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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전시관
▲ 우리갤러리 이종희 관장 유물전시관
ⓒ 최미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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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군 해미면 억대리에서 5형제 중 맏이로 태어난 이종희 관장. 국민학교 3학년 때 아버지를 따라 야산을 개간하던 중 매장되어 있던 유물을 접하게 되면서 인생이 달라지게 됐다.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의 아침 곡기로 몹시 배가 고팠지만, 이상하게도 유물을 발견한 순간부터 배고픔은 달아나고 그저 가슴이 뛰고 정신이 아득했다는 그는 "어린아이가 그랬을 정도면 인연도 아주 유별난 인연 아닐까요"라고 환하게 웃었다.

지난 15일 한파가 다소 누그러진 날 가야산 자락에 위치한 우리갤러리를 찾았다. 눈 앞에 펼쳐진 수많은 유물 앞에서 발길을 쉬 뗄 수가 없었다. 은은하고 매끈한 감촉 속에 혼으로 새겨진 소박한 문양의 도자기들. 그중에서도 하늘빛을 담고 있는 청자 분청사기는 유백색의 은은함과 여백의 미 그리고 소박한 가야산의 정기와 겨울 자연의 아름다운 조화가 적절히 맞닿아 있어 눈부실 정도였다.

우리갤러리 이종희 관장은 "많은 분이 우리 선조들의 정신을 한껏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무엇보다 3.1 독립운동사는 우리가 꼭 기억하고 되새겨야 할 아픈 역사다. 당시의 유품들을 숭고하게 간직하는 일이 앞으로 해야 할 일"이라며 "우리의 근현대사 속에 꿋꿋하게 살아 숨 쉬고 있는 선조들의 충(忠)과 애국심을 다시금 되새겨 코로나로 힘든 대한민국에 힘이 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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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갤러리 전경 .
ⓒ 최미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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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산을 개간하며 발견된 유물에 관해 더 기억나는 것들을 말해달라.
"옛날에는 많은 집이 야산을 개간하여 농사를 지었다. 그러다 보면 매장된 유물들이 많이 출토됐는데 우리집도 그중에 하나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토기, 쇠칼 등 헤아려보면 대략 수백 점이 훨씬 넘을 정도의 유물이 발굴됐다.

집안에 둘 곳이 마땅찮아 주로 외진 곳에 보관하며 고물 장수에게 엿과 바꾸어 먹기도 했고, 장난삼아 깨뜨리며 놀기도 했던 시절이 바로 50~60년대였다. 녹슨 칼류의 유물들은 그 값어치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해 깨뜨리거나 돌팔매질에 사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토기 등 많은 유물은 어린 내 눈에도 엄청나게 멋져 보였던 것 같다.

당시 우리 집에서 쓰고 있던 그릇들보다도 정교했다. 그릇에 새겨진 문양은 바로 내 눈앞에서 그린 것처럼 선명하고 흠집 하나 없이 깨끗한 것들이 많았다. 아마도 우리가 개간했던 곳은 공동묘지 터는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마다 토기나 삼족 제기 등이 지속해서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목격한 출토유물만도 상상외로 많았으니까.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그 유물들이 군것질거리와 맞교환되거나, 장난감 등으로 쓰였다는 것이다. 또 수백 점의 유물들은 결국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고, 현재는 몇 점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고백하건대 그때 그렇게 훼손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유물들은 내게 큰 빚으로 남아있다. 그 죄책감이 내 발목을 잡아 현재 나를 이 자리에 앉히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우리갤러리
▲ 역사전시관 우리갤러리
ⓒ 최미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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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찮게 생각하고 훼손했던 것이 큰 가치의 유물이었다고 했다. 옛날에는 다들 그렇게 살았는데 크게 상심하지 않아도 될 텐데.
"그래서 나와 골동품과는 어떤 인연이 있다고 하는 거다. 다들 그렇게 살았을지언정 나는 늘 가슴 한켠이 무거웠다. 그러면서 박물관을 수시로 드나들었다. 연구적 가치를 지닐 뿐만 아니라, 후대에까지 길이길이 전해야 할 조상들의 얼과 숨결을 아무리 철부지 소년이었다 해도 함부로 다뤘던 것에 대한 죄스러움과 아쉬움 때문이었다.

이런 내 마음을 아내에게 토로하자 그 사람도 관심은 있었던지 유물이나 골동품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우리 부부는 삶이 고단해질 때마다 박물관이나 인사동으로 자주 데이트를 다니는 게 일상이 됐다. 뿐만 아니라, 유물에 관한 이야기 하나로도 밤을 새울 정도로 심도 있게 대화를 나눴다. 박물관으로 다니면서 '계룡산 가마'나 녹을 내어 그린 '철화백자', '토기' 등이 얼마나 큰 가치가 있는 유물인가를 알게 됐다.

요즘은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거쳐 온 과거 속에 이뤄진 산물임이 바로 인간이다. 사람은 미래를 꿈꾸면서 현재를 살아간다. 하지만 아무리 미래지향적인 사람일지라도 결국에는 과거의 삶을 통해 자신을 이룩해 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갤러리에 전시되는 있는 고가구
▲ 먹감나무 2층장 우리갤러리에 전시되는 있는 고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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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에서 벤치마킹해 온 것을 우리나라 실정에 맞게 '1000냥 백화점'이란 이름으로 붐을 일으킨 장본인이 바로 관장님이다. 당시 얘기를 전해달라.

"나는 대한민국에 1000냥 백화점을 최초로 도입하여 크게 성공시켰고, 그것이 시발점이 되어 지금의 보물마트로 성장시켰다. 그렇게 하기까지는 유년 시절의 가난과 어머니의 병중에 겪은 구치소 생활, 이른 나이에 생활전선으로 뛰어들었던 일, 사기를 당하고 거지처럼 지낸 청년 시절, 연쇄 부도와 가난의 연속으로 수십 번씩 세상을 등지려 마음먹었던 것이 토대가 되었다.

물론 가족이 중심에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끈질긴 인연으로 이어진 유물이 나를 지탱해 주는 신비로운 힘이었다.

전국에 체인점이 활성화되면서 동시에 그것들이 매개체가 되어 각지에서 유물들을 구입하는 데 많은 정보가 되기도 했다. 이른바 두 마리 토끼 아니, 더 많은 토끼를 잡아나갔다. 그도 그럴 것이 저물가 시대에도 우리 1000냥 백화점이 크게 일조하면서 고용 창출을 이어나갔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이럴 바엔 차라리 골동품을 수집하자"고 아내에게 말했다. 흔쾌히 동의한 집사람과 함께 그때부터 골동품상을 통해 한 점 한 점 수집하기 시작한 유물이었다."

- 사업과는 전혀 다른 방향이 바로 골동품인데 후회는 없나?
"마지막 꿈이었는데 후회가 있을 리 있겠나. 전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아내와 함께 노년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인생 2막에는 경치 좋고 물 좋은 곳에 내려가 골동품 전시관이나 박물관을 짓고 살 마음이 있느냐?"고 물어봤었다. 아내는 적극 찬성했고, 우리는 그 길로 명지대학교 골동품감정학과 2기생으로 2년간 함께 수학했다.

알면 알수록 골동품의 매력에 점점 빠져들어 갔던 그 시절, 힘든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함께 나눌 이야기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강의시간에는 무엇을 배우게 될지 기대하며 시간을 보냈고, 강의를 마치고 돌아오거나 전시관 등을 둘러본 뒤에는 늘 주제를 정해 토론을 했다.

그중에서 우리를 가장 뜨겁게 만들었던 것은 찻잔이었다. 차 마시기를 좋아하는 우리 부부가 찻잔에 대해서 보다 각별했던 것은 '운치' 때문이었다. 찻잔에서 운치를 느끼기 위해서는 잔에 물을 담아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찻잔은 내부가 조금 덜 구워져 연질인 경우가 있다. 이는 현대시각으로 보면 불량품에 해당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론 의도하지 않은 색다른 매력을 전해주는 묘함이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러한 도자기나 찻잔은 임진왜란이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약탈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실제로도 일본을 방문해 보면 막사발이나 도자기들이 그곳에 전시되어 관광객을 맞는다. 부디 이른 시일 내에 우리 품으로 돌아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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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전시관 고가구와 옹기 청자 백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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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동품을 수집하면서 가장 안타까웠던 일은?
"수집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산 10여 점이 짝퉁임을 알았을 때다. 허탈함과 동시에 화가 치밀었다. 우리는 단호하게 망치로 때려 부숴버렸다. 이는 개인적 차원의 문제만이 아니라 업계 전체의 문제였기 때문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때부터 '나부터 한 점 부끄러움이 없지 않으면 업계 전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식견을 넓히는 데 집중했다. 더구나 인생 2막에 전시관을 열 계획을 하고 있었으니 더욱 단호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부부는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고 부지런히 골동품 판매장을 둘러보며 수집하기 시작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차차 경매로 관심이 바뀌어 그 (골동품)수도 점차 늘어나게 됐다.

경매인지라 때로는 수천만 원에 달하는 무리한 금액을 치르면서 최고가 낙찰을 경험해 보기도 했고, 정말 마음에 들었으나 돈이 부족해 사지 못했던 물품도 있었다. 그럴 때는 돈을 융통해 구입하는 일도 더러 있었다.유일한 낙이 수집이다 보니 온 집안은 숭고한 가치를 간직한 우리의 문화재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 승승장구하고 있던 사업을 접고 우리갤러리를 오픈한 것이 좀 이른 감은 들지 않았나?
"아무리 좋은 유물도 여러 사람이 공유하고, 보고, 경험하지 못하면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이처럼 유물을 계속 수집해 모아두기만 하니 보물이 마치 고물과도 같아 보였다.

역사적·문화적·정신적 가치가 무궁무진한 문화재를 마냥 썩혀두고 있는 것만 같아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을 즈음, 가야산 자락을 끼고 있는 덕산면 대치리를 만나게 되었다. 더구나 이곳은 나와 아내가 어린 시절 뛰어놀았던 고향과도 인접한 곳이었다. 특히 풍수지리적 위치로도 탁월한 이곳에 조상들의 숭고한 얼이 담겨 있는 우리 문화재를 전시하는 공간으로는 최적지라고 생각했다.

더구나 만해 한용운 선생, 독립운동가 윤봉길 선생 등 내포 지역을 대표하는 분들과 관련한 유물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는 만큼 이곳에 전시관을 짓게 되면 내포 지역과 관련한 역사적 자료와 유물을 통해 우리의 뿌리를 보다 의미 있게 알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2015년 7월, 1300여 평의 터를 매입하고 이듬해 3월부터 토목공사를 시작했다. 물론 애착이 갔던 만큼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280여 미터의 돌담을 모두 자연 돌담으로 직접 만들었고, 장독대나 무쇠솥, 폭포, 돌탑, 철도 목길 등 각종 조형물과 조경, 나무와 꽃을 심는 일도 직접 했다. 건물은 전시관이 있는 본관 건물 60평, 부속 건물 30평에 우리가 거주할 공간 30평을 추가하여 완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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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갤러리에 세워져 있는 옹기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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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자료 중에 소개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막사발과 고려청자, 조선백자, 분청자기, 청화백자, 옹기, 고문서, 각종 민속품, 고가구, 각종 근현대사와 독립운동사 관련 자료 등 수천 점의 유물들이다. 또 충남 서산 출생 이종린 선생이 만든 몽학이천자(蒙學二千字)는 1910년대 청소년들에게 한자를 교육시키기 위해 만들어져 충청도 방언이 반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내포 지방의 이름을 빛낸 인물들의 정신이 고스란히 담긴 책과 문서 등을 볼 때 더욱 큰 자긍심이 든다.

상해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독립공채, 최상운 선생이 지은 민족의 별들, 김춘광 선생이 지은 안중근 사기, 3.1 운동사, 대한독립운동과 임시정부 개정사 등 나라를 빼앗겼던 우리의 아픈 역사와 관련된 다수의 유물도 나로 하여금 가장 크게 사명감을 느끼도록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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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주교 신자들이 숨어서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옹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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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지난해 11월 로마교황청은 해미 천주교 순례길을 거쳐 순교한 신자들의 유해가 보존된 해미순교성지를 국제성지로 지정했다. 해미 천주교 순례길은 1800년대 병인박해 등 내포 지역의 수많은 천주교 순교자들이 서산해미읍성과 해미순교성지(여숫골)로 압송됐던 경로다.

이름이나 세례명을 남기고 순교한 132명의 신자가 기록으로 남아있으며, 기록되지 않은 1800~2100여 명 이상으로 추측되는 무명의 신자들이 처형당한 곳으로 알려졌다.

이런 역사적인 곳이 우리갤러리와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은 상당히 의미 있는 일이다. 더구나 우리 전시관에는 당시 천주교인들이 만든 옹기가 다수 있는데, 여기에는 천주교를 알리기 위해 비밀리에 십자가를 새겨넣기도 했던 역사적 배경 방문객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향후 서산을 방문하는 순례객들이 이곳에 들러 당시의 역사를 공유하길 바란다."

이종희 관장은 인터뷰 말미에 이런 말을 남겼다.

"윈스턴 처칠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했다. 우리는 일제강점이라는 아픈 역사를 거쳐 왔지만, 그 역사가 아프다고 해서 애써 잊으려 해서는 안 된다. 역사를 통해 현재를 보고, 밝은 미래를 꿈꿀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이 정신이야말로 우리 선조들이 남긴 유물의 의미를 되새기고 후대에 널리 알리려 하는 정신과 그 맥이 닿아있다고 본다. 이런 노력이 하나둘 모이면 더 크고 밝은 미래를 꿈꿀 수 있다고 확신한다.

2022년 임인년 흑호해에는 우리갤러리가 '옹기박물관'으로 등록하려고 한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더 많은 분들이 우리의 소중한 역사를 되돌아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서산시대에도 실립니다.


태그:#우리갤러리, #이종희 관장, #유물전시관, #골동품, #1000냥 백화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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