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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르레기, 찌르~레기, 찌르레~기, 찌르레기~" 

구입후 귀찮아서 한번도 변경하지 않은, 귀에 익은 정겨운 찌르레기 폰벨소리다. 보통 점심시간 후 1시에서 30분 사이는 보이스피싱 업자도 스팸메일 업자도 쉬는 커피타임인데, 누구일까? 휴대폰 화면 상단에 대학동기였던 친구녀석 이름이, 내 얼굴을 향해 전화 받으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20여년 전 대학시절이었다. 아는 사람이 전혀 없었던지라 캠퍼스에 빨리 적응하고자 신입생 환영회 때 잠깐 소개를 받았던 과동아리에 가입했다. 동아리 속성상 주로 동아리 위주로 학내생활이 이루어지다보니 같은 과친구들에게는 소원했다. 그렇게 한학기를 마치고 그 다음해 군대에 갔다.

3년 후, 2학기 복학 후에 학기가 거듭되면서는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도 과친구들과의 경계가 없이, 복학생 위주로 자연스럽게 어울리게 되었다. 그중의 한명이 바로 그 친구였다. 좀 마른 체구의 친구는 과하지 않은 헛웃음을 잘 지었다.

늘 나무늘보처럼 여유로운 행동과 얼굴표정을 지어서인지 대하기가 편했다. 서로 5분거리의 자취방을 왕래하며 라면을 많이도 끓여먹었다. 그래서인지 대화없이도 서로 장단 맞추는듯한 반응이 즐거웠던 것으로 기억된다.

코드가 통하니, 강의 시작하면 출석부르고 뒷문으로 나와 당구치러 가기가 일쑤였고, 전혀 모르는 공대생들과 끼어서 족구하기, 여학생들이 많은 도서관에 자리잡고 눈요기 하기 , 시험때 서로 떨리는 마음으로 커닝하기까지 해보았다. 둘 다 형편없는 학점으로 계절학기를 다시 들어야 했지만 말이다. 아무튼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평화로운 캠퍼스 일상과는 반대로, 90년대 중반까지 학내에서 때로는 종종 격렬한 학생시위가 있었다. 그때 나는 그들과 뜻을 함께할 정도의 배경지식과 가치관이 정립이 안 되어 있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용기가 없어서, 학생들이 전경들에게 끌려 가는 것을 멀리서 바라만 보았다. 마음속으로 갈등을 수도 없이 반복했던 불편한 시절이였다. 어수선한 시절에 그렇게 그 친구와 함께 어울림으로 스스로 위안을 삼았던 것 같다.

3학년 2학기 학기말이 끝나고, 며칠 지나 친구가 아르바이트 같이 하자고 제안해 왔다. 졸업하기 전에 사회 경험을 쌓아야 한다고 절감하고 있던 터라 흔쾌히 응했다. 둘이 함께 하면 재미도 있을 것 같았다. 그해 겨울은 그 친구와 함께, 주야로 교대해 가며 호텔내 사우나에서 카운터 보는 일을 했다. 저녁에 한창 손님이 많을 때 빼고는, 일은 그리 힘들지 않아서 무난하게 일을 할 수 있었다.

겨울이었지만 따뜻한 알바였다. 특히 새벽녘 동틀 때 창밖을 내다보던 게 기억에 남는다. 일순간 어둠이 사라지고 날이 밝아 오는 그 여명의 접점을 즐기곤 했다. 그순간 미래의 막연한 두려움이 해소되는 것 같았다.

내가 아는 그 친구는 순하고 마음이 여렸다. 그런데 졸업후 정신없이 살다 연락이 닿았는데,  카드사 채권팀에서 일한다 했다. 지상에서 불법 채권회수의 문제점에 대해 기사가 나올 때여서, 약간의 부정적인 선입견이 있었다. "그  친구 성격상 잘할 수 있을까?"  약간은 의외라 여겼다. 쉬운 일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당시 정부가 소비 진작을 위해 신용카드 활성화 정책을 편 이후, 부작용이 드러나기 시작한 시점으로 채권업무가 폭발적으로 증가했었다.

어찌되었건 계기가 되어 그 업계에 발을 들였고, 조직내에서 실적이 좋아서 승진 대상이라고 했다. 그런데, 기득권 세력들이 더 이상 승진을 안 시켜 주더란다. 이후 정부의 카드사업 규제정책으로 채권업무가 줄게 되어 그만두었다. 와중에 집에서 쉬는 것도 와이프 눈치 보인다며, 건물관리를 맡아 일한다 했다가, 그것도 이런저런 일로 한달 후에 그만두었다고 들은 기억이 난다. 그리고 과거 경력으로 모 은행 카드 부서로 스카웃되어 들어갔다고 했다.

최근에 연락된 것은 올해 4월 중순이었다. 월요일에 제주도 출장이 있다며, 시간되면 주말에나 같이 가자했다. 처음에는 흔쾌히 동의하고, 장흥에서 찻배로 예약하고, 서귀포에 캠핑장 검색까지 해놨었는데, 주말에 갑자기 일이 생겨 같이 가지는 못했다. 아쉬웠다.

친구가 화요일에 일을 마치고 제주도에서 배 타기 전에,  봄햇볕이 일렁이는 파도에 흩뿌린듯 부서져, 푸르른 바다를 수놓는 사진을 보내왔다. 서귀포 어느 해변가인 것 같았다. 사실 제주도는 서귀포, 제주시 포함하여 사방 팔방으로 뻗어있는 바닷가가 모두 운치가 있어서, 사진만으로는 구분도 안 된다.

그 다음날이 '4월 16일'의 비극. '세월호 참사'가 진도 근해에서 발생한 날이었다. 일부 일반인을 포함하여 304명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떠났던 앳된 '안산 단원고'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각 방송사의 긴급속도를 보며, 하루하루 숨죽이며 가슴을 쓸어내리고, 눈물을 훔치면서 구조소식을 애타게 기다리던 때였다. 

"이런 후진적인 사고가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다니!" . 구조과정은 우왕좌왕! 수습과정은 지지부진! 책임은 유야무야!  2011년 1월, 소말리아 해상에서의 보여주었던 극적인 해상구출작전 '아덴만 여명작전'이, 진도앞바다에서는 더이상 극적으로 재현되지 않았다. 이때가 온국민의 집단적 상흔이 새겨진 날이라 머리에 생생하다.

가지 위에 매어달린 꽃송이들은 여전히 해맑게 웃고만 있어
우네 우네 목놓아 우네
알록달록 붉은 상모들 끝끝내 만장기 휘날리며 울면서 가네
훠어이훠어이 아주 천천히

- 소율 김희경, '벚꽃축제' 중에서
(세월호 사고 희생 단원고 학생 추모시)

휴대폰을 들었다. "어째, 잘 지내냐!" "잘 사냐!" 서로 반가운 목소리로 동시에 교감을 나눴다. 그 친구 특유의 트레이드마크 저음의 헛웃음이 들렸다. "나야, 뭐 항상 그렇지 뭐",   ""너는?". 그러자, 친구는 아무렇지 않게 "나 병원에서 퇴원한 지 얼마 안 됐다."," 머리에 혈관이 막혀서, 야~, 며칠 죽다 살아났다." 고 했다.

순간 어느 신문에서 우리나라 40~50대 중년 남자들이 뇌경색으로 쓰러진다는 기사가 떠올랐다. 스트레스와 과로, 불규칙한 서구식 습식관이 주원인이란 것도 주의 깊게 읽은 적이 있었다. 나는 잠시 할말을 잊었다.

"그래, 이제 괜찮냐?" 물으니," 수술 잘됐다. 다리로 관을 넣어서 머리로 연결해서 했다 하더라." 담담하게 말했다. "그래, 다행이다".  친구가 "너도 보험이나 들어놔라" 덧붙인다.  "그래!"...... "한번 만나자,  너, 또 쓰러지기 전에  봐야것다" 웃으며 답해주며,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한참이나 그자리에 앉아 있었다.

오늘은, 가끔 미운짓하는 7살짜리 아들녀석과, "로또나 해볼까!" 라고 말하곤 하는, 아내의 일상의 투정이 유독 그리워지는 날이다.


태그:#동아리, #세월호 참사, #아덴만 여명 작전, #소율, #뇌경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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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의 정감과 강인함을 좋아하며, 인간 '종'이 세운 모든 것을 반성하고, 동물과의 교감, 그리고 자연과의 일체를 실현하고자 하며, 지구어머니의 한 생명체으로서 생물학적 다양성과 지구온난화 및 핵탈피에 관심있는, 깨어있는 시민이되고자 합니다~(나주혁신도시 16개기관의 지역사회에 대한 적극적 사회적기여를 이끌어 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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