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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계곡을 따라 걸어 올라가다 보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곳이 노변에 자리 잡고 있는 제1곡인 경천벽이다. 경천벽은 수직절리가 잘 발달한 하식애의 지형적 특징을 보이는 절벽으로 우뚝하게 서 있는 모습이 마치 귀신이 깎아 놓은 듯하다. 바위가 층층히 쌓여서 높이가 몇 백장이 되고 형세가 하늘을 받들고 있는 것 같아서 경천벽이라고 명명되었다.

전망대가 있어서 등산객이나 관광객들이 모여 서서 사진촬영을 하는 곳이 바로 제2곡인 운영담이다. 경천벽에서 도보로 약 20분 거리에 있는 운영담은 하늘의 구름 그림자가 계곡 물 속에 맑게 비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운영담의 이름은 주자의 시 '천광운영(天光雲影, 하늘 빛 구름 그림자)'에서 취한 것이다. 크고 작은 세 개의 조각같은 하식애 밑에는 깊은 소의 연못에 구름 그림자가 여울져 나타나 보인 이의 탄성을 유발한다.

제3곡 읍궁암(泣弓巖)을 지나 3분 정도를 걸어가면, 제4곡 금사담이 나타난다.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모여드는 절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금빛 모래가 물 속에 깔려 있어 붙여진 이름인데, 우암이 머물렀던 암서재가 위에 있고, 주변의 바위에는 우암의 사상이 담겨진 바위글씨가 새겨져 있다. 조선조 학자 임상주의 시를 보면, 금사담 계곡의 흰 모래와 맑은 물이 가져다 주는 자연의 아름다움이 마음에 들어온다.

환장암 옆으로 흐르는 물.
암서재 아래로 비껴 흐르네.
햇빛은 황금처럼 빛나고,
잔잔한 물결이 흰모래를 쓸고 가네.

언제나 텅 빈 산에 있으니
어느 곳이 푸른 바다인지 모르겠구나.
텅빈 산이여, 텅빈 산이여.
산 속에 황제의 영혼이 잠겨 있구나. 

煥章菴邊水
巖棲齋下斜
日照委黃金
漣微曳白沙

常在空山裏
何處是滄溟
空山兮空山
山中有皇靈

암서재 밑의 계곡에서는 멀리 속리산 줄기가 바라다보이고 석양의 풍경은 고즈넉한 것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고고하고 아름답다. 특히 계곡 큰 바위에 갇힌 소(沼)의 물은 우렁차게 굉음을 내며 가파르게 흘러내려가고 있다. 흰 물결이 바위에 부딪치며 마치 푸른 빛깔을 띠게 되는 것은 신의 조화가 아니런가? 속세를 떠난 신성의 공간처럼 빛깔마저도 인간의 색이 아닌 듯 원색 천지로 이루어져 있다. 

금사담에서 한 5분 정도를 걸어올라가면 제5곡인 첨성대가 나온다. 첨성대는 계곡에 있지 않고 정상을 바라보며 숲 속에 자리하고 있다. 높이 솟은 바위에 올라 별을 관측했다고 해서 이름을 첨성대라고 불렀다.

첨성대 앞 다리에서는 전망이 좋아 금사담과 암서재 및 계곡의 푸른 물이 온통 내려다 보인다. 학소대 앞의 다리와 더불어 등산객이나 관광객들이 가장 좋아하는 포토존이다. 특히 첨성대는 바위를 인간이 쌓아놓은 듯 층계를 이루고 있는데, 맨 위의 바위는 출산을 비는 여근석처럼 여성의 음부를 드러내놓은 듯 신비로움을 간직하고 있다. 

첨성대 근처에 있는 제6곡 능운대는 거대한 벽돌모양으로 되어 있어 마치 성곽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물론 가까이 가서 상세하게 들여다보면 동물의 형상을 지닌 듯하다. 오묘한 신의 섭리를 느끼게 한다. 제7곡 와룡암은 능운대에서 약 10분 거리에 있다. 와룡암은 계곡과 거의 붙어 있다. 크고 긴 바위가 마치 용이 드러누워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하여 '와룡암'이라고 명명되었다.

바위에 움푹 들어가서 형성된 포트홀이 약 15m 길이로 용의 모양을 하고 있어서 신비로운 느낌을 준다. 와룡암 바위에는 '와룡암'이라는 바위글씨가 새겨져 있다. 특히 와룡암에서 계곡을 끼고 먼 속리산 정상을 바라보면 속세와 다른 비경을 보는 듯하다. 석양에서의 풍광이 더욱 아름다운 곳이다.

와룡암에서 바라본 화양계곡 석양의 아름다운 모습 -가을단풍이 곱게 물들 때 석양의 모습은 더욱 빛을 발한다.
▲ 와룡암에서 바라본 화양계곡 석양의 아름다운 모습 -가을단풍이 곱게 물들 때 석양의 모습은 더욱 빛을 발한다.
ⓒ 박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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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곡은 화양구곡에서 가장 아름다운 학소대로서 와룡암에서 약 5분 거리에 있다. 바위와 바위틈을 비집고 나온 전나무와 소나무가 자연의 경이로움을 더해준다. 수직절리와 수평절리의 발달로 인한 하식애가 계곡 물과 조화를 이루며 절경을 형성하고 있다. 다리가 놓여 있어 학소대와 산정상 그리고 계곡 물이 탁트인 비경을 품고 있다. 대 앞의 장송이 늘어서 있는데, 옛날에 청학이 새끼를 기르며 둥지를 틀었기 때문에 학소대라고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청학은 전설상의 새로서 날개가 여덟이고 다리가 하나이며 사람의 얼굴에 새의 부리를 가졌다고 하며, 청학이 날아오면 천하가 태평스럽게 된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옛날 사람들은 학소대에서 천상계의 신선과 선녀가 내려와 놀다갔다고 상상한 것으로 보인다. 다리 위에서 바라보면, 빼어난 절경이 선녀의 날갯짓을 보는 듯 신비로움을 자아나게 한다. 

제9곡은 파천인데 계곡 한 가운데 자리 잡은 바위덩어리를 말한다. 흰 바위가 편편하게 퍼져 있어서 옥반을 보는 듯한데, 계곡 물이 바위를 꿰고 흐르는 것이 마치 큰 뱀과 같기 때문에 파천이라 명명되었다. 흰 빛의 화강석 판상절리지형과 넓고 평평한 기반암 하상에 용의 비늘무늬 모양을 연상시키는 부드러운 포트홀은 한 마리의 큰 용이 승천을 준비하는 형상으로도 보여 신비로운 대장경이다. 계곡의 물이 마르는 갈수기에는 바위 면 전체가 드러나서 버선발로 건너 누울 수 있고, 글씨도 쓸 수 있어서 옛 선비들이 놀러와 서예를 즐기며 시를 지었다고 한다.   

화양계곡을 끼고 둘레 길을 걸으며 콧노래를 부르다 보니 어느덧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충북 괴산은 이러한 자연풍광만 아름다운 공간이 아니다. 괴산은 문화유산도 많다. 보물인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마애이불병좌상이 유명하고, 연풍향교와 괴산향교, 그리고 청안향교도 고즈넉하게 자리 잡고 있어 괴산이 학문의 고장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괴산에는 집현전 학자 정인지의 묘소도 있고 홍범식의 고택도 자리하고 있다. 다음 행선지인 독립운동가 홍범식과 그의 아들로서 일제강점기의 유명한 장편소설인 <임꺽정>의 작가 홍명희의 고택으로 발길을 옮겼다.

일완 홍범식 고택 -그 아들 <임꺽정>의 작가인 홍명희의 출생지
▲ 일완 홍범식 고택 -그 아들 <임꺽정>의 작가인 홍명희의 출생지
ⓒ 박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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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완 홍범식(1871~1910)은 독립운동가로 명망이 높은데, 그의 집안도 누대에 걸쳐 큰 인물을 낳았다. 풍산 홍씨인 홍범식은 유명한 혜경궁 홍씨의 집안 후손이다. 그의 조부 홍우길은 한성부 판윤과 이조판서를 지냈고, 부친 홍승목은 이조참의와 병조참판을 지냈다. 홍범식은 진사시에 합격하고 1902년 내부 주사를 시작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혜민관 참서관으로 있을 때 을사조약 체결을 듣고 비분강개를 했다. 1907년 태인군수로 있으면서 아전들의 탐학이 심했을 뿐 아니라 백성들이 의병전쟁과 관련하여 무고하게 잡혀 죽는 일이 비일비재하자 군수로 보임한 의병부대를 진압하려 출동한 일본군 수비대를 설득하여 백성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는데 노력하였다. 또 군수로 재직하는 동안 황무지 개척과 관개 수리사업을 시행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1909년 금산군수로 자리를 옮겨서도 백성들의 개간지를 사유지로 사정하여 주는 등 위민 행정을 폄으로써 칭송이 자자했다고 한다. 일제가 이완용을 지렛대로 한일합병을 조인하려고 하자 재판소 서기 김지섭에게 자녀들에게 미리 써놓은 유서를 담은 상자를 부탁하고 객사 뒤뜰 소나무 가지에 목을 맨 채 자결을 하였다.

여섯 명의 자녀와 장손에게 남긴 유서에서 "기울어진 국운을 바로잡기엔 내 힘이 무력하기 그지없고 망국의 수치와 설움을 감추려니 비분을 금할 수 없어 스스로 순국의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사람으로서 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고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말아라"라는 대쪽 같은 선비정신과 민족의식이 담겨 있는 글을 남겼다.  

홍범식 고택의 안채 -조선조 후기의 양반가옥 구조의 특징은 남녀가 거주하는 공간이 분리된다는 특징을 가진다. 남편은 주로 사랑채에서 일을 보고, 아내는 안채에서 거주하게 된다.
▲ 홍범식 고택의 안채 -조선조 후기의 양반가옥 구조의 특징은 남녀가 거주하는 공간이 분리된다는 특징을 가진다. 남편은 주로 사랑채에서 일을 보고, 아내는 안채에서 거주하게 된다.
ⓒ 박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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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초 홍명희는 부친의 이러한 순국 정신을 잊지 않고 위민정신을 바탕으로 장편소설 <임꺽정>을 집필했다. 홍명희의 출생지는 현재 홍범식 고택으로 되어 있는 '괴산면 동부리 450번지'로 되어 있다. 홍명희의 모친 은진 송씨는 장남 벽초를 낳은 후 산후병이 생겨 3년 후 사망했다. 홍범식은 이듬해 한양 조씨를 재취로 맞아 세 아들과 두 딸을 두었다. 

일찍 어머니를 여읜 홍명희는 계모가 생긴 후 주로 증조모인 평산 신씨의 손에서 자라났다. 벽초는 5세 때 한학에 입문해 8세에 한시를 지었고 11세 때 <삼국지> 등 중국소설을 애독했다고 한다. 이렇게 벽초가 어릴 때부터 고전소설을 탐독한 것은 <임꺽정>과 <수호지> 집필의 토대가 된 셈이다. 홍명희는 13세 때 민씨와 결혼하여 홍기문을 낳았다. 홍기문의 아들이 유명한 북한소설 <황진이>의 작가 홍석중이다.

18세인 홍명희는 괴산에 와 있던 일본인 부부로부터 일어회화를 배우다가 일본유학을 결심하고는 1906년 동경상업학교 예과 2학년에 편입한 뒤, 1907년 봄 대상중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1909년 말까지 그곳에서 수학했다. 일본 유학 시절 벽초는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등 러시아작가들의 작품을 가장 많이 읽었고, 낭만파 시인 바이런의 시들도 애독했다고 한다.

그는 같은 시기 크로포트킨의 <빵의 약탈> 등 급진적인 사상서들도 탐독했다고 한다. 이 무렵 벽초는 이광수, 문일평, 최남선등과 친교를 맺는다. 한일합방에 즈음하여 시국이 악화되자 벽초는 공부를 중단하고 귀국한다. 나중에 이광수가 "그까진 졸업은 해서 무얼해? 그는 나를 보고 이런 소리를 하고 본국으로 갔다"는 증언을 남긴 것에서 확인이 된다.

부친 홍범식의 순국에 충격을 받은 벽초는 1912년 정인보 모자와 동행하여 중국으로 가서 안동현에 체류하면서 한인지사들과 접촉하면서 독립운동의 가능성을 모색하다가 1913년 봄 정인보와 함께 상해로 가서 활동한다. 그 해에 상해 명덕리에 독립운동의 활성화를 위한 청년 교육기관인 박달학원을 설립한다. 상해에서 홍명희는 정인보, 문일평, 조소앙과 절친하게 지내고 그의 권유로 신간회 발기인으로 참여하게 된 단재 신채호, 박은식, 김규식, 신규식 등 거물독립운동가들과도 고락을 함께 한다.

상해활동의 한계를 느낀 벽초는 1914년 광복운동의 자금마련을 위해 남양(싱가포르)으로 떠나 3년 동안 활약하다가 1918년 상해, 북경, 봉천을 거쳐 귀국한다. 1919년 3월 19일 벽초는 고향 괴산읍에서 만세 시위를 이끌다 일경에 피검되어 투옥된다. 1920년 만기출소한 벽초는 병약한 몸에 기울어진 가세를 떠맡아 동부리의 대저택과 토지를 팔고 제월리로 이사한 후 삼십 명 대가족을 이끌고 상경한다.

1924년 동아일보사 취제역 및 편집국장에 임명되면서 벽초는 언론계 생활을 시작하고 1923년 무렵 창설한 사회주의 사상 연구회인 '신사상연구회'를 '화요회'로 1924년에 명칭을 바꾸어 조봉암, 박헌영, 김단야 등과 활동한다. 1925년에는 시대일보로 직장을 옮겨 부사장, 사장으로 근무를 하다가 시대일보가 재정난으로 폐간되자, 1926년 오산학교 교장으로 부임한다. 하지만 1927년 신간회 창립에 몰두하여 지부 123개에 회원 2만에 이르는 거대한 조직으로 성장시키지만, 신간회 회원의 40%가 공산당원으로 일제가 검거에 나서자 신간회는 점차 비타협적 민족주의 경향으로 노선을 전환한 후 일제의 탄압에 의해 1931년에 해체되고 만다. 

1928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잠시 검거된 벽초는 불기소로 풀려난 뒤 대하장편소설 <임꺽정>을 집필하기 시작한다. 주인공 임꺽정은 천민 중에서도 천민인 백정출신으로 못된 양반층과 벼슬아치를 혼내주면서 물건도 빼앗고 처첩도 거느리는 행동을 거리낌 없이 한다. 신간회 활동과 소설 집필에 몰두하던 벽초는 신간회 민중대회 사건으로 검거되어 무려 4년 동안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어 <임꺽정>은 중단된다.

1933년부터 1940년 사이 병약한 벽초는 연재중단과 재개를 반복하다가 1940년 10월에는 <조광>에 1회 연재를 시작하다가 완전히 중단하게 된다. 벽초는 1945년 결성된 조선문학가동맹의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된다. 1947년에는 민주통일당 등 5개 정당을 통합하여 민주독립당을 만들고 위원장에 취임한 후 몇 차례 평양을 방문하고는 1948년 무렵 민주독립당을 이끌고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평양을 간 이후행적은 알려진 것이 없다. 

벽초 홍명희는 <임꺽정>을 집필한 이유로 <삼천리> 1933년 9월호에서 조선의 정조로 일관한 작품을 집필하려고 한 뜻을 다음과 같이 거론하였다.

"그것은 조선문학이라 하면 예전 것은 거지반 일본문학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사건이나 담기어진 정조들이 우리와 유리된 점이 많았고, 그리고 최근의 문학은 또 구미문학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양취(洋臭)가  있는 터인데, 임꺽정만은 사건이나 인물이나 묘사로나 정조로나 모두 남에게서는 옷 한 벌 얻어 입지 않고 순조선 것으로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조선조에 일관된 작품」 이것이 나의 목표였습니다."

홍명희의 생가의 정남향으로 지어진 건물의 안채구조는 전체적으로 정면 5칸 측면 6칸의  'ㄷ'자형으로 'ㅡ'자형 광채를 맞물리게 하여 광채를 합한 안채는 'ㅁ'자형이다. 사랑채는 좌측에 위치해 있으며, 전체적으로 뒷산의 자연경관을 집안으로 끌어들여 조화시키며 오밀조밀한 내부공간을 연출했다.

이 생가 사랑채에서 벽초는 1910년 3·1독립선언의 만세시위를 계획했다. 최근에 지은 것이 완연한 기와집의 대고택은, 독립운동의 명망가 집안으로서 일제의 탄압을 받은 홍범식-홍명희의 이미지와 달라 보여 생뚱맞은 느낌이 들었다.


#화양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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