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기사수정: 10일 오후 7시 1분]

부산경마공원에서 7번의 자살이 이어졌다. 7번이나 반복된 자살 사건도 놀랍지만 더욱 놀라운 점은 죽음을 통해 '이곳의 문제'를 '밖으로 알리 려는' 몸부림이 강렬한 흔적으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이제는 고통도 없고 편히 숨쉴 곳엘 가기 위해', '경마장은 참 많은 것들을 잃게 만드는구나.... 내 자존심 또한 남아나질 않게 밑바닥으로 떨어뜨리고 떨어뜨린다... 도대체 부산에서 몇 번 의 자살 시도냐... 경마장은 내 기준으로는 사람 이 지낼 곳이 못 되는구나', '한 달에 많이 서면 12번의 당직을 섭니다. 이게 어찌 사람 사는 일 입니까... 이제 조금은 쉬어야겠네요. 극단적인 생각을 하지 않으려 많은 노력을 했는데, 너무 많이 힘들어 이제는 내려 놓으려고요. 너무나 많은 과중한 업무 스트레스 정말 제가 정신병자가 되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예요... 이제는 그런 쳇바 퀴에서 벗어나려 합니다'

이와 같이 기수, 말관리사들 의 유서는 이미 다단계 위계 구조의 모순과 경쟁 장치의 폭력성을 여러 방식으로 문제 제기하고 있었다. 

유서의 메시지는 문제 지향적이었고 타자지향적(탄원형)이었다. 자살을 일종의 의사소통 과정으로 읽은 <자살, 차악의 선택>01의 저자 박형민의 논의를 참조하면, 일곱 번의 자살은 (무엇으로부터의) 탈출을 위한 실천이자 (무엇에 대한) 분노의 신호로 저항적인 의사소통의 하나였던 것이다.   
반복되는 노동자 자살, 개인적 문제로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문제로써 다뤄져야 한다.
 반복되는 노동자 자살, 개인적 문제로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문제로써 다뤄져야 한다.
ⓒ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관련사진보기


 
노동자 자살을 '정치화'하기 

<죽음의 스펙터클>02의 저자 프랑코 베라르디는 노동과 자살이 결합되는 양상은 신자유주의 시대 에 두드러지는 문제라고 지적한다. 매일 같이 서로 간에 전쟁을 벌이도록 하는 경쟁 구조는 극도의 스트레스를 유발하고 무기력, 절망감과 같이 정서를 사막화하는 등 노동자들의 삶을 한없이 나락으로 내몬다고 한다. 모욕감과 비참함을 강화하는 일터에서는 자살이라는 죽음의 행렬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쌔끈한' 경쟁 이데올로기들이 사실은 폭력과 모욕을 그럴싸하게 합리화하는 수단일 뿐이라고 일갈한다. 

동시에 노동자 자살은 오래된 모순이 관통하는 지점으로 발전국가 이후 고착된 제도 지체, 정상화된 장시간 노동, 권위주의적 조직문화, 취약한 노동권 등의 역사적 병폐들이 중첩되면서 발생하는 비극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대한민국 노동자의 자살은 오래된 구조적 병폐들이 관통하는 동시에 신자유주의 이후 경쟁 장치들이 덧대져 발생하는 결과다. 

노동자 자살은 이렇게 발전주의의 잔재와 신자유주의의 현재가 교차하는 어느 곳에서나 되풀이 될 수 있는 일반화된 구조적 위험으로 읽혀야 한다. 그럼에도 노동자 자살을 '나약한' 개인의 특수한 문제인 양, 타자화하는 통념들이 난무한다. 이는 많은 노동자 자살 사건에서 사측이 보이는 공통적인 첫 번째 반응이자 의외로 강력한 프레임이기도 하다. 심지어는 자기 관리의 실패로 연결 짓기도 하는데, 노동자 자살에 대한 해석이 '자기 관리' 담론의 언저리를 맴돌고 있는 꼴이다.

이런 식의 통념은 노동자 자살을 개인적인 이유나 예외적인 일로 환원하는 자본 친화적인 언어들에서 전형적으로 발견된다. 자본의 언어와 꽤 닮아 있는 일상 통념들은 노동자 자살이 역사적이고 구조적인 착취적 생산관계에 따른 산물임을 은폐 하는데 복무 하게 된다. 자살 사건 그 자체의 정치성을 개인적이고 예외적인 일탈로 탈정치화 하려는 자본의 시선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파고들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노동환경을 비추는 렌즈로서의 반복 자살 

노동자 자살을 개인 문제로 환원해 업무와의 연관성을 끊어 내려는 자본의 프레임에 대항하는 '한시적인' 방법론으로 자살의 반복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반복 자살을 통해 대한민국 노동자들이 얼마나 어떻게 막 취급되고 있는지에 대한 증거로써 읽을 수 있을 것이고 개인 문제로 협애화하는 통념들이 얼마나 조약한 이데올로기에 불과한지를 확인할 수 있다.
 
반복 사례는 큰 관심을 들이지 않더라도 여러 형태로 발견된다. 앞서 언급한 마사회 말관리사·기수의 자살부터 IT노동자, 방송노동자, 우편집배원, 사회복지공무원, 도시철도 기관사, 항공 승무원, 간호사를 포함한 병원노동자, 현장실습생, 증권노동자, 이주노동자들의 자살까지.
 
일터의 은어는 노동의 상태를 경험적으로 파악 할 수 있는 렌즈라고 볼 수 있는데, 노동의 고통을 표상하는 언어들은 반복 사건의 현장 속에서 주로 발견된다. 간호노동자의 '태움', 방송노동자의 '디졸브', 사회복지공무원의 '깔때기 현상', 우편집배원의 '겸배', 화물운송노동자의 '따당', 근로기준법 59조 사업장 노동자들의 '노동자 무제한 이용권', 게임노동자를 포함한 IT노동자의 '크런치모드', '구로의 등대', "갈아 넣다", 서비스 물류노동자의 '클로프닝' 등이 그러하다. 은어들에 나타난 업무 프로세스나 관행, 노동자 태도나 인식은 상당히 자조적이고 냉소적이다. 또한 자유와 권한을 잃은 상태, 고갈된 느낌, 무력감, 불만족, 관계 철회, 심신의 회복력 저하 등의 소외 상태를 내포하고 있다.
 
반복 사건들에서 보여지는 노동자 자살의 공통 원인을 추려보면, 과도한 업무량, 빠듯한 인력, 권위주의적인 조직 체계, 자존감을 갉아먹는 직장 괴롭힘, 버틸 것을 무한정 요구하는 감내 문화, 느슨한 관리감독, 솜방망이 처벌, 위계적인 기업 관계, 취약한 노동권리, 과도한 경쟁 장치, 반인권적인 실적 압박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두 세개의 원인들이 얽히면서 노동자의 자존감, 희망, 존엄을 극한까지 파괴하는 지점에서 자살은 발생한다. 문제적인 원인들이 중첩되면서 야기하는 고통은 필연적이고 구조적인 비극을 유발하는 것 이다. 예외적이거나 우연적인 비극이 아니란 얘기다. 지금까지의 반복된 자살 사례에서 어렵지 않게 확인되는 바다. 

과로 사회에 남겨진 자들의 몫 

야만의 상태에서도 노동자들은 '조금만 더 버틸 것'을 요구하는 주문을 받는다. 사회적으로도 그렇고 일상적으로 그렇다. '52시간으로 근로시간을 줄인 것은 아직 과도하다'며 '대한민국도 좀 더 일해야 한다', '100시간 일하고 싶은 사람은 100시간 동안 일할 자유가 주어져야 하는데 그럴 자유를 빼앗는 것에 강력히 반대한다'는 설교들이 대표적이다. 한편 '원래 그래, 관행이야' '옛날에는 말이야 더하면 더 했어' '이 정도도 못 버티면 어디서 뭘 할 수 있겠어' '유리멘탈이다' 등은 일상 차원에서 반복되는 감내의 언어들이다. 이는 과로+경쟁 체제에 복무케 하는 효과를 낳고 노동자의 삶을 질식시키고 만다. 

'도대체 얼마나 버티고 참아야' '얼마나 더 감내 의 한계치를 끌어올려야' 한단 말인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감내를 주문하면서 과로 체제와 경쟁 시스템을 재생산하려는 자본의 어법이 새로운 화법은 아니더라도 여전한 힘으로 작용함을 주지하고 '더 이상 이대로 내버려 둬서는 안된다'는 파국적 상상력을 발휘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노동자 자살은 일터에서의 인간적 삶이 불가능한 비상상태를 보여주는 행위이자 '더 이상 이렇게는 취급당하지 않겠다'는 비극적 저항의 표식이다. 남은 자들의 몫은 '살아가는' 삶이 아닌 '죽어가는' 삶으로 우리네 삶을 내모는 비참의 상태 에 대해 망자들이 알리려 했던 그 목소리의 결을 '제대로' 읽어내는 것이지 싶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회원이자 노동시간센터 연구위원인 김영선님이 작성하셨습니다. 또한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잡지 <일터> 2월호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태그:#노동자자살, #일터, #과로사회,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경쟁이데올로기
댓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는 모든 노동자의 건강하게 일할 권리와 안녕한 삶을 쟁취하기 위해 활동하는 단체입니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다시, 야간노동이 문제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