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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사당패의 최초 출현지인 경기도 안성 서운산 기슭 청룡사 대웅전 앞 3층석탑(문화재자료 59호)
 남사당패의 최초 출현지인 경기도 안성 서운산 기슭 청룡사 대웅전 앞 3층석탑(문화재자료 59호)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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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5년(고려 원종 6) 명본국사 창건, 대장암으로 명명
1364년(공민왕 13) 나옹화상 중창, 청룡사로 명명
조선 인평대군(1622-1658, 인조의 3남)의 원찰
1900년대 남사당패의 근거지

사찰 내력에 창건 시기, 창건 스님, 그리고 어떤 왕족의 원당(願堂)이었는지를 적어두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그런 점에서, 경기도 안성시 서운면 청룡길 140에 자리잡고 있는 청룡사의 누리집은 특이한 '연혁'을 보여준다. '1900년대 남사당패의 근거지'였다! 청룡사의 이 자기 소개는 다른 어느 절에서도 볼 수 없는 남다른 모습이다.

남사당 또는 남사당패는 춤, 노래 등 대중 상대의 흥행 능력을 가진 채 떠돌아다닌 조선 시대의 유랑 예인(藝人) 집단을 말한다. 남사당패는 사당패는 물론 대광대패, 솟대쟁이패, 걸립패 등 허다한 연예 집단들 중에서도 그 규모가 가장 커서 무려 40~50명으로 조직되었다.

남사당패의 초창기 이름은 사당패였다. 사당패는 1464년(세조 10) 지금의 서울 파고다공원에 자리잡고 있던 고려 사찰 흥복사(원각사의 전신)를 중건할 때 처음 나타났다. 당시 남녀 신도들이 절을 새로 짓는 데 필요한 자금을 모으러 돌아다녔는데, 원각사 완공 이후에도 전국 각지의 사찰에 필요한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온 나라를 배회했다. <예종실록>은 원년(1468) 기록에 '지방에서는 천 명, 만 명이 무리를 지어 절에 올라가 향을 사르고, 서울에서는 밤낮으로 남녀가 여염집에 섞여 살면서 북을 울리고 돌아나녔다'는 증언을 남기고 있다.

원각사 건축비용 조달 위해 처음 조직된 사당패

시간이 흐르면서 사당패는 절 돕는 일은 도외시한 채 술자리 등을 찾아다니며 노래와 춤을 팔아 재물을 모으는 데 빠져들었다. 뿐만 아니라, 여자 사당들은 일반인을 상대로 매춘 행위까지 일삼았다. 이능화가 1927년 저술한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에는 여자 사당의 신세 한탄이 담겨진 '자탄가(自歎歌)'가 실려 있다. ('말을 알아듣는 꽃'을 뜻하는 해어화는 고려 무신정권 시대의 문인 이규보가 창조한 단어이다.)

이 내 손은 문고리인가, 이 놈도 잡고 저 놈도 잡네.
이 내 입은 술잔인가, 이 놈도 빨고 저 놈도 빠네.
이 내 배는 나룻배인가, 이 놈도 타고 저 놈도 타네.

'자탄가'가 증언해주는 것과 같은 저급한 사회 풍속은 임진왜란 종전 뒤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 당연히 <고려사> <해동역사> 등은 사당패를 '풍속을 해치는 패륜 집단'으로 기술했다. 1606년(선조 39) 사헌부는 사당패의 병폐에 대해 '서울과 지방의 남녀가 부역을 피해 더러 사장이라 일컫고 더러는 거사라고 자칭하면서 두루 사방으로 흘러다니며 세상사람들을 속여 놀고먹으며 백성의 재물을 좀먹고 있습니다, 이것도 악하거늘 하물며 무리를 불러모아 늘 밥을 갈취하는데 이런 풍조가 점점 퍼져가고 있습니다' 하고 지적하면서 임금에게 그들의 활동을 금지해야 한다는 건의를 올렸다.

<선조실록> 40년(1607)을 보면 그 해에도 사헌부는 '10여 년간 인심이 흔들리고 사설(邪說)이 난무하는데도 금지와 단속이 되지 않으니 어리석은 백성들이 현혹되어 사내는 거사, 계집은 사당이 되어 생업도 버린 채 중옷을 입고 밥을 빌어먹으며 서로 끌어들입니다' 하면서 '그대로 두면 변란을 일으킬지도 모르니 색출하여 계집은 북쪽으로 이주시키고 의탁할 곳 없는 아이들은 관아 노비로 삼되, 요망한 말로 사람들을 현혹하고 선동하는 자는 붙잡아 문초해야 마땅합니다' 하고 요구했다.

1606년에도, 1607년에도 나라에서는 금지령을 내렸다. 사당패를 체포하기 위해 공권력이 전국을 뒤졌다. 하지만 사당패는 사라지지 않았다. 21세기인 지금도 결혼식에서 혼례가 끝난 뒤 신랑이 입에 물고있는 물건을 신부가 받아무는 놀이를 하는데, 이는 사당패의 체취가 우리 사회전반에 뼛속깊이 녹아있다는 사실을 에둘러 말해주는 흔적이다. 왜냐하면 이 놀이는 사당패의 남자 사당이 관객에게서 받은 돈을 입에 물고 "돈! 돈!" 외치면 여자 사당이 달려와 입으로 그 동전을 받은 뒤 서로 입을 맞추어 손님들의 흥을 돋우던 행위에서 유래한 풍습이기 때문이다.

청룡사 대웅전(보물 824호). 특이하게도 서쪽을 바라보고 서 있는 이 법당의 벽에는 사람들의 한자 이름이 빼곡하게 기록되어 있다. 법당 건축에 도움을 준 사람들의 이름으로 추정되고, 상당수는 남사당패 구성원이 아닌가 여겨지지만 한자명인 탓에 각각의 신분은 확인할 수가 없다.
 청룡사 대웅전(보물 824호). 특이하게도 서쪽을 바라보고 서 있는 이 법당의 벽에는 사람들의 한자 이름이 빼곡하게 기록되어 있다. 법당 건축에 도움을 준 사람들의 이름으로 추정되고, 상당수는 남사당패 구성원이 아닌가 여겨지지만 한자명인 탓에 각각의 신분은 확인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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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1661∼1720) 때 남(男)자들로만 무리(黨)를 이루어 조직된 남사당(男寺黨)패가 처음으로 청룡사(寺)에서 출범했다. 가장 천대받는 계급의 사람들이었던 남사당패는 사회에서 소외된 채 전국 방방곡곡을 흘러다니며 떠돌이 유랑 생활을 했다. 자연스레 남사당패는 주로 외진 산속에 위치하는 사찰과 연관을 맺었고, 그곳을 집결지로 활용하기도 했다. <택리지>가 '안성은 화물이 쌓이고 장인(匠人)과 장사꾼이 모여드니 한양 남쪽의 도회가 되었다'고 말한 바 그대로 서울과 삼남(충청, 전라, 경상)을 잇는 교통 요지 안성은 박지원 소설 <허생전>에서 허생의 경제 활동 무대가 되었고, 그 안성의 청룡사는 남사당패들의 전국적 중심지가 되었다. 청룡사 누리집이 '남사당패의 근거지'를 자칭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사당패가 급격히 늘어난 것이 일본과의 7년전쟁 종료 후의 일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청룡사는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극심한 고통에 짓눌렸던 조선 백성들의 삶의 현장이라 할 만하다. 소득 활동이 불가능한 겨울철에 남사당들이 몰려오면 청룡사는 그들에게 밥짓고 물긷는 불목하니 등의 임무를 주는 대신 먹여주고 재워줬고, 남사당들은 청룡사가 죽은이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지내는 영산재, 물과 땅을 떠는 귀신들을 위한 수륙재 등 큰 행사를 벌일 때 춤과 노래를 제공하고, 수입이 있는 철이면 청룡사에 성심껏 시주도 했다. 청룡사 들머리 마을회관 앞에 1721년(경종 원년) 건립된 '청룡사 사적비(경기도 유형문화재 124호)'에는 남사당패들의 시주 내역이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나라는 극심하게 탄압했지만, 민중들은 환호한 남사당패

남사당패는 나라로부터 극심한 탄압을 받았지만 민중들로부터는 큰 환영을 받았다. 특별한 볼거리도 없고 여가 생활을 즐길 형편도 되지 못했던 일반 민중들은 부르지 않아도 '찾아오는' 연예인들이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민중들은 남사당패가 꽹과리·징·장구·날라리(태평소)를 불고 치며 노는 농악인 풍물, 대접이나 접시를 돌리는 묘기인 버나, '잘하면 살 판, 못하면 죽을 판'이 된다고 하여 땅재주 묘기를 가리키게 된 살판, 3m 높이에서 안전장치 하나 없이 각종 묘기를 부리고 소리까지 하는 줄타기인 어름, 탈놀음인 덧뵈기, 마지막 순서로 진행하는 꼭두각시놀음(중요무형문화재 3호)인 덜미 등 여섯 가지 재주를 보여줄 때마다 온몸을 흔들며 환호작약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청룡사 남사당패의 우두머리(꼭두쇠)가 여자였다는 점이다. 꼭두쇠 아래에서 기획을 담당하는 1~2명의 곰뱅이쇠와 여섯 연희의 분야별 대장인 뜬쇠(어름의 우두머리는 '어름산이')들이 선출하는 꼭두쇠에 여자가 뽑혀서 활동했다는 사실이다. 남자들로만 조직되는 남사당패에서, 그것도 남자 쇠들이 유권자인 선거에서 여자가 최고 지도자로 선출되었다니!

청룡사 들머리 마을회관 앞 사적비에서 오른쪽으로 난 좁은 길을 잠깐 걸으면 바우덕이의 생가터에 2005년 건립된 '바우덕이 사당'이 나타난다.
 청룡사 들머리 마을회관 앞 사적비에서 오른쪽으로 난 좁은 길을 잠깐 걸으면 바우덕이의 생가터에 2005년 건립된 '바우덕이 사당'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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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바로 바우덕이, 김암덕(金岩德)이라는 한자 성명도 가진 여인이다. 바우덕이는 1848년 소작농의 딸로 태어나 5살 때 청룡사 앞에서 남사당패에 맡겨졌는데, 워낙 재주가 뛰어났던 덕분에 불과 15살에 꼭두쇠에 뽑혔다. 어린 나이에다 여자인 바우덕이를 남자 쇠들은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만장일치로 꼭두쇠로 선출했다. 그만큼 바우덕이는 당시 조선의 예인들 중에서 그 어느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군계일학의 능력자였던 것이다.

바우덕이가 얼마나 뛰어난 재능과 출중한 미모를 가지고 있었던가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일화가 잘 증언해준다. 흥선대원군은 1865년 경복궁을 중건할 때 바우덕이가 이끄는 안성 남사당패를 서울로 불러올려 일꾼들을 위한 '위로 잔치'를 펼쳤다. 이는 이미 바우덕이의 기예 솜씨가 궁궐에까지 익숙하게 알려져 있었고, 그래서 안성 남사당패는 왕과 대신들 앞에서까지 기예를 펼치는 기회를 누릴 수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바우덕이의 기예를 본 대원군은 감동한 나머지 천민인데다 여자인 그에게 정3품 당상관이 되어야만 누릴 수 있는 옥관자(망건 좌우에 다는 옥장식품)를 선물했다. 너무나 파격적인 후대였다. 바우덕이는 대원군으로부터 전국 최고의 놀이패로 공식 인정을 받은 셈이었다. 바우덕이의 엄청난 기예 능력을 잘 말해주는 노래 한 자락도 살펴보자.

사당 앞 마당에 세워진 바우덕이 동상
 사당 앞 마당에 세워진 바우덕이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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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청룡 바우덕이
소고(小鼓)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치마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줄 위에 오르니 돈 쏟아진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바람을 날리며 떠나를 가네

하지만 노래는 그저 비유와 상징으로 점철된 문학적 수사일 뿐이다. 공연을 거부하다가도 안성 남사당패임을 확인한다는 청룡사의 신표(信標)만 내밀면 전국 어느곳에서도 흥행을 허락받은 바우덕이였지만, 그는 우리 나이로 겨우 23세에 불과한 1870년 폐병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노랫말처럼 그렇게 돈을 많이 벌었다면 어찌 가난과 영양실조로 말미암아 발병하는 폐병에 걸려 그토록 젊디젊은 스물셋 새파란 나이에 세상을 떠났을 것인가. 그것도 흥선대원군으로부터 당상관 옥관자까지 받았는데.....

무덤도 조성하지 못한 천민 사당패의 슬픔

이 노래는 바우덕이 묘소 앞의 빗돌에도 새겨져 있다. 묘소는 청룡사 들어가는 입구의 청룡호 못둑 아래 산비탈 물가, 새초골에서 오르는 서운산 등산로 초입에 있다. 참으로 애통한 것은 겨우 스물셋의 나이로 병사했을 당시 바우덕이가 봉분도 없이 그냥 맨땅에 묻혔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예인에 대한 홀대가 사라지고 오히려 숭상받는 시대가 도래하자 사람들은 새로이 그의 묘터를 가꾸고 빗돌도 마련했다. 그의 묘소가 처음의 매장터인 계곡 물길 옆을 벗어날 수는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상당히 높은 벼랑 위에 위치시켜 아무리 큰물이 져도 결코 피해를 입지 않도록 배치한 것 또한 후세사람들의 그에 대한 진정의 표시일 터이다.

이윽고 사람들은 2005년에 이르러 생가터에 사당도 짓고, 그녀의 모습을 복원한 동상도 건립했다. 그의 생가터는 마을회관 앞 청룡사 사적비 뒤 거대한 고목의 오른쪽으로 난 작은 다리를 건넌 다음, 부도군 옆을 따라 이어지는 작은 길을 천천히 밟다보면 200미터도 채 가지 않아 이내 나타난다. 서보원 작가는 바우덕이 동상 아래에 '바람은 노을 되어'라는 제목을 붙여 두었다. 바람은 사라지지만 노을은 날마다 살아나고, 또 아름다워 누구라도 다들 좋아하는 것이니, 작가의 명명은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표현이리라.

바우덕이 묘
 바우덕이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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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사는 일본과의 7년전쟁 뒤 수많은 민중들이 목숨을 부지하려고 사당패가 된 슬픈 민중사가 깃들어 있는 곳이지만, 침략군을 물리친 승전의 현장이기도 하다. 청룡사 대웅전은 특이하게도 서쪽을 향해 세워져 있는데, 그 대웅전을 뒤로 하고 마을 한복판을 가로지르면 서운산성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나온다. 경기도 기념물 81호인 이 서운산성이 바로 임진왜란 때 우리 의병들이 일본군을 격퇴한 역사적 유적지이다. 

서운산(瑞雲山)은 상서(瑞)로운 구름[雲]이 감돈 산이라는 뜻이다. 나옹화상은 절터를 찾아다니던 중 문득 이 산 상공에서 상서로운 구름을 타고 푸른(靑) 용(龍)이 내려오는 것을 보게 된다. 그 이후 산은 '서운산'이라 불려졌고, 고려 때부터 이곳에 자리잡고 있던 대장암은 1364년(공민왕 13) 나옹화상의 커다란 중창을 거친 다음 새로 청룡사(靑龍寺)라는 이름을 얻었다.

산성은 신라 시대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 후 임진왜란 때 홍계남(洪季男), 이덕남(李德男) 두 의병장이 각각 서운산 정상과 덕봉리 앞산에 남아있는 성을 보강, 증축하였다. 그래서 홍계남 장군이 쌓은 성을 우산성(右山城), 이덕남 장군이 쌓은 성을 좌산성(左山城)이라 부르기도 한다. 두 장군이 왜군을 격퇴한 엽둔령(葉屯嶺)은 진천군과의 경계 지점이다.

이제 서운산성으로 오를 차례다. 하산할 때에는 바우덕이 묘소 쪽으로 내려가야겠다. 그에게 작별 인사를 해야 하리. 그가 다시 오지 못할 이곳, 나 또한 재차 찾아올 수 있다고 장담하지 못할 일이니, 서운산 맑은 바람이 노을빛에 물들기 이전에 서둘러 산성 흔적을 살펴보아야 하리라.

경기 안성과 충북 진천의 경계인 엽돈재 정상에서 바라본 동쪽 방면. 홍계남 장군 등 임란 의병들은 북상해오는 일본군들을 이곳에서 물리쳤다.
 경기 안성과 충북 진천의 경계인 엽돈재 정상에서 바라본 동쪽 방면. 홍계남 장군 등 임란 의병들은 북상해오는 일본군들을 이곳에서 물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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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운산, 청룡사, 바우덕이 답사 순서

1. 경기도 안성시 서운면 청룡길 140 청룡사 입구 마을회관 앞 (지붕돌에 용 조각, 남사당패의 시주 기록이 남아 있는) 유형문화재 124호 청룡사사적비
2. (사적비에서 오른쪽으로 작은 다리를 건너) 청룡사 부도군
3. 서운면 청룡길 128-34 '여우가말했다'카페 직전 왼쪽 개울 건너 바우덕이 사당과 동상
4. 청룡사의 (화려한 조각과 우물 모양 천장 등 조선 후기의 건축 기법을 보여주는) 보물 824호 대웅전의 가공되지 않은 원목 기둥들, 벽에 쓰인 사람 이름들, 사천왕문은 없고 그 대신 추녀 끝에 설치된 금강력사, (15세기 작품인) 유형문화재 170호 금동관음보살좌상, (1674년 승려 사인구비 작품, 전통적 신라 종 제조기법에 독창석 가미가 돋보이는) 보물 11-4호 동종, (1658년 승려화가 명옥 작품, 석가 설법 장면을 그린 17세기 중엽 영산회상도의 대표적 작품인) 보물 1257호 영산회 괘불탱, (고려 시대 석탑, 1265년 명본국사 설립 추정) 문화재자료 59호 삼층석탑, (1692년 제작, 조상의 극락왕생을 비는 유불 혼합 사상, 명료한 주제, 안정된 구도, 선명한 색채가 특징인 관음의) 보물 1302호 감로탱
5. 서운산 정상부의 (신라 고성 흔적, 임진왜란 시기 보강 축성) 경기도 기념물 81호 서운산성
6. 서운면 성진로 1279-76 바우덕이 묘소, 빗돌




태그:#청룡사, #임진왜란, #바우덕이, #서운산성, #홍계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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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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