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막을 건너 호수를 지나' 포스터

영화 '사막을 건너 호수를 지나' 포스터 ⓒ 씨네소파

 
1_갈라파고스를 넘어
 

한국은 섬나라다. 가깝고도 먼 옆 나라 일본이 아니고? 오히려 일본보다 더 고립된 상태라 해도 손색이 없다. 동‧서‧남쪽 삼면이 바다, 북쪽은 DMZ 비무장지대로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본이 섬나라라지만 국토의 크기나 지정학적 조건 면에서나 스스로 고립주의를 취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해외 진출이나 교류가 더 원활한 조건인 데 반해 한국의 상황은 자의적 고립보다는 어쩔 수 없는 봉쇄에 가까운 셈이다.
 
자연적 조건 때문에 바다로 막힌 삼면과 달리 북쪽 DMZ는 현대사의 산물이다. 70년이 지난 분단은 어느새 우리들의 인식에도 마음 속 장벽을 쌓아버렸다. 한반도 북쪽은 과거엔 동포였지만 이제는 낯설고 두려운 존재 혹은 가난하고 믿을 수 없는 이방인들의 '소굴'이 되어버렸다. 1990년대 초 재통일 이후 30년이 지나 한 세대가 온전히 교체되고 나서야 제대로 통합되어가는 독일의 사례로 볼 때 가장 긍정적인 방향으로 미래가 전개된다 해도 갈 길이 멀어 보인다.
 
자원도 없는데 고립된 조건에서 반세기 넘게 한국인들은 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해 분투해 왔다. 오직 상대적으로 유리한 자원이라 할 만한 게 교육수준 높은 인구뿐이라 교육열은 세계 최고치에 도달했고 한국의 입시교육은 지옥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1980년대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가 등장하고, 몇 년마다 주기적으로 입시제도 개편을 추진하지만 근본은 전혀 변한 게 없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일은 국가적 관심사이고 한국사회 교육제도의 중심축이다. 많은 논란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체제는 바뀔 생각이 통 없다.
 
현대 한국사회를 근본부터 제약하는 분단모순, 그리고 그로 인해 비정상의 정상화 급으로 팽창한 교육모순은 우리의 일상과 의식을 통제하고 있다. 이제는 너무 익숙해져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 이 상황은 정상적인 게 아니다. 본질은 누구나 알지만 누구도 감히 건드리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버린 문제들. 여기에 오랜만에 순전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가 개봉을 준비하는 중이다.
 
2_레츠피스와 로드스꼴라가 벌인 1년간의 모험
 
 영화 '사막을 건너 호수를 지나' 스틸 이미지.

영화 '사막을 건너 호수를 지나' 스틸 이미지. ⓒ 씨네소파

 
<사막을 건너 호수를 지나>는 대안학교 출신 청년들이 활동하는 기획집단 '레츠피스 Ret's Peaace'가 자신들의 직전 과거를 보는 듯한 여행 대안학교 '로드스꼴라' 청소년들과 함께 2018년 1년간 목포에서 베를린을 경유하며 겪었던 여행의 기록이다. 이들은 우선 예행연습 삼아 목포와 천안, 밀양 개별 여행 후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우수리스크, 바이칼, 이르쿠츠크를 지나 우랄산맥을 넘어 베를린까지 이르는 대륙횡단을 감행한다. 영화는 그 여정에 감독들이 동행해 기록한 결과물이다.
 
그들은 왜 이런 도전을 감행한 걸까? '철덕(철도 덕후의 줄임말)'의 로망 중 하나가 시베리아 횡단 철도여행이라는데 그들 또한 그런 이유였을까? 이에 대한 답은 곧 해결된다. 영화 초입에서 이 여정을 기획한 이들의 설명과 의도가 친절하게 등장하기 때문이다. 2017년, 남북대화가 무르익고 '종전' 선언이 한창 이야기되던 때다. 레츠피스 멤버들은 자신들의 아이디어로 통일부 표창을 수상한다. 하지만 남북화해의 기운이 아른거리긴 하는데 구체적으로 자신들이 직접 뭔가 실행할 것은 없는 상황임을 인식한다.
 
이들은 민간차원의 활동으로 평화 교류의 필요성을 확산하는 데 도움이 될 시도를 고민한다. 그렇게 시작된 고민은 '서울역을 국제역으로!'라는 구호로 집약된다. 분단 이전에는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북으로 올라가면 열차를 갈아타며 유럽으로 갈 수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환기하며 분단 체제를 극복할 때 우리에게 열릴 세계를 상상해보기. 이 도전을 위해 이들은 여행학교 로드스꼴라의 10대들과 함께 길 위의 배움터를 꾸리고 자신들의 취지를 전하는 퍼포먼스로 거리공연을 준비한다. 그렇게 여행은 시작된다.
 
목포와 천안 등 국내 역사유적지 투어를 통해 레츠피스는 로드스꼴라와 시뮬레이션을 진행한다. 근대 이후 분단 이전 대륙으로 뻗어나간 역사는 제국주의의 출발임과 동시에 식민지에서 벗어나기 위한 독립운동의 시작이기도 하다는 것에 주목한 레츠피스는 그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려 시도한다. 구한말에서 일제 식민지 치하 독립운동에 나섰던 이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간 자취를 발굴하고 그 역사적 의의를 여행 동료들과 나눈다.
 
그렇게 예열을 마친 일행은 사면이 꽁꽁 막힌 외로운 섬, 한국을 벗어나 과거 분단 이전에는 활짝 열려 서로 연결되어 있던 유라시아 대륙 횡단에 나선다. (아마 여정 순서로는 나중일 텐데) 이들은 우수리스크에서 고려인 4세들을 만나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역사를 확인한다. 단순히 민족주의적 향수를 넘어 이주와 정체성에 대한 탐구의 시간이다. 그렇게 이어지는 여정 속에서 시베리아는 그 광활함만큼이나 많은 것들을 체험하게 해준다.
 
한 세기 전 독립운동과 항일무장투쟁의 자취를 목격해 가면서 역사의 타임머신에 탑승한 여행자들은 바이칼 호에서 대륙의 기상을 목격한다. 남한 면적의 1/3에 해당하는 거대한 호수를 보고 이들은 '동해다!'라고 외친다. 세상은 넓다는 걸 실감하는 풍경인 셈이다. 시베리아 철도는 만남의 장이기도 하다. 이들은 열차 안에서 밖에서 다양한 이들을 만난다.
 
초반에는 긴장감이 돌기도 한다. 정류장에서 먼발치의 닮은 꼴 사람들을 목격한 여행자들은 처음 만나는 북한 사람들에게 끝내 다가가지 못한다. 하지만 장기간의 기차 여행은 곧 여행의 동료들, 그리고 그들이 만나는 이방인들과의 벽을 허물어뜨린다. 스스럼없이 인종의 용광로 축소판인 시베리아 횡단열차 안팎에서 그들은 교류와 우애를 형성해나간다. 그런 만남과 이별이 이어지는 가운데 마침내 이들은 여정의 끝, 통일된 독일의 상징 베를린에 이른다.
 
베를린에 도착한 여행자들은 눈으로 직접 베를린 장벽을 확인하고, 현지 가이드에게 장벽이 무너지던 순간의 이야기들을 듣는다. 현실로 믿기지 않던 일이 뜻밖에 느닷없이 다음날 닥치더라는 당시 일화에 이들은 전설을 듣듯이 귀를 기울인다. 여행자들이 준비한 공연과 메시지는 여정이 이어질수록 점점 아마추어에서 프로페셔널해지고, 이들의 표정은 진지해져 감을 확인할 수 있다.
 
30년 전 장벽이 무너지던 기억을 공유하며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 1년간 남북관계는 훈풍에서 다시 정체되어 버렸다. 희망은 체념과 냉소로 바뀌어 있다. 그런 상황에서 이들은 한국사회 좌우 대립의 한복판, 광화문 광장에서 공연을 진행한다. 그리고 각자의 소회를 나누며 지난 1년 동안을 결산한다. 여행의 끝이자 영화의 끝은 그렇게 마무리된다.
 
3_두 마리 토끼를 쫓는 모험의 결과
 
 영화 '사막을 건너 호수를 지나' 스틸 이미지.

영화 '사막을 건너 호수를 지나' 스틸 이미지. ⓒ 씨네소파

 
영화는 두개의 낯설음을 교차시킨다.(이 둘은 병렬이 아니라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하나로 이어져 있다)
 
#1.
첫 번째 낯설음은 한국이 유라시아 대륙과 연결되어 있다는, 지도만 봐도 당연하지만 잊혀져버린 과거이자 오래된 미래의 환기다. 종종 회자되는 이야기처럼, 남북 교류협력의 상징으로 철도가 연결되면 부산에서 서울을 거쳐 북한을 종단해 시베리아 철도로 유럽으로 가는 직항로가 열릴 것이라는 장밋빛 희망이다. 과거 문명교류의 통로였던 실크로드의 동쪽 마지막 정거장이 신라였다는 고대사가 다시 미래에 구현될 수 있다는 믿음이자, 우리가 분단체제에 갇혀 잃어버린 대륙적 기상의 복원이기도 하다.
 
#2.
두 번째 낯설음은 세계 최고수준의 교육열(로 포장한 입시지옥) 바깥의 교육이다. 대안학교와 홈스쿨링 출신의 여행자들은 자신들이 또래와는 다른 인생경로를 걷고 있다는 자각과 그로 인한 낯설음과 불안을 겪고 있기도 하다. 남들과는 차이 나는 행보에 대한 생각을 이들은 카메라 앞에서 밝히고 동료들과 나눈다. 고민상담소를 열차 객실에 즉석으로 차려 서로의 고민을 공유하는 장면은 코믹하지만 동시에 진지하다. 그 과정을 통해 영화는 보는 이들로 하여금 주입식 입시교육의 통제가 아닌 다양한 교육방식이 가능하다는 걸 증명하려 한다. 두 종류의 낯설음은 서로 종횡하고 교차하며 우리의 고정관념과는 다른 사고와 삶이 가능하단 걸 보여주기 위해 애쓴다.
 
영화에는 아쉬운 점이 물론 있다. 긴 여정에서 초반 몇 곳을 제외하면 종착역인 베를린과 서울 외의 경유지역은 거의 언급되지 않고 지나쳐버린다. 여행브이로그 풍의 분량이 적지 않은 데 비해, 다양한 의미부여가 가능했을 여러 지역들은 그냥 경로로만 표기될 뿐이다. 아마 감독들이 1년 내내 일정에 온전히 동행하기 힘들었을 물리적 조건 탓으로 추정된다.
 
상당부분 촬영을 여행자들에게 의뢰했으나 감독이 원하던 영상을 놓쳐서 통째로 빠진 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어떤 부분은 과도하게 분량이 많고 어떤 부분은 턱없이 분량이 빈약하게 느껴진다. 여행자들이 소규모 그룹이 아니라 대규모 집단이다 보니 개개인에게 집중하는 깊이보다는 마치 패키지여행의 한계처럼 대략적인 개괄에 치중하고 세세한 깊이가 아쉬운 지점이 적지 않다. 이들이 길 위에서 만난 다양한 이들과의 기억이나 교감도 좀 더 세세하게 소개되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다음 문제는 이들의 여행목적과 취지가 로드스꼴라 청소년들에게 온전히 자기 것으로 소화되었는가에 관한 약간의 의구심이다. 십대 중후반의 여행자들이 방대한 근현대사 내용을 온전히 소화하기란 쉽지 않은 난제다. 몇몇 순간에는 쌍방향 소통보다는 여행을 주도한 레츠피스 멤버와 가이드들의 일방적 전달과 당위성 강조가 느껴지기도 한다. 창의적 교육을 표방하는 취지의 여행에서 주입식 교육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기분이다.
 
이렇게 추정해본 제약으로 인해 그들이 길 위에서 경험한 이야기와 그들 상호간의 관계성은 온전히 다 드러나지 못한다. 언뜻 엿보이는 개성 뚜렷한 청소년들의 입장 차이나 이를 드러낼 토론 풍경은 그리 깊게 들어가지 않고 맛보기에 그친다. 여행자들 개별의 고민 수위가 절대 낮은 편이 아니기에 그들이 여행에서 보고 듣고 겪었을 풍부하고 놀라운 경험담을 제한적으로만 접하는 게 특히 아쉽다.
 
4_장벽을 넘어서는 상상력의 힘을 믿는 영화
 
 영화 '사막을 건너 호수를 지나' 스틸 이미지.

영화 '사막을 건너 호수를 지나' 스틸 이미지. ⓒ 씨네소파

 
유라시아를 경유할 때의 주인공들은 생기가 넘친다. 집을 떠나 생경한 환경에서 고생길이지만 새롭고 낯선 것들에 대한 흥미로 가득한 상태다. 여행길에서 로드스꼴라 친구들의 모험은 인생에 다시 경험하기 힘들 경이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이들이 귀국한 이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평화를 외치는 퍼포먼스를 할 때는 그런 생기보다는 혼란이 틈새로 드러난다. 광장을 가득 메운 태극기부대의 기운에 둘러싸여 이들의 공연은 빛을 잃는다. 사방에선 확성기의 굉음들, 적대적인 말들이 퍼지고 외국에서 경험하던 호의적인 공기 대신 무관심과 냉소가 주위를 채운다.
 
여행자들이 젊음의 기운으로 강행 돌파하기엔 70년 넘게 고착된 분단과 이 과정에서 형성된 냉전적 반공이데올로기의 힘이 한국사회에는 여전히 막강하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그리고 이들의 마지막 공연은 해고노동자들의 고공농성 연대현장에서 펼쳐지는데, 이들이 치렀던 여행의 기조와 이 연대 장면이 동떨어진 건 아니지만 다소 이질감이 드는 건 사실이다. 과연 당사자들이 어떤 토론을 거쳐 동의과정에 이르렀는지 자연스러운 전개 흐름이 받쳐줬다면 어땠을까 하는 지점이다.
 
<사막을 건너 호수를 지나>는 제목 그대로 중앙아시아 사막과 바이칼 호수를 지나 머리로는 알지만 몸으로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의 문을 열어나가려는 시도다.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 '평화'와 '성장'은 서로를 떠받치는 구조로 기능하지만 보다 자연스러운 중심은 '성장'에 기우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 광화문 광장에서의 공연 장면에서 여행자들의 표정 장면이 특히 그렇다. 이들의 순수한 선의와 낙관으로 돌파하기엔 한반도 분단과 평화 문제는 너무나 복잡하고 골이 깊게 느껴진다. 다시 꼬일 대로 꼬여버린 현재의 남북관계가 냉소와 불신을 넘어서기까지 해결해야 할 과제와 시간이 만만치 않음을 오히려 확인하는 순간이다.
 
오히려 한 친구가 드러낸 인상적 순간이 더 깊게 기억에 남는다. 일제강점기에 자신이 존재했다면 어떤 삶을 선택했을지 고민하는데, 여행자들의 연령대에 맞으면서도 실존적인 고민의 무게감이 만만치 않게 느껴진다. 이런 순수한 갈등 부분이 영화 속에서도 더 전달력이 높게 느껴진다. 여행자들의 성장이 엿보이는 대화나 인터뷰 장면들은 전반적으로 더 자연스럽게 전달된다는 개인적 소감이다.
 
그들이 나중에 더 나이가 들어 정치사회적 문제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질지는 열린 미래다. 누구도 이를 강제할 순 없는 문제다. 하지만 인생의 귀중한 1년, 황금 같은 청소년기를 정해진 경로처럼 굳어진 입시경쟁이 아니라 길 위에서,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경험하고 나눈 것은 불변의 자기 체험으로 그들 각자의 삶에 영향을 끼칠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작품정보>
사막을 건너 호수를 지나 Let's Peace!
2019|한국|다큐멘터리
2021.12.30. 개봉|105분|전체관람가
감독 박소현, 송영윤
주연 레츠피스, 황지은, 박승규, 고수경, 김지아, 주말로드스꼴라
제작 보리와 메루
배급 영화배급협동조합 씨네소파
 
2019 제11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개막작
2019 제10회 광주여성영화제 개막작
2020 제17회 EBS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상영작
2020 제21회 제주여성영화제 상영작
사막을 건너 호수를 지나 박소현 감독 레츠피스 로드스꼴라 씨네소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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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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