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책 <그리고 우리가 남았다>
 책 <그리고 우리가 남았다>
ⓒ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관련사진보기

 
산재가 승인된 지 벌써 2년이 넘었다. 시간은 무참히도 빠르게 흘러간다. 지금 생각해보면 산재를 준비하는 1년이란 시간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인생의 한순간을 삭제할 수 있다면 형부의 사망소식을 접한 그날일 것이다. 2017년 그해 여름 언니는 온몸이 찢겨나갈 만큼 고통스러웠고, 처절했다. 남편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는 그녀를 보는 가족들의 마음도 처참했다.

"남편의 죽음 이후 혼자 해결해야 하는 일들이 나를 짓누른다. 나는 지팡이 하나에 의지해 무너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 <그리고 우리가 남았다> 중에서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시간을 어떻게 이겨냈다 싶다. 나와 언니만 있었다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부모님이 함께한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산재신청을 한다고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이 한 말은 "그거 쉽지 않다는데... 힘들지 않을까?"였다. 물론 산재 승인이 쉬울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안 될 거란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한켠에서는 비난의 목소리도 들렸다. 막상 그 앞에서 "이게 우리 가족의 경험이에요"라고 말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 때문에 과로죽음에 대한 사회적 책임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는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

2018년 7월1일부터 300인 이상 사업체에서는 근로시간이 주 52시간을 초과할 수 없게 되었다. 세간에서는 부분적으로 근무시간이 줄었다고 주장하지만, 그렇다고 노동강도가 줄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노동시간의 단축으로 인한 고도의 업무집중으로 노동강도가 높아지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최근에는 코로나 19로 인한 고용불안이 겹쳐지면서 육체적 피로뿐만 아니라 근로자들의 심리적 피로감도 증가하고 있다. 그렇다면 궁극적으로 근로자의 노동환경 문제는 어디에서부터 기인하는 것일까?

전통적으로 위계서열 문화가 뿌리 깊은 한국 사회에서 직장 내 부당한 인격 모독 등 괴롭힘은 당연히 받아들여야 할 대가 내지는 자신의 탓으로 치부되었다. 이러한 그릇된 사회적 통념은 직무스트레스를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함에 따라 위험한 상황으로 내몰거나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노동자들을 양산하고 있다. 

여기에 과로사·과로자살에 대한 법적 정의 및 객관적인 인정 기준의 부재는 산재를 준비하는 유가족들에게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예컨대 일본은 과로를 정의하는 데 있어 업무량뿐만 아니라 업무스트레스 및 대인관계에 대한 포괄적인 합의를 내포하고 있다. 심리적 부담은 노동의 양적인 측면만으로는 제시될 수 없다. 따라서 과로사·과로자살의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근로조건에서 발생하는 노동의 질적인 측면의 문제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1) 너무도 긴 시간

현행 산재보험제도는 이미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유가족에게는 너무나도 가혹하고 어려운 과정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모든 입증 책임을 진 유가족들은 자료를 준비하느라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고, 그 후에는 산재 결과를 기다리느라 지쳐간다. 최종 판정까지의 시간이 길어지는 데에는 복잡하고 모호한 판정 절차를 원인으로 볼 수 있다. 

피해 노동자나 유가족들은 각각의 단계에서 어떤 이들이 어떻게 조사를 진행했는지, 어떤 자료를 가지고 산재승인 여부를 결정했는지 알기 어렵다. 이처럼 복잡한 산재 절차로 인해 최종 판단에 대한 책임도 모호해진다. 그러나 산재승인이 되고 나서도 유가족들은 불안하다. 일례로 사측은 근로복지공단의 산재 인정 처분을 취소해달라는 심사청구를 제기할 수 있다. 과연 공단의 결정에 반하는 사항에 대해 사측이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합당한가? 라는 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2) 슬픔의 지표

사회를 진단하는 지표는 많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과로죽음 피해유가족들이 겪는 경제적·정신적 피해를 반영한 데이터나 과로죽음에 대한 구체적인 데이터(산재 신청건수, 산재 승인건수, 불승인건수, 상담 건수 등)는 부재하다. 물론 유가족들의 고통이나 슬픔을 지표화하는 것은 쉽진 않다. 하지만 유가족들에 대한 심적 고통, 및 이들이 겪는 문제들에 대해 구체적인 지표를 마련하는 것은 이들을 지원하고, 산업재해보상보험제도의 불합리한 점들을 파악하는 데 있어 중요한 이정표로 작동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가족의 과로죽음은 남겨진 이들에게 정신적 고통과 경제적 어려움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정신적 충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속적인 심리상담 제공이나 산재준비에 대한 도움이나 정보를 받을 만한 정부 기관은 없다. 오로지 남겨진 가족 스스로가 전부 견뎌내야 할 몫일 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가족들은 고인을 애도하거나 자신의 마음을 치유하는 것으로부터 멀어져 간다.

(3) 감수성의 부재

일본은 과로자살을 파악하는 데 있어 단일요인보다는 다요인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한국의 경찰변사조사서식을 보면 이러한 부분이 배제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과로죽음에 대한 경찰조사 과정은 사건의 본질을 파헤치려는 노력보다는 종결하는 데에만 집중되어 있고, 고용불안이나 근로조건에서의 문제점에 대한 질문은 간과하는 경우가 있어 초기 수사에서 총체적인 조사가 요구된다. 

한편으로 경찰서는 과로죽음 사건이 발생한 후 유가족들이 처음 맞닥뜨리는 장소이기도 하다. 유가족들은 혼란스러운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 상태에서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무엇부터 준비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그렇기 때문에 조사관의 태도가 중요하고, 경찰관들을 대상으로 과로죽음에 대한 감수성을 높이는 교육이 필요하다.

(4) 과로죽음 예방을 위한 교육

전통적으로 업무환경과 근로자의 건강은 물리적 작업환경과 근로자의 신체적 건강 증진에 초점을 맞춰왔고, 근로자의 정신건강이나 사회적인 측면의 작업환경에는 소흘한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업무환경은 물리적인 작업환경뿐만 아니라 사회적 관계, 직업과 일의 형태 등 다양한 원인을 포함한다. 특히 일의 종류와 형태가 빠르게 변하는 현대사회에서 근로자의 업무환경은 신체적·정신적 건강에 더욱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따라서 근로자의 건강은 이러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된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직장내에서 정신건강 증진을 위한 프로그램이나 교육은 활성화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정신건강에 대한 치료나 교육에 대해 불편한 시각들도 여전하다. 그러나 건강한 환경에서 일할 권리는 인류보편의 권리로써 반드시 실행되야 할 원칙이다. 그런 의미에서 국가, 기업, 학교가 함께 과로사 예방의 중요성에 대한 교육 및 홍보 활동을 시행하고, 과로죽음에 대한 사회구조적 문제를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노력이 필요하다.

펜을 집어 든 이유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해보지 않고,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압박감에 시달려보지 않고, 오전부터 시작한 일을 책상 앞에 잡고 앉아서 15시간째 자리에서 벗어나 보지 않고, "개인의 죽음은 자신의 과오지, 그 사람의 죽음이 사회적 책임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느냐", "스스로가 부족했기 때문에 죽음을 선택한 것을 왜 사회적 책임으로 돌리느냐" 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현실은 더 비극적이다'라고 항변이라도 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고민 끝에 펜을 들었다.

물론 잊고 싶은 기억을 글로 써내려간다는 것이 썩 달가운 일은 아니었다. 역시나 고통의 순간을 글로 적어 나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근로자의 과로죽음과 관련해 함구하는 것 대신 드러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그랬다. "그냥 조용히 있으면 아무도 모를 텐데 왜 굳이 알리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 사람들은 비극적인 일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나 또한 그 점을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전혀 없던 기억처럼 조용히 살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일을 한다는 것이 더 이상 행복하지 않고, 자본가의 착취 도구로써 간주되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물론 모든 근로자에게 해당하는 말은 아닐 수도 있겠지만,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나 스스로도 조금 더 행복하고, 건강한 환경에서 일할 권리를 찾고 싶었다. 고민 끝에 함께 책을 써나가기로 했다. 혼자였다면 결코 완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아닌 우리 모두가 함께 했기에 <그리고 우리가 남았다>가 나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문득 유가족 모임에서 들었던 한 분의 말이 떠오른다. "더 많은 산재피해자나 유가족들이 산재신청을 해야 하는 이유는 스스로가 행하지 않고, 사회적 책임을 운운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기 때문이에요. 과로죽음에 대한 사회적 이슈와 관심이 제도적 변화로 이어지려면 산재신청을 피하지 말고, 시작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혼자만의 힘으로는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가 모였고, 그 어려운 시작을 앞으로 함께 하고자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한국과로사·과로자살 유가족모임의 배고은님이 작성하셨습니다.


태그:#과로사, #과로자살, #그리고우리가남았다, #한국과로사과로자살유가족모임
댓글1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는 모든 노동자의 건강하게 일할 권리와 안녕한 삶을 쟁취하기 위해 활동하는 단체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