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발발하면 으레 포로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한국전쟁 발발 초기 공산군 측 포로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1950년 9월 15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인민군의 사기가 극도로 떨어지자 포로가 부쩍 늘어났다. 1950년 9월 하순부터 10월 중순 사이에는 집단으로 투항하는 등, 하루에도 수천 명이 넘는 인민군 포로가 발생하기도 했다.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 유엔군 측 포로가 1만여 명인데 견줘 공산군 측 포로는 13만여 명이었다. 이번 [박도 기자의 사진 근현대사] 43회에서는 공산군 측 포로 사진들로 꾸며 봤다. 이어서 44회에서는 유엔군 측 포로 사진으로 기사를 꾸밀 예정이다.- 기자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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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 부산포로수용소에 입소한 포로들이 가장 먼저 지문을 등록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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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 8. 유엔군 군의관이 부상당한 북한군 포로에게 응급치료를 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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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 8. 부산, 포로수용소 막사 안에서 식사하는 포로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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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 8. 28. 임시 포로수용소 막사에서 포로들이 담배껍질로 만든 카드로 담배내기 게임을 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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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 9. 부산, 임시포로수용소에서 포로들에게 배식을 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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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 10. 30. 대전, 유엔군 포로 심문관이 북한군 포로들의 인적사항을 기록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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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 12. 15. 함흥, 추위에 잔뜩 움츠린 중국군 포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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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1. 3. 9. 유엔군 측 감시병이 이를 박멸하고자 포로들에게 DDT를 뿌려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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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1. 5. 29. 가장 나이 어린 13세의 중국군 포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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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2. 7.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들이 신발을 수선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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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여기에 수록된 사진 이미지들은 눈빛출판사에서 발간한 박도 엮음 <한국전쟁 ‧ Ⅱ>에 수록돼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