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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살 가을이는 어린 시절의 자기 모습을 기억하고 있을까? 좋지 않은 기억이라면 확실히 기억하고 있는 것 같다. 낯선 사람을 무서워하고 특히 남성 성인에겐 절대로 마음을 열지 않는 모습에서 이 애가 유기돼 보호소에 오기까지의 과정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분명 가을이도 입에서 젖내가 풀풀 나고, 천지 사방에 호기심을 느끼던 시기가 있었을 텐데…. 그 시절에 나와 만나지 못해 너무나 아쉽다.

생후 4개월의 고양이 스밀라가 지금 그런 시절을 보내고 있다. 퇴원 후 기력을 찾는 양상이 확연히 좋아졌다. 비척비척 걷던 약해빠진 길고양이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쿠당탕'거리며 건조대와 자전거를 오르내린다.

왕성한 식욕, 야무진 그루밍, 국보급 애정 표현! 어쩌다 고양이 집사가 돼 버린 나는 날카로운 발톱에 난 상처조차 자랑스럽다. 몸에 살도 붙고 네 다리의 힘도 세졌다. 설사는 일주일에 걸쳐 멎었다.

간절히 기다리던 맛동산(건강한 변)을 눈 스밀라는 범백혈구 바이러스 완치 판정을 받았다. 체온과 활력, 위생, 영양 상태 모두 양호했다. 이제 3주에 걸쳐 종합백신을 맞으면 된단다. 의사 선생님은 뽀얗고 예뻐진 스밀라의 모습에 칭찬을 듬뿍 해주셨다.

불과 몇 주 전에 생사의 기로에 있던 800g짜리 아기 고양이가 맞나? 치사율 70%의 무서운 병마를 이 작은 아이가 이겨낸 것이다. 어느새 2.3kg이 된 스밀라는 앙증맞은 이빨로 보이는 모든 것을 씹어보고 휘둥그레 눈동자를 굴리며 모든 사물을 신기하게 관찰한다. 한 걸음을 걸어도 통통 벼룩처럼 뛰고 구석, 모서리, 벽, 천장을 타고 다닌다. 앞구르기는 또 어찌나 잘하는지! 뽀송뽀송 분홍색 발바닥에는 윤이 다 난다.

기묘하다, 닮아가는 두 친구

스밀라가 심장이 멎을 애교를 부려도 가을이는 어째 시큰둥하다.
▲ 언니, 나 좀 보시라요 스밀라가 심장이 멎을 애교를 부려도 가을이는 어째 시큰둥하다.
ⓒ 박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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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는 이런 스밀라가 이상하다. 왜 잠시도 가만히 있지를 않는지, 왜 자꾸 자기를 건드리는지 이해하지 못 한다. 잠결에 스밀라가 품을 찾으면 벌떡 일어나 내친다. 인형을 물고 앞에 내려놓으면 자리를 피한다. '언니, 놀자' 하듯 앞발을 내미는 스밀라를 '으르릉' 엄하게 꾸짖기도 한다. 다행히 가을이가 절대 사납게 굴지는 않는다. 스밀라도 도를 넘지는 않는다. 세 종류의 개체가 생존하는 이 집을 현재로선 비폭력 평화구역으로 선포해도 될 것 같다. 

인간과 개를 보호자로 둔 아기 고양이는 무엇을 배우며 자랄까? 아무래도 스밀라는 나보다는 가을이에게 더 큰 영향을 받는 것 같다. 하루는 혀를 내밀고 헥헥 대는 가을이를 유심히 보던 스밀라는 자기도 혀를 내밀고 헥헥거렸다. 캣맘들에게 물으니 고양이는 아무리 더워도 입을 열고 혀를 보이지는 않는다고 했다. 돌기가 솟은 발그스름한 혓바닥을 개처럼 빼어 문 모습에 난 심장마비가 올 뻔 했다(귀여워서).

또 가을이가 불만이 있거나 원하는 게 있을 때 "치!" 하며 코로 바람을 내뿜을 때가 있다. 스밀라는 그것도 따라했다! 타고난 모사 능력이다. 외출하고 돌아오면 처음엔 침대 밑에 들어가 숨더니 이젠 가을이처럼 종종종 현관에 나와 나를 반긴다. 청소기를 돌릴 때는 도깨비를 본 듯 도망쳤는데, 지금은 가을이 뒤에 의젓하게 앉아 상황을 관조할 줄도 안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스밀라는 한편, 내가 갖고 있던 '고양이 판타지'를 무참히 깨주기도 한다. 먹고, 누는 생리는 스스로 터득해 고맙긴 한데 참 손이 많이 간다. 누가 고양이는 깨끗한 동물이라 했나? 스밀라가 전용 화장실의 모래에서 신나게 뒹굴며 놀 때는 난감하다. 응가와 쉬를 하긴 할 건데, 하다말고 모래놀이를 한다. 무척 재미있나 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래를 묻히고 '우다다' 달려 나와 이불이며 식탁에 모래 흔적을 남기면 누가 치우나? 천진난만하게 사방을 헤집고 다니다가 제 몸에 묻은 지저분한 것들은 말끔히 정리한다. 아, '자기 몸'에 있어서는 청결하다는 뜻이었구나, 나는 이해했다.

고양이에 대한 환상, 이렇게 깨졌어요

모질이 눈부시고 살이 올랐다. 그나저나 고양이 다리가 저렇게 길다고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 완치 판정 받고 제 세상 만난 스밀라 모질이 눈부시고 살이 올랐다. 그나저나 고양이 다리가 저렇게 길다고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 박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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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는 혼자 잘 논다고 하지 않았던가? 스밀라는 몇 분 정도는 혼자 놀지만, 대부분 나나 가을이게 놀아달라고 떼를 쓴다. 고양이는 야행성이라고 들었는데, 그럼 낮에 좀 자야하는 거 아닌가? 스밀라는 한 10분도 잠들지 않는 거 같다. 낮이나 밤이나 '아아아' 소리(실제로 들으면 매우 깜찍하다)를 내며 야단법석이다. 스밀라에겐 치타나 표범의 DNA가 많이 섞여 있나? 어쩌면 이런 발랄함 덕에 길냥이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아무튼 그리하여 요즘 내 꼴은 말이 아니다. 잠이 부족하니 이성이 마비됐는지 내가 어디를 가려고 했더라? 내가 밥은 먹었던가? 하면서 어벙하게 지내고 있다. 허나, 잠도 못 자게 하고 시도 때도 없이 청소를 하게 만드는 꼬마가 귀찮지 않으냐고 물으신다면 어제 새벽의 한 장면을 소개하고 싶다.

잠결에 유독 발이 훈훈해 '내가 수면양말을 신었던가' 생각하며 일어나보니 스밀라가 가녀린 네 발로 내 한쪽 발을 꼭 감싸 안고 잠들어 있는 게 아닌가. 분홍빛 코와 입술이 촉촉했다. 작은 심장이 콩닥콩닥 뛰고 있었다. 보드랍고 따뜻한 하얀 털 뭉치 생명체야, 우리집에 와줘서 고마워…!

○ 편집ㅣ김지현 기자



태그:#스밀라, #유기묘, #입양하세요, #이봄가을, #유기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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