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세시, 고공 크레인 위에서 바라본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100여일을 고공 크레인 위에서 홀로 싸우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의 이야기를 접했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올 가을에는 외롭다는 말을 아껴야겠다고요.

진짜 고독한 사람들은 쉽게 외롭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조용히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는 사람들은 쉽게 그 외로움을 투정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어딘가에 계시겠죠? 마치 고공크레인 위에 혼자 있는 것 같은 느낌, 이 세상에 겨우겨우 매달려 있는 것 같은 기분으로 지난 하루 버틴 분들 제 목소리 들리세요? 저 FM 영화음악의 정은임입니다."

 
 고 정은임 아나운서

고 정은임 아나운서 ⓒ MBC 웹진 언어운사

 
2003년 10월 21일, 8년 만에 '고향'인 MBC라디오 <FM 영화음악>에 복귀한 정은임 아나운서. 그는 복귀 두 번째 방송에서 닷새 전 한진중공업 85호 타워크레인에서 고공 농성을 벌이다 129일 만에 목숨을 끊은 고 김주익 전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을 추모했다.

고 김주익 위원장의 동료이자 훗날 한진중공업의 마지막 해고노동자인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이 전 세계에서도 유례없는 '309일' 간의 농성을 이어간 곳도 바로 그 부산 영도의 고공 크레인이었다.

소셜 미디어도, 팟캐스트도, 유튜브도 없던 시절. 당시 참여정부 대통령의 '귀족 노조' 발언이 논란이 됐고, 해당 발언은 보수언론의 논리에 기름을 붓는 꼴이 됐다. 그 와중에, 새벽 세시 라디오 방송을 진행하는 MBC 아나운서가 해고 노동자의 투쟁을 환기시켰다. 18년이 지난 지금 다시 돌아봐도, 아니 우리 방송사(史) 전체를 돌아봐도 찾아보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정은임의 연대, 김진숙의 투쟁

그로부터 한 달여 뒤, 정은임 아나운서는 방송 오프닝을 통해 재차 '고 김주익씨'를 길어 올렸다. 정 아나운서는 "노동자들과 함께 싸우던 사람이 대통령이 된 오늘, 많은 노동자들이 죽고 있는 현실의 아이러니를 어떻게 감당해야 할런지요"라는 애청자 사연을 읽어 내려간 뒤 이런 날선 멘트를 전했다. 1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정 아나운서의 당시 오프닝과 멘트가 회자될 수밖에 없는 연유는 충분했다.

"참 정말 아이러니컬하죠. 그들 옆에 섰던 대통령이 그들을 노동귀족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노동귀족이라고 지탄받는 대기업 한진중공업의 노조 지부장이었었죠. 고 김주익씨. 고 김주익씨가 남긴 지갑 한 번 볼까요.

파업으로 회사에 손실을 입혔다고 재산을 다 가압류 당하고요. 그에게 남은 돈은요. 세 아이들의 인라인스케이트도 사줄 수 없는 돈, 13만 5080원이었습니다. 어떤가요? 귀족다운가요?"


그로부터 1년 뒤인 2004년 8월, 정은임 아나운서는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등져 많은 애청자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이런 정 아나운서의 18년 전 오프닝 멘트가 소셜 미디어 상에서 다시금 회자됐다. '김주익의 친구' 김진숙 지도위원 덕분이었다.

"일자리를 최우선으로 지키겠다는 정권에서 대우버스, 한국게이츠, 이스타 노동자들은 왜 무더기로 잘렸으며 쌍차와 한진 노동자들은 왜 여전히 고용불안에 시달리는가. 박창수, 김주익을 변론했던 노동인권 변호사가 대통령인 나라에서 왜 아직도 노동자들은 굶고 해고되고 싸워야 하는가. 최강서의 빈소를 찾아와 미안하다고 말한 분이 대통령이 된 나라에서 왜 아직도 노동자들은 여전히 죽어가는가."

7일 청와대 앞에서 선 김 지도위원은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은 물론 "문재인 대통령님 내가 보이십니까"라며 문 대통령의 노동인권 변호사 시절을 소환하고 있었다. 김 지도위원은 작년 12월 30일 부산을 출발, '희망 뚜벅이 행진'을 이어온 지 34일 만에 청와대에 도착했다. 암 투병 와중에 항암치료를 제쳐둔 채 명예복직 투쟁에 나선 길이었다.

김 지도위원이 김주익 전 노조위원장과 함께 소환한 박창수 전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은 1991년 장안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당한 뒤 서울구치소에 수감됐다가 의문사를 당했고, 최강서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는 2012년 12월 사측의 손배소송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바 있다. 물론 이날 김 지도위원이 호출한 이들은 한진중공업 노동자들 뿐만이 아니었다.

달라진 풍경, 변치 않은 아이러니
 
 복직과 명예회복을 촉구하며 지난해 12월 30일 부산에서 도보행진을 시작한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인 민주노총 김진숙 지도위원이 7일 오후 청와대앞에 도착한 뒤 기자회견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복직과 명예회복을 촉구하며 지난해 12월 30일 부산에서 도보행진을 시작한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인 민주노총 김진숙 지도위원이 7일 오후 청와대앞에 도착한 뒤 기자회견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 권우성

 
"민주주의는 어디로 갔는가. 전태일이 풀빵을 사주었던 여공들은 어디서 굳은살 배긴 손으로 침침한 눈을 비비며 아직도 미싱을 돌리고 있는가. 아니면 LG트윈타워 똥물 튄 변기를 빛나게 닦다가 잘렸는가. 아니면 인천공항의 대걸레만도 못한 하청에 하청노동자로 살다가 잘린 김계월이 됐는가.

그도 아니면 20년째 최저임금 코레일 네트웍스의 해고자가 되어 서울역 찬바닥에 앉아 김밥을 먹는가. 노동존중 사회에서 차헌호는, 김수억은, 변주현은 왜 아직도 비정규직인가. 왜 청년들은 비정규직으로 차별과 멸시부터 배워야 하며 페미니스트 정권에서 왜 여성들은 가장 먼저 잘리며 가장 많이 죽어가는가."


김계월씨는 아시아나케이오지부 해고노동자다. 또 차헌호씨는 금속노조 아사히글라스 비정규직 지회장, 김수억씨는 기아자동차 비정규직 노조 지회장, 변주현씨는 현대중공업 하청업체 노동자다. 이날 김 지도위원이 호명한 이들은 비단 해고 노동자들 뿐만이 아니었다.

"김용균, 김태규, 정순규, 이한빛, 김동준, 홍수연은 왜 오늘도 죽어가는가. 세월호, 스텔라스테이지호는 왜 아직도 가라앉아 있으며 유가족들이 언제까지 싸워야 하는가. 이주노동자들은 왜 비닐하우스에서 살다 얼어 죽어야 하는가. 왜 문정현 신부님은 백기완 선생님은 박정희 정권에서 시작한 싸움을 아직도 멈추지 못하는가."

갖가지 노동 현장에서 안타깝게 숨을 거둔 이들은 물론이요, 한국사회가 '타살'에 이르게 한 아이들과 어른들, 그리고 이주노동자들이 호명됐고, 또 한국사회와 여전히 싸우는 이들을 불러냈다.

전두환 정권에서 해고됐고, 36년째 해고자이자 36년간 유령이었던, "자본에게 권력에게만 보이지 않는 유령"이었다던 김 지도위원 본인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지난해 10월 전태일 70주기 추모 주간 당시 문재인 대통령에게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알리는 동시에 자신의 명예복직을 촉구하는 편지를 썼던 김 지도위원은 이날도 역시 문 대통령을 소환하고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님 내가 보이십니까. 함께 싸워왔던 당신이 촛불의 힘으로 대통령이 된 후에도 여전히 해고자인 내가 보이십니까. 보자기 덮어쓴 채 끌려가 온몸이 떡이 되도록 맞고 그 상처를 몸에 사슬처럼 지닌 채 36년을 살아온 내가 보이십니까. 그 대답을 듣고 싶어 34일을 걸어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 약속들이 왜 지켜지지 않는지 묻고 싶어 한발 한발 천리길을 걸어 여기까지 왔습니다."

18년 전 '고 김주익씨'를, '고공 크레인 속 노동자'를 호명했던 정은임 아나운서. 그로부터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김주익의 동지'였던 김 지도위원은 여전히 자신을 유령이라 칭하며 400km 길을 걸었다. 김 지도위원의 복직을 촉구하는 이들은 짧게는 10일, 길게는 48일 간 단식을 이어갔다.

18년 전에도, 지금도 노동인권 변호사 출신 대통령이 집권 중이다. "참 정말 아이러니컬하죠"란 정은임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지 않은가.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이러한 아이러니컬한 상황을 지상파 방송사 및 종편이 외면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날 지상파 3사와 JTBC는 메인뉴스를 통해 청와대 앞에 당도한 김 지도위원의 일성을 전국에 내보냈다.

과거보단 노동자의 사망사건이 언론을 통해 더 크게 조명되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고 김용균씨의 사망 이후 방송사들이 좀 더 각성한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4일 MBC VR 휴먼다큐 <너를 만났다 시즌2>는 '용균이를 만났다' 편을 통해 고 김용균씨가 사망했던 당시 노동 현장을 VR 기술로 생생히 재구성하기도 했다. 

정은임 아나운서가 라디오 오프닝 멘트를 통해 노동자들과 연대했던 18년 전과 빅해 분명 진일보한 풍경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달라진 풍경만큼이나 아이러니컬한 상황이 변했는지는 의문이다. 그랬다면 '김주익의 동지'인 김 지도위원이 청와대 앞에 서는 일도 없었을 테다. 

"지난 하루 버틴 분들 제 목소리 들리세요?"라며 연대의 제스처를 보냈던 정은임 아나운서가 만약 18년 후의 달라진 풍경을 접할 수 있었다면 과연 또 어떤 오프닝 멘트를 전했을까. 
정은임 김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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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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