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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 한눈에

  • 180ha의 농지는 대부분 임야다. 1ha마다 1마리 정도의 소를 사육하는 게 EU 육우농장의 운영 원칙이자 사육규칙이다.
"180ha라고…고작 한 가족농, 세 식구가 54만평을 농사 짓는다고…."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물론 지도교수가 거짓말이나 과장을 할 리는 없지만 믿기 어려웠다. 일단 한 가족농이 감당하는 그 넓은 농장의 규모가 합리적으로 이해되지 않았다. 물론 옛 동독지역에는 몇 천ha 넘게 농사짓는 농가도 있다고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그건 사회주의국가 시절에 조성된 집단농장(협동농장)의 잔재이니 그런 것이고.

180ha의 농지를 농사짓는 가족농은 농가당 평균농지 면적이 1.5ha인 한국인으로서는 계산도, 이해도 되지 않는 비현실적인 규모가 아닌가. 그것도 부부와 아들, 겨우 셋이서 소도 키우고 햄도 가공하고 산장까지 관리한다니. 어쨌든 내 눈으로 직접 보기 전에는 믿기 어려운 규모라는 생각은 농장을 찾아가는 내내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농장에 도착하는 순간 의심과 불신은 바로 해소됐다. 광활한 초지와 울창한 임야가 눈에 가득 들어차 말문을 막아버린 것이다. 오스트리아 티롤의 오베른도르프(oberndorf)의 카이센호프(keissenhof) 농장은 이른바 친환경 육우농가로 유명하다.

앙커(anker), 마르가레테(margarete) 부부와 농업후계자인 아들이 함께 운영하는 전형적인 2대 가족농가(famillie anker)다. 이 집만 그런 게 아니다.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서는 아들이 자연스럽게, 당연히 농업을 가업으로 승계받는다. 아들이 없는 집은 딸이 후계농업인 자리를 잇는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10살 무렵부터 농부가 되려고 농업학교에 진학한다.

카이센호프 친환경육우농장의 농장주 앙커씨
▲ 앙커 농장주 카이센호프 친환경육우농장의 농장주 앙커씨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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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방목한 소를 자체도축·가공해서 직판하는

앙커 가족농은 가족끼리 하는 농업이지만 결코 주먹구구식이 아니다. 각자가 책임지고 있는 역할분담은 마치 기업농처럼 사무적이고 체계적이다. 농장주인 아버지 앙커씨는 육류 마이스터이다. 농장의 전체적인 관리와 경영을 책임지는 육우전문가로서 단연 농장의 최고경영자(CEO) 직책에 걸맞는다.

부인인 마르가레테씨는 공장장(CTO)과 판매·마케팅책임자(CMO)를 겸한다. 햄, 소시지 등을 가공해 부가가치와 수익률을 높이고 가공한 육가공품을 농장의 직매장에서 직판한다. 아들은 아버지를 도와 농장도 관리하고 뒷산의 고산 방목지에 자리잡은 산장 식당도 맡아 꾸리면서 농장주 후계자 수업을 받고 있다. 

180ha의 농지는 대부분 임야다. 1ha마다 1마리 정도의 소를 사육하는 게 EU 육우농장의 운영 원칙이자 사육규칙이다. 이 농가도 그 기준에 맞춰 약 150두의 육우를 사육하고 있다. 그중 90두는 고산지에서 '동물애호적'으로 방목한다. 고삐나 코뚜레를 하지 않은 상태로 자연에 마음껏 풀어놓는다. 공장에서 조제한 사료가 아니라 자연이 베푸는 온갖 산약초를 마음껏 섭취하고 성장한 소가 얼마나 건강할지 믿음이 간다.

직판 외에도 지역의 호텔, 식당 등에 납품할 정도로 카이센호프 농가의 육우는 경쟁력이 있다. 그 경쟁력의 원천은 육질이다. 자연에서 방목해 건강하게 자라는 수소를 거세하는 게 비결이다. 2년 6개월 동안 650kg까지 자라면 농가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도축장에서 도축한다. EU(유럽연합)의 도축장 기준에 따르면 농가에서 일정 시설과 기준만 갖추면 농가에서 도축할 수있다. 다만 매주 수의사의 검사와 확인을 받아야 한다. 수의사는 농가가 기준을 잘 지키고 있는지 철저히 검사한다.

오스트리아 티롤 오베른도르프의
카이센호프(keissenhof) 친환경육우농가 전경
▲ 카이센호프 농가 오스트리아 티롤 오베른도르프의 카이센호프(keissenhof) 친환경육우농가 전경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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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3차로 넘어가면 농부가 아닌 사업자 취급을

육가공은 1985년부터 시작했다. 수의사와 도축기술자의 지원을 받아 매주 돼지 10마리, 소는 1~2주마다 1마리를 가공한다. 돼지는 200마리 정도 키운다. 3개월 정도 잘 마른 참나무를 태워 연기를 쐬는 공을 들이는 명품 슬로우푸드다. 상업적인 가공회사에서는 기계로 며칠만에 훈제 육가공품을 제조하곤 한다. 제품의 가격도, 먹거리의 품격도 비교할 수 없다.  

20ha의 평야지대 초지에는 따로 옥수수를 재배한다. 소를 먹일 사료를 조달하기 위해서이다. 이로써 육우 사료는 거의 자급하는 셈이다. 겨울철에는 기름도 떼지 않는다. 50여만평의 고산지에서 자생하는 너도밤나무, 가문비나무를 우드칩 연료로 가공해 연료로 사용한다. 가정, 축사 등의 난방문제도 자체적으로 해결한다. 아들과 운영하는 고산지 방목장의 산장식당에는 트레킹 관광객들이 주로 찾는다. 여기에서도 고기와 육가공품을 직판한다. 

방목되는 소는 1마리 당 직불금 70유로를 받는다. 모두 150마리를 키우니 연간 10000유로의 직불금 소득이 따로 생긴다. 여기에 평야초지는 1ha당 600유로를 받으니 연간  12000유로의 소득이 추가된다. 직불금 말고 정부에서 오스트리아의 가족농에게 지원되는 보조금은 거의 없다. 1차 생산을 위한 시설투자로 축사 신축 정도만 지원되는 수준이다.

2차 가공사업, 3차 유통사업을 위한 시설보조금 지원은 전무하다. 지원은커녕 2차, 3차로 넘어가면 농업이 아닌 공업이나 상업으로 취급받는다. 그때부터 농부가 아닌 돈을 벌기 위한 목적의 사업자로 간주되는 것이다. 오히려 농부보다 훨씬 엄격하게 세금이 부과되는 불이익을 받을 뿐이다.

마르가레테씨가 운영하는 육가공품 직판장
▲ 카이센호프 농가 마르가레테씨가 운영하는 육가공품 직판장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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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도, UN도, 한국도 가족농이 농업을 책임진다 

이처럼 독일, 오스트리아 등 EU의 농업은 가족농이 주력이다. 농산물 수출 세계 2위인 EU 농업생산의 대부분을 가족농이 책임진다. 식량생산의 70%를 가족농이 감당한다. 세계식량농업기구(FAO)의 조사에 따르면 조사국 93개국 전체 농가의 80%가 가족농인 것으로 밝혀졌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3ha미만 가족농의 숫자는 105만호 정도로 전체 농가의 91% 가량을 점유한다.

2014년은 UN이 지정한 '가족농업의 해(International Year of Family Farming)'였다. UN도 가족농이 식량안보와 영양개선, 빈곤과 기아 극복, 환경과 생물다양성 보전, 지역경제 유지 등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인정한 것이다. 소규모로 가족들이, 가족노동을 주로 경영하고, 다양한 복합적 영농활동을 통해 전 지구적으로 '식량안보'와 '자연자원보호'를 선도하는 점을 가족농의 중요한 역할이자 가치로 평가하고 있다.

기업농을 중시하는 한국 정부도 가족농 육성정책이 없는 게 아니다. "가족농을 육성하기 위해 전업농을 중심으로 규모 확대를 촉진하고, 젊은 후계 가족농을 양성하며, 규모화나 전문화가 어려운 가족농은 협동화를 유도하겠다"는 입장을 이미 세워놓고 있었다. 하지만 지난 이명박정부의 "2012년까지 기업형 주업농 20만명과 1만여개의 농업법인을 육성하겠다"는 농업선진화법에 철저히 가렸을 뿐이다. 그 결과 대다수 소규모 가족농은 정부의 관심대상에서 소외되고 전문화, 규모화된 기업농, 대농들과 경쟁하느라 점점 퇴출, 해체되었다.

오늘날 한국 농업의 살 길, 그리고 식량주권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는 가족농이라 할 수 있다. 정글같은 세계자유무역협정 시대에 미국, 호주 등의 글로벌 메이저 농기업과 겨루겠다고  농지 집단화, 수출기업화 등 규모의 경제를 추진하는 정책은 비현실적이고 불필요하다. 소규모의 건강한 가족농을 중심으로, 지역의 전통 특화자원에 기반을 둔 친환경 지역순환농업이 최선의 자구책일 것이다.

앵커(anker), 마르가레테( margarete) 부부
▲ 카이센호프 앵커(anker), 마르가레테( margarete)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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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도 독일, 오스트리아 가족농처럼 할 수 있다

최근 전북 군산 옥구읍에서 독일이나 오스트리아 농부들처럼 2대가 대를 이어 농사를 짓는 가족농을 발견했다. '더미들래(www.themdr.com)'. 5만여평의 너른 논에서 친환경으로 농사지은 쌀로 '구워먹는 떡'을 가공해 직판도 하고 체험도 하는 이상적인 한국형 6차농업의 모델로 손색이 없어 보였다.

무엇보다 귀농 25년차인 부부, 한국농수산대 출신의 후계농인 두 아들 등 네 식구, 한 가족이 성공적으로 농장을 경영하고 있는 모습은 고무적이었다. '더미들래'라는 농장 이름에 이 가족농이 농업에 임하는 자세와 농업 경영철학이 그대로 함축돼 있다. "군산들녘의 쌀로 믿고 먹을 수 있는 좋은 먹을거리 생산에 앞장서겠다"는 뜻을 새긴 것이다.

특히 농장을 이끌고 있는 큰 아들(두병훈)은 미국 유학파다. 고등학교까지 미국에서 공부하고 귀국, 농수산대학에서 농업을 공부했다. 2011년에 영농후계자로 선정되면서 이후 '돈 되는 농업'을 위한 연구와 개발에 집중했다. 쌀 농사와 재래식 두부, 장류가공으로 고전하던 부모님의 고생이 안타까웠다. 우여곡절과 시행착오 끝에 결국 혁신적인 전기와 돌파구를 마련하는 데 성공했다. 농장을 '떡공장' 중심의 6차농업경영체로 과감히 전환한 것이다. 

'구워 먹는 떡'이 대박을 쳤다. 치즈, 고구마 등을 첨가한 떡이 간식시장에서 통한 것이다. 떡볶이 떡을 밀가루가 아닌 쌀로 만든 '구워먹는' 떡이라는 콘셉트가 주효했던 것이다. 근본적으로 부모가 서해안 청정 간척지에서 직접 쌀을 농사짓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1차농업의 토대가 그만큼 탄탄히 구축되어 있어서 2차, 3차로 성공적으로 연결될 수 있었다.

그리고 더미들래의 성공은 독일, 오스트리아의 가족농처럼 가족경영영방식이 큰 힘이 되었다. 25년차 쌀농사 전문가인 아버지는 1차 농산물 재배를, 두부, 장류 등 가공 경험이 풍부한 어머니가 2차 농식품 가공을 맡고 있다. 3차 온·오프라인 직판, 기획, 마케팅은 두 아들 담당이다. 한국형 가족농의 새로운 가능성과 전망을 당당히 열어가고 있는 두 아들을 마음껏 응원한다. 그리고 이렇게 간곡하게 조언하고 당부한다.

"가족농들이 지키고 있는 독일 농촌에 한번 다녀오시라. 농부가 농촌에서 그렇게 아름답게 농사 짓고 그렇게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오시라. 그럼 아마 세상이 훨씬 더 넓고 깊어 보일 것, 더미들래 농장이 큰 날개를 달 수 있을 것."

귀농 25년차 부부와 두 아들이 운영하는 군산의 가족농가 '더미들래'
▲ 더미들래 귀농 25년차 부부와 두 아들이 운영하는 군산의 가족농가 '더미들래'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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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 ‘독일의 농부’ : 문화경관 직불금, 농업회의소, 협동조합, 가족농가, 유기농업, 사회안전망 등으로 국가와 정부의 돌봄과 보살핌을 받으며, ‘돈 버는 농업’이 아닌 ‘사람 사는 농촌’을 위한 ‘농부의 나라’를 지키며 살아가는 독일, 오스트리아 등 EU(유럽연합)의 ‘행복한 사회적 농부’ 이야기



태그:#오스트리아 , #가족농 , #친환경, #자연방목, #더미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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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연구소(Commune Lab) 소장, 詩人(한국작가회의)

공연소식, 문화계 동향, 서평, 영화 이야기 등 문화 위주 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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