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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토로'하면 무한도전에 나온 적이 있는 마을. 그게 내가 아는 전부였다. 마침 일본에 있는 동안 마당극을 한다기에 가보았다. 오사카와 교토 사이에 있는 우토로 마을은 오사카에서 전철로 약 1시간 정도 걸린다. 우토로 마을이 있는 '이세다역'에 도착하니 번잡했던 오사카와 다른 한적한 분위기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우토로 동포생활센터 '에루화' 앞에서 진행된 마당극은 대부분 일본어로 진행되어서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일본에 사는 한국인들의 얘기이자, 우토로 마을이 배경이 된 내용이라서 더 알아보고자 행사 다음날, 김수환 대표께 인터뷰를 청하였다. 

마을 회관격이라 할 수 있는 에루화 안에 들어서자 우토로에 관한 사진 및 예술 작품들이 벽 주위에 가득하였다. 대표님은 편한 복장으로 만난 어제와 다르게 정장 차림으로 맞이해주었다.

 
예전 사진 자료들을 보여주며 설명해주는 김수환 대표 / 머리띠를 하고 투쟁했던 우토로 마을 사람들의 사진이 보인다.
 예전 사진 자료들을 보여주며 설명해주는 김수환 대표 / 머리띠를 하고 투쟁했던 우토로 마을 사람들의 사진이 보인다.
ⓒ Ryan Slav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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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금연휴인데 어디 안 가세요?
"일왕(천황을 낮추어 부를 때)이 거의 30년 만에 바뀌는 날이 5월 1일. 일본인들은 4월 26일 금요일부터 파티를 시작해서 5월 6일까지 쉰다. 일본도 5월 5일이 한국처럼 어린이날이고, 6일도 대체휴일이다. 그러나 (에루화에서 일하는) 우리는 일왕과 상관이 없기 때문에 5월 2일부터 쉰다. (우리 말고도) 민족단체나 평화시민단체들은 일왕이 죽은 날, 생일 날 등등 일왕과 관련된 휴일에는 거의 안 쉰다. 우리는 기념 안하니까. 우리의 고집인 것 같기도 하고…."

가볍게 던진 첫 질문이 무색하리만치 묵직한 답변이었다. 우토로 마을과 에루화, 그리고 대표님의 정체성을 느끼게 되었다고나 할까. 점점 더 궁금함이 일었다. 질문할게 많았지만 우선 어제 본 마당극에 대해서 먼저 물어보았다. 

-어제 진행된 행사 소개 좀 해주세요
"'우토로 가족의 마을' 다큐 상영을 먼저 하고, 마당극(제목: 우토로)을 했다. 영화는 촬영 시기가 우토로 재판에서 주민들이 완전 패소를 해서 강제퇴거명령 후에 만들어졌기에 좀 절망적인 시기였다. 마을 현황을 세계에 알리고자 일본인 감독이 제작하였는데 우토로에 사는 한 분을 통해 우토로에서 벌어진 실상을 담은 다큐였다. 다큐에 나온 인물들 중에 나이가 들어 돌아가신 분들이 많다. 그분들과의 추억을 되새기고자 상영회를 했다. 지금은 우토로 땅도 좀 매입해서 공용주택도 건설되어 새 살림터를 마련했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많은 어려움을 이겨내야 했다. 우토로의 역사 되어버린 그 시간을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다. 

조총련 산하단체인 동포생활센터는 전국에 100개가 넘는다. 동포들의 생활상담도 하고, 커뮤니티 위한 행사를 기획하거나 한글 교실을 운영한다. 어제 행사는 우토로 마을에서 준비했는데 극단 대표가 학교 선배이다. 자주 우토로 찾아왔고, 우토로 관련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했는데 첫공연을 여기서 하게 되었다. 객관적으로 너무 좋았다."

- 어떤 부분이 좋았나요? 
"예를 들어 운동회 장면에서 밥 먹는 시간에 일본인들은 작은 도시락을 가져와서 먹을때 재일동포 가족은 그 옆에서 돼지잡고 막걸리를 마신다. 또 어른들이 애들한테 "운동회에서 만큼은 절대 일본인에게지지 마라. 여기에서조차 지면 항상 지는 인생이 된다"라고 하는 대사도 나도 어릴때 부모님께 들어본 말이었다. 재일동포들의 생활양식 잘 담아낸 연극이었다. "

그는 지금도 한국 어르신들은 이웃 자녀들에게 밥을 줄 때도 남달리 많이씩 준다며 예전부터 이웃지간에 대문도 열어놓고 다닐 정도로 공동체가 잘 되어 있었고, 가난한 사람이라도 항상 마을에서 돼지를 잡아 나눠 먹을때 함께 밥과 고기, 술을 나눠먹어서 굶지 않았다고 했다. 도둑이 없어 대문이 필요 없던 제주에 이웃에게 사람이 있고 없음을 알려주는 구실을 하는 정낭 문화가 생각이 났다.

통나무로 만들어진 정낭이 현관에 하나 올려져 있으면 잠깐 어디 나간것이고, 두 개면 집에 아이들만 있거나 잠시 밭일을 하러 나간 것. 세 개면 집에 사람이 없고, 먼 곳으로 나가 며칠 있어야 돌아옴을 뜻한다. 우세다 역에 도착했을때 제주도와 분위기가 비슷하다고 느꼈는데 이웃과 소통이 활발한 공동체 문화가 짙은 것도 비슷하였다. 


-지금 상황은 그때와 비교해서 어떤가요?
"우토로에서 쫓겨날 뻔한 동포들이 삶의 터를 확보해서 위기는 넘겼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전 같은 주택이 아닌 아파트라서 고립되었다는 느낌이 들 수 있다. 특히 어르신들은 이제까지 오랜 기간 (주택에서) 지내왔던 동선이 무너져서 어떻게 해야 커뮤니티를 계속 유지하며 상부상조하는 기능을 다시 잘 살릴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 우토로 동포들은 아파트를 얻고자 투쟁한 것은 아니다. 어르신들이 진짜로 원하는 게 뭔지, 왜 어려운 삶을 이어온 건지, 투쟁의 성과가 바로 뭐였는지 기록해서 계속 전해나갈 필요성이 있다. 앞으로 우토로 마을 역사 기념관을 건립도 할 예정인데 그 사업도 해나갈 것이다.

우토로 동포들이 투쟁했던 이유는 살고 있었던 우토로에서 계속 살고싶다는 그 한가지였다. 우토로에서 나가도 살수는 있다. 오히려 다른 곳에서 사는 게 (일본 정부로부터의 일본 주민들과의) 차별도 안 받고 (수도 및 전기 공급 등)열악한 상황 벗어날 수도 있고, 생활면에서는 더 좋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걸 택하지 않았다. 왜 평생 살아온 마을을 떠나야 하는지 그 물음에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나가라고 해서 나가는 건) 사람으로서 살아야할 존재의 이유를 포기해야하는 것이라고나 할까? 투쟁했던 어르신들이 "우리가 떠나면 (우토로 마을을 일군)부모님들의 고생, 역사 사라진다"는 그런 말들을 자주하셨다. "

이쯤에서 일본에서 태어나서도 한국말을 잘하는 그가 궁금해졌다. 그전에도 우토로 이슈에 관여했지만 에루화에 근무한지는 9년이 된 김수환 대표. 그의 할머니, 할아버지는 생활이 어려워서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왔다. 그의 부모님도 일본에서 태어났으니 그는 조선인 3세다. 

우토로와 조선 동포들의 생활 얘기를 담은 마당극, 뒤에 보이는 소녀들 사진은 조선학교의 전신으로 1946년 해방되면서 우리말을 배우기 시작했던 소녀들 사진이다
 우토로와 조선 동포들의 생활 얘기를 담은 마당극, 뒤에 보이는 소녀들 사진은 조선학교의 전신으로 1946년 해방되면서 우리말을 배우기 시작했던 소녀들 사진이다
ⓒ 수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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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치부 3년,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 고등학교 3년, 대학 4년. 처음부터 조선학교에만 다녔다. 내가 택한 건 아니었다. 일본학교를 나온 아버지는 내가 조선학교에 가는 것을 엄청 반대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강하게 밀어 부쳤다. 그 당시는 여자가 남자 앞에서 말대꾸 못했던 그런 분위기였는데 어머니가 학교만큼은 조선학교에 다녀야 한다고 고집하셨다. 어머닌 초등학교는 일본학교를 다녔는데 이지메(왕따)를 당했다. 그러나 중학교를 조선학교로 갔는데 마음이 너무 좋았다고 하셨다. 아버지도 결국 내가 조선학교 다니면서 한국 동포들과의 커뮤니티가 형성되는 걸 보고 너무 좋아하셨다. 

내가 다녔던 학교는 없어지고 현재 교토에 있는 조선학교는 초등학교 2개, 중고등학교 합쳐서 1개가 있다. 조선대학은 도쿄에 있는데 일본대학은 들어가기 어렵기도 하고, 가고 싶지도 않았다. 조선대학에 가니까 너무 좋았다. 유일한 동포대학. 전국에 있던 동포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다. 지금도 전국에 친구들이 많이 있다. 대학에서 역사를 더 자세히 배울 수 있었고, 지금과 같은 활동을 하는 결정도 대학시기에 할 수 있었다."  

본인의 소개가 끝나자 마을에서 조선인 1세대 중 유일한 생존자인 강경남(95) 할머니에 대한 얘기를 해주었다. 

"강경남 할머니의 부모님은 한국에서 해방직후에 일본으로 왔다. 오사카에서 지내다가 공습이 너무 심해서 교토로 왔다가 당시 비행장 건설 때문에 조선인들이 많았던 마을인 우토로에 삶의 터를 잡으러 찾아왔다. 

한국에서는 강제징용이라는 말을 쓰는데 우토로에서는 적절한 용어는 아니다. 여기서 일한 사람들은 원래 일본에 있었던 조선인들이다. 우토로에서 1938년 비행장 일꾼들을 모집하기 전부터 1910년 식민지 때 부터 땅 뺏긴 조선인들이 많이 건너왔다. 일본인들이 한국에 와서 토지수탈, 쌀 공출 등을 시작하면서 민중들의 삶은 파탄되었고 비교적 경제적으로 안정된 일본으로 가자는 분위기였다. 식민지 군대화론도 사상적 기반이 되어 일본은 우리보다 훨씬 잘난 문명국 이라는 환상이 있었다. 

그러나 실상은 크게 달랐다. 조선인 이라는 이유만으로 인간 취급 못 받고, 일본인들처럼 일 할 수 있는 자리는 없었다. 그러다 1940년대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이 격화되면서 그때 조선인들은 강제 징용 대상이 되었다. 일본인들도 돌아올수 없었던 징병. 군사시설에서 일을하면 전쟁터에 나가지 않아도 된다해서 우토로에 많이 몰리기도 했다."

-앞으로 우토로 마을의 계획은 무엇인지?
"식민지와 전쟁체제에서 이런 일을 해야만 했던 배경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는 우토로 문제에 대해 일본인의 잘못으로만 지적하는 것은 아니다. 일제강점기와 전쟁 때문에 선택의 여지없이 일본으로 오고, 우토로에 모여야했던 현실. 일본인들의 죄가 크지만 강제징용이 가장 큰 문제는 아니다. 종합적으로 봐야한다. 우리는 우토로 마을을 통해서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염원할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 만들 기념관 이름도 '평화기념관'이 될 것이다. 우리 목표로는 2021년에 완공이다. "

식민지'라는 모호한 대상으로부터 나라를 떠나야 했던 사람들이 모여들어 비행기 부품 공장을 다니며 서로 이웃사촌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정착에 대한 안심도 잠시 한국전쟁이 시기였던 1951년 9월 미국과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체결하며 동맹 관계가 되었고, 미국의 승인 하에 우토로 마을의 항공공업 사장은 무죄로 석방되었고, '일국공업'으로 이름을 바꾼 뒤 미군용 자동차와 트럭을 생산해 한국전쟁으로 큰돈을 벌었다.

우토로 주민들은 전후 일본에 대한 책임을 물으며 토지보상을 요구했지만 오히려 일국공업은 "계속 우토로에서 살거면 돈을 내라"고 했다. 그러다 1962년 일국공업은 닛산과 합병됐고, 토지소유권은 닛산자동차로 넘어갔다. 이때부터 마을 사람들은 본격적인 투사가 되어 마을을 지키기 위한 투쟁을 하게 되었다. 땅의 소유주가 여러 번 바뀌는 동안 이들은 나이를 먹었고, 조선인 1세대로 생존해 계신 분이 강경남 할머니이다. 평생을 질곡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사셨을 산 증인. 2015년 방송을 통해 유재석씨가 "너무 늦게와서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며 오열을 했던 이유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과거 비행장 및 조종사 양성 학교가 있었던 자리에는 자위대가 들어서있다고 했다. 우토로 마을과 우지시(市를) 더 둘러보기 위해 에루화를 나섰다

태그:#우토로, #김수환, #재일동포, #교토, #우리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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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세계사가 나의 삶에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일임을 깨닫고 몸으로 시대를 느끼고, 기억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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