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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미 마스지드와는 다른 조다 바이 궁 입구로 들어가

자미 마스지드의 동문 샤히 다르와자
 자미 마스지드의 동문 샤히 다르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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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틀버스가 자미 마스지드(Jami Masjid)와 파테푸르 시크리 궁전 사이 주차장에 선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사원인 자미 마스지드를 생략하고 바로 궁전으로 들어선다. 앞쪽으로 자미 마스지드 성벽과 왕의 출입문인 샤히 다르와자(Shahi Darwaza)가 보인다. 그곳으로는 외국인보다 인도인이 더 많이 가는 것 같다. 우리에게는 자미 마스지드가 관광 목적이지만 그들에게는 신앙 목적이기 때문이다.

자미 마스지드는 페르시아의 위대한 신비주의 자미(1414-1492)를 기리는 사원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실제 이곳은 무굴제국의 신비주의 성인(Sufi saint) 살림 취스티(Salim Chisti: 1478–1572)를 위해 지은 사원이다. 왜냐하면 이 사원 북쪽에 그의 무덤이 있기 때문이다. 살림 취스티는 신비주의 이론에 밝고, 신비주의적인 삶을 살았으며, 많은 기적을 행했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들은 무굴 황제 악바르가 그를 방문해 영감도 얻고 축복도 받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파테푸르 시크리 지도: 왼쪽이 자미 마스지드고 오른쪽이 궁전이다.
 파테푸르 시크리 지도: 왼쪽이 자미 마스지드고 오른쪽이 궁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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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바르가 특히 원했던 것은 자신의 자리를 물려줄 아들을 낳는 일이다. 그런데 살림 취스티의 축복을 받고 나서 첫째 아들이 태어났고, 그 후 두 아들이 더 태어났다고 한다. 그 첫째 이들이 악바르의 뒤를 이어 등극한 4대 황제 자한기르다. 악바르는 아들의 처음 이름을 살림이라고 지었고, 이에 대한 보답으로 살림 성인은 자신의 딸을 자한기르의 양모로 들여보냈다고 한다. 이런 인연으로 살림 쉬스티의 자손은 신앙적 정치적으로 무굴제국의 요직을 계속 차지했고, 살림가의 무덤이 이곳 자미 마스지드에 위치하게 되었다.

그리고 살림 쉬스티가 살던 곳에 궁전과 사원을 짓게 명령했으니, 그것이 파테푸르 시크리 궁전과 자미 마스지드다. 자미 마스지드는 동쪽과 남쪽 두 군데 문이 있다. 사원 동쪽에 궁정으로부터 사원으로 들어가는 샤히 다르와자가 있고, 남쪽에 승리의 문을 뜻하는 불란드 다르와자(Buland Darwaza)가 있다. 서쪽에는 중심사원인 후지라(Hujra)가 있으며, 북쪽에 살림 쉬스티의 마지막 은둔처이자 무덤이 있다. 파테푸르 시크리가 1571년 완성되었으니, 살림은 이곳에서 1년 정도 산 셈이 된다.

조다 바이 궁은 궁녀들의 거주공간

조다 바이 궁전
 조다 바이 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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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멀리서 왕의 문인 샤히 다르와자를 쳐다보고는 조다 바이 궁(Jodha Bai's Palace)으로 발길을 옮긴다. 조다 바이( 1542-1623)는 악바르 황제의 부인으로 자한기르를 낳았다. 그녀는 라자스탄 지역의 왕인 라자 바르말의 큰 딸이다. 힌두교도인 그녀의 원래 이름은 라지푸트의 공주 헤르 쿤와리(Heer Kunwari: 일명 하르카 바이)였다. 그녀는 1562년 무굴제국 황제인 악바르에게 시집갔고, 1569년 그녀와 악바르 사이에서 왕자인 무함마드 살림(Muhammad Salim)이 태어났다.

이 때문에 그녀는 '우리 시대의 마리아'를 뜻하는 마리암 우즈 자마니(Mariam-uz-Zamani)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1605년 살림이 무굴제국의 제4대 황제 자한기르가 되었고, 그녀는 43년 동안 무굴제국의 황후로 영화를 누릴 수 있었다. 악바르와 조다 바이의 결혼은 종교와 인종을 차별하지 않는 악바르의 정치철학에서 나온 것이다. 이러한 개방적인 정책은 자한기르의 아들인 샤자한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1659년 샤자한의 아들 아우랑제브(Aurangzeb)가 골육상쟁을 통해 등극하면서 이슬람 근본주의로 돌아갔고, 이것이 결국 무굴제국의 멸망을 재촉하게 되었다.

궁전 내부의 연꽃 장식
 궁전 내부의 연꽃 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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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다 바이 궁은 궁녀와 시녀들의 거주지인 하람사라(Haramsara)다. 동쪽 정문은 2층으로 되어 있으며, 1층 가운데 아치형의 문이 있다. 2층에는 발코니가 있어 외부에서 들어오는 사람들을 감시할 수 있게 만들었다. 문을 들어서면 4각형의 궁전 마당에 나무가 한 그루 심어져 있다. 궁전은 마당을 둘러싸고 사합원 양식으로 지어졌다. 그리고 사방에 복도와 방을 만들고, 그곳에 궁녀들이 기거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동서남북 쪽 가운데를 2층으로 올려 다른 기능을 추가했다. 예를 들어 동쪽은 주 출입문을 만들었고, 북쪽은 이슬람 모스크를 만들었다. 서쪽과 남쪽은 좀 더 지위가 높은 궁녀들의 전용공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조다 바이 궁은 건축 양식이 무굴 양식이지만, 그 안에 장식이나 문양은 힌두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꽃문양인데, 그 중에서도 연꽃이 두드러진다. 

악바르와 그의 부인 마리암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궁전

악바르 황제의 부인 마리암 초상화
 악바르 황제의 부인 마리암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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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다 바이 궁을 나온 우리는 악바르와 그의 부인 마리암이 거주했던 정궁으로 들어간다. 정궁에는 정치 공간, 생활공간, 침실 등 십여 채의 건물이 들어서 있다. 정궁으로 들어가 처음 만나는 건물이 마리암 하우스다. 이곳은 황후의 전용공간으로 평상시 생활공간이다. 정사각형 건물로 옥탑형 2층을 만든 단아한 건물이다. 내부도 비교적 단순하게 만들어졌으며, 마리암의 초상화를 통해 이곳이 황후의 집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초상화가 그려진 것이 16세기 후반인데도, 그림에서 황후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다. 초상화 외에 건물 내부에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우리는 마리암 하우스를 나와 인공 연못인 아누프 탈라오(Anoop Talao) 앞에 선다. 이 연못은 사각형으로 가운데 무대를 만들어 음악회나 공연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이곳에서는 악바르 시대 전설적인 음악가 탄센(Tansen)이 주로 음악회를 열었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노래를 불러 램프에 불을 붙일 정도로 대단한 능력을 가진 것으로 되어 있다.

파테푸르 시크리의 연못과 카스 마할
 파테푸르 시크리의 연못과 카스 마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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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의 남쪽에는 황제의 침실인 카스 마할(Khas Mahal)이 있다. 카스 마할은 '꿈의 궁전'이라는 뜻으로, 인도의 더위를 이길 수 있도록 자연 냉방장치를 설치했다. 여기서 자연냉방이란 방의 한쪽으로 물을 흘러내리게 해서 방안의 열을 내리게 하는 방식이다. 내부 벽에는 장식과 글씨가 새겨져 있다. 연못의 동북쪽에는 터키 출신 황비의 생활공간인 술타나 하우스(Sultana's House)가 있다. 이 건물의 문과 벽 그리고 천정 장식이 이슬람 양식이다. 문양이 기하학적이기도 하고, 꽃과 나무, 새 등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못의 북서쪽에는 궁녀들의 학교인 압다르 카나(Abdar Khana)가 있다. 이들을 보고 우리는 이곳에서 제일 높은 건물 판치 마할(Panch Mahal)로 이동한다. 판치 마할은 '바람잡이 궁전(Wind Catcher Tower)'으로 불리는데, 황제와 황후가 만나 여가도 즐기며 쉬는 장소 역할을 했다. 전체가 5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폭이 좁아지는 형태를 취했다. 그래서 건물보다는 탑처럼 보이는 경향이 있다.

휴식의 궁전 판치 마할
 휴식의 궁전 판치 마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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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에 84개의 기둥이 있고, 2층에 56개의 기둥이 있어 건물의 내부 공간이 상당히 넓은 편이다. 그런데 3층부터 기둥이 20개로 줄고, 4층에는 기둥이 12개로 준다. 마지막 5층에는 기둥이 네 개 밖에 되질 않아 마치 정자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최상층에는 황제 부부만이 올라갔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곳에서는 사방으로 건물과 마당, 연못 등을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이 건물에도 장식이 많았을 텐데 지금은 그 모습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그것은 400년 이상 방치되면서 백성들이 떼어가고 훼손했기 때문이다.

볼거리가 가장 많은 디완 이 카스

판치 마할을 나오면 길은 자연스럽게 궁전 앞마당인 파치시 코트(Pachisi Court)로 이어진다. 이 마당은 궁녀들의 놀이공간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마당 한 가운데서 우리네 사방치기 같은 놀이가 행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당 한 가운데 직사각형으로 줄을 그려 칸을 만들고, 그 안에 사선을 그어 다시 세모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네모나 세모 칸 안에 놓였던 돌이나 사금파리는 볼 수 없지만, 이것이 사방치기 놀이판이었음에 틀림없다.

디완 이 카스 외부
 디완 이 카스 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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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완 이 카스 내부 기둥
 디완 이 카스 내부 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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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치시 코트 앞에는 황제가 관리와 외빈을 만났던 '디완 이 카스'가 있다. 이 건물은 2층으로 되어 있고, 그 위 사방에 정자 형태의 건물을 네 개 얹었다. 2층임에도 불구하고 층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가운데 기둥을 세우고 사방으로 들보 형태의 통로를 만들었다. 기둥의 장식을 보면 인도식과 이슬람식이 결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기둥 상단을 받치는 뱀 모양의 장식이 인도 양식이라면, 기둥을 장식한 문양이나 문살 장식은 이슬람 양식이다.

황제는 이곳 2층 한 가운데 기둥 위에 앉아서 가장자리에 앉은 신하나 외빈들의 보고를 받았다고 한다. 이 건물의 특징은 내 외부가 완벽한 대칭이고, 장식과 치장이 뛰어나다는 점이다. 그리고 훼손이 가장 적어 옛날 원형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다. 우리는 이제 마지막으로 황제가 백성들을 만나고 의식을 행하던 디완 이 암으로 간다.

외부와 연결된 디완 이 암
 외부와 연결된 디완 이 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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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건물은 바깥마당을 포함해서 가장 큰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가운데 중심 건물인 디완 이 암이 있고, 좌우로 회랑 형태의 건물이 이어진다. 회랑의 벽에는 예술성이 있는 태피스트리 작품들이 걸려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이곳은 건물 앞으로 잔디가 깔려 있어 눈이 시원해진다. 인도의 문화유산은 대부분 건물 위주로 되어 있어 생각보다 삭막한 느낌을 준다. 그런데 이곳 마당에서는 풀과 나무가 자라고 있으니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디완 이 암을 끝으로 우리는 파테푸르 시크리 관광을 마치고 밖으로 나온다. 그곳에는 이미 셔틀 버스가 기다리고 있다. 이 버스를 타고 다시 우리는 처음 출발한 주차장으로 간다. 도중에 아그라 게이트를 만난다. 이 문을 지나 동쪽으로 37㎞를 가면 아그라가 나온다. 이처럼 문은 지향하는 도시의 이름을 붙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동문이 아그라 게이트, 북문이 델리 게이트, 남문이 괄리오르(Gwalior) 게이트다. 우리의 다음 목적지는 동쪽 아그라에 있는 타지마할이다.


태그:#파테푸르 시크리, #자마 마스지드, #조다 바이 궁전, #마리암 하우스, #판치 마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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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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