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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안성시 죽산면의 칠장사에서 찍은 궁예 상상화.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의 칠장사에서 찍은 궁예 상상화.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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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미륵 부처로 신격화하며 공포 정치를 펼쳤던 후고구려 궁예. 귀가 어두운 사람한테는 '미르 부처'로 들릴 수도 있는 '미륵 부처'를 자처하며 무시무시한 폭압 정치를 자행했던 그는, 결국 쿠데타와 폐위를 당하는 것으로 정치 인생을 마감했다.

<고려사> 왕건 편(정식 명칭은 '태조 세가')에 따르면, 그날은 918년 7월 26일이었다. <고려사>에 기록된 음력 날짜는 6월 16일이었다. 궁예는 궁궐 정문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화들짝 놀랐다. 쿠데타군이 내는 소리였던 것이다.

<삼국사기> 궁예 열전에 따르면, 왕건이 이끄는 쿠데타군 본진의 수는 헤아릴 수도 없이 많았다. 궁궐 정문에 미리 모여 북을 두들기며 본진을 기다리는 병력만도 1만 명을 넘었다. 궁궐 정문 앞 광장에서 '확성기'를 틀고 '사전 집회'를 하는 '참석자'만도 1만을 넘었던 것이다.

<고려사>에 따르면, 궁 밖에서 '확성기' 소음이 들려오자 궁예는 "내 일이 다 글렀구나"라는 탄식을 내뱉었다. 그때 궁예 옆에 있다가 왕건 쪽으로 투항한 궁녀들이 그것을 증언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궁예의 탄식이 기록으로 남았을 것이다.

탄식을 내뱉은 궁예는 잠시 어쩔 줄 몰라했다. 그러더니 무언가를 결심한 듯, 왕의 공식 의복을 벗어던졌다. 그러고는 다른 옷으로 갈아입었다. 도주를 선택한 것이다. 그는 궁궐 북문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러자 궁녀들, 아니 '청와대 여성 직원들'은 처소를 깨끗이 청소하고 새로운 왕을 맞이했다.

당시 후고구려 도읍은 지금의 강원도 철원군에 있었다. 궁예는 지금의 철원군이나 평강군 쪽의 어느 산속에 몸을 숨겼다. 평강군은 철원군 바로 위쪽으로 지금은 휴전선 이북이다.

궁예는 산속에서 이틀 밤을 새웠다. 7월이었으니, 한밤중에도 견딜 만은 했을 것이다. 하지만 배는 무척 고팠다. 그래서 배고픈 무장공비마냥 들판으로 내려왔다. 그러고는 들판에서 보리 이삭을 확보했다. 평소에는 입에 대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 것을 허겁지겁 입속으로 밀어 넣었다.

낯선 사람의 이 같은 행동은 인근 백성들한테 이상하게 비쳐졌다. 결국 궁예는 그곳 백성한테 붙들려 살해를 당했다. 보리 이삭을 훔쳐 먹다 죽임을 당했으니, 임금의 최후치고는 너무도 비참하고도 불명예스러운 것이었다.

보리 이삭 훔쳐 먹다 죽임 당한 궁예... 온갖 수모 겪은 충혜왕

조선 연산군 뺨치는 패륜과 성적 문란에다가 폭정으로 민심이반까지 초래한 고려 충혜왕. 그 죄로 그는 1343년 겨울, 몽골 사신에게 연행되어 북쪽으로 끌려갔다. 고려가 몽골의 간섭을 받는 중이었기에, 정치를 못하는 고려 군주는 몽골 황제에게 끌려가던 시대였다. 그래서 충혜왕도 그런 일을 당했다.

충혜왕은 대한민국 시대의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소추를 당한 날과 똑같은 12월 9일(음력 11월 22일)에 체포됐다. 그 날짜로 그의 직무는 정지됐다. 그런 상태로 그는 몽골 황제의 심판을 받으러 길을 떠나게 되었다.

이때부터 충혜왕은 온갖 수모를 당했다. 사신들에 둘러싸여 말에 올라탄 그는 조금만 천천히 가자면서 시간을 끌었다. 최종 심판 전까지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볼 요량이었던 것이다. 그러자 사신은 칼을 빼들고 위협을 가했다. 사신은 빨리빨리 데려가야 했던 것이다.

수모는 그 정도로 끝나지 않았다. 12월에 북쪽으로 끌려갔기 때문에, 이동 중에 꽤 추웠을 것이다. 그래서 지나가는 고을의 수령한테 이불 좀 달라고 요청했다. 충혜왕이 직접 그렇게 요청했다. 그랬더니 고을 수령은 야멸차게 거절했다. 너무 심하다고 생각한 몽골 사신이 수령을 때리고 이불을 빼앗아 주지 않았다면, 한겨울에 북쪽으로 이동하는 길이 한층 더 괴로웠을 것이다.

충혜왕에 대한 탄핵심판은 '인용'으로 끝났다. 몽골 황제는 귀양 명령을 내렸다. <고려사> 충혜왕 편(충혜왕 세가)에 따르면, 그 뒤 충혜왕은 천신만고를 겪으며 유배지까지 이동했다. 이때는 음력 1월이었다.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고생을 이기지 못한 그는 결국 유배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목숨을 잃었다. <고려사>에서는 독살설도 있었다고 말한다.

충혜왕이 죽었다는 소문이 전해지자, 고려 백성들은 대체로 환영하는 분위기를 보였다. "본국 사람들은 이 소식을 듣고 슬퍼하는 사람이 없었으며, 하층 백성들은 기뻐 날뛰면서 이제야 갱생의 날을 보게 되었다고까지 말했다"고 충혜왕 편은 전한다. 최후도 서글펐지만 그 최후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도 서글픈 가운데, 충혜왕의 육신은 흙과 함께 하나가 되어갔다.

서울시 종로구 와룡동의 창덕궁.
 서울시 종로구 와룡동의 창덕궁.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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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에 충혜왕이 있었다면 조선엔 내가 있다'고 할 정도로 패륜과 타락이 심했던 연산군. 1506년 그도 쿠데타를 당했다. 워낙에 폭정이 심했던지라, 쿠데타군은 수월하게 지지를 받았다. 폭정에 숨죽인 사람들이 쿠데타 움직임을 보고 한순간에 몰려든 결과였다.

궁궐 밖 사람들만 쿠데타군을 지지한 게 아니었다. 궁궐 안에서도 동일한 일이 벌어졌다. 쿠데타 당일, 연산군은 창덕궁에 있었다. 지금의 헌법재판소 입구 사거리에서 동쪽으로 300미터에 창덕궁이 있었다. 창덕궁 입구에 쿠데타군이 몰리고 이상한 기운이 궁궐 전역을 덮치자, 연산군을 지키던 내시들까지 주인 곁을 떠나버렸다. 연산군이 완전히 고립무원이 됐던 것이다.

한성부 좌윤(서울시 부시장) 출신 학자인 윤기헌(1548년 생)이 남긴 <장빈호찬>에 따르면, 쿠데타 소식을 접한 연산군은 당황한 나머지 활과 화살을 급히 찾았다. "활과 화살을 가져와!"라고 고함쳤다. 그래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겠지만, 그 순간 그는 그렇게라도 자리를 지킬 요량으로 활과 화살을 찾았다. 하지만 아무도 갖다 주는 이가 없었다. 다들 달아났기 때문이다.

사태를 역전시킬 수 없다는 판단이 들자, 연산군은 생각을 바꿨다. 쿠데타군을 설득해보기로 한 것이다. 혼자 하는 게 자신 없었던지, 왕비에게 "우리 함께 나가서 빌어봅시다"라고 말했다. 왕비는 "이렇게 된 마당에 빌어본들 뭐하겠습니까?"라며 "그냥 순순히 상황을 받아들이시지요"라고 말했다. 결국 연산군은 모든 것을 내려놓기로 결심했다.

왕들의 이야기를 담은 <국조보감>에 따르면, 잠시 뒤 승지(비서관)와 내시가 집무실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더니 "국새를 내주고 집무실을 비우시랍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연산군은 "내가 내 죄를 알지"라며, 국새를 내주고 순순히 집무실을 비워줬다. 그렇게 연산군은 임금 자리에서 내려갔다.

폭군의 위세를 부리며 살았던 연산군은 그렇게 한순간에 정권을 잃었다. 그러고는 강화도 왼쪽의 교동도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 약 2개월간 그렇게 살았다.

연산군은 유배지에서 폐위의 고통을 능가하는 질병에 시달렸다. 역질에 걸린 것이다. 물도 못 마시고 눈도 뜨지 못할 정도의 투병 생활을 겪어야 했다. 안 그래도 괴로운 판국에, 몸까지 그렇게 되고 말았다. 새로 임금 된 중종이 의료진을 급파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렇게 쓸쓸하게 연산군은 생을 마감했다. 독살됐을지 모른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에 있는 연산군 부부의 무덤.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에 있는 연산군 부부의 무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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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탄핵심판, #궁예, #충혜왕, #연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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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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