국에서도 동물보호단체에서 남몰래 자행한 안락사가 문제가 되기도 했거니와, 아예 동물 폐기를 업으로 삼는 업자들의 모습은 한국사회에서도 공공연히 자행돼 충격을 던지기도 한다.
 
 <당나귀 EO> 스틸컷

<당나귀 EO> 스틸컷 ⓒ 찬란

 
한국은 과연 다른가?
 
대표적인 사건이 올해 초 경기도 양평군 한 주택에서 개와 고양이 1250여 마리의 사체가 발견된 사건이라 하겠다. 상품성이 없는 반려동물과 번식동물을 돈을 받고 가져와 방치해 죽인 것으로, 반려동물을 구입하는 거대한 시장 뒤 이렇게 죽어나가는 동물들이 있다는 추악한 이면을 단적으로 드러낸 사건이다. 한 쪽에선 귀엽다며 반려동물을 사고, 다른 한 쪽에선 유기된 동물이며 반려동물을 위한 번식동물이 죽어나가는 기묘한 풍경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공장식 축산이란 산업 가운데 좁은 공간에 갇혀 온갖 항생제 주사를 맞다가 살이 찌면 죽어나가는 동물들도 적지가 않다. 그 동물들이 우리의 먹거리가 되는 현실 가운데, 한국인은 저와 밀접한 동물들의 삶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런 생각에 이르게 된다.
 
예지 스콜리모프스키는 이오를 통하여 유럽사회가 동물을 대하는 시선을 다층적으로 바라보도록 한다. 인간이 아닌 당나귀 이오의 입장에서 사람들은 저들이 동물에게 행하는 일을 낯설게 보는 기회를 얻는다. 저에게서 한 걸음 떨어져 저와 제 사회가 다른 누구에게 행하는 일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기회는 그리 흔치가 않다. 칸영화제가 주목한 건 바로 이와 같은 귀중한 기회를 이 영화가 관객에게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었을 테다.
 
그렇다면 한국은 동물을 어떻게 대하고 있을까. 예방적 살처분이란 명목으로 지난 10여년 간 1억 마리가 넘는 산 동물들을 땅 속에 생매장해 죽이면서도 우리는 우리의 축산체계가 어떠한지, 또 전술한 비극을 낳는 반려동물시장이 어떠한지를 돌아보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닌가. 가축과 반려동물이 이러할진대 한반도에 자생하는 125종의 포유동물과 다른 생명들이 처한 어려움이 어떠할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럼에 <당나귀 EO>가 필요한 것은 저기 유럽만은 아니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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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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