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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왕시 동네촛불에 참여한 김치하 촌장
 의왕시 동네촛불에 참여한 김치하 촌장
ⓒ 조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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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서울대 학생 박종철. 그는 신념에 가득 찬 투사였을까? 혹독한 고문에도 운동권 선배를 끝내 지킨 열사였을까? 그가 고문으로 세상을 떠난 지 27년이 흐른 2014년 6월, 그가 죽음으로 일군 민주주의가 퇴행하고 있는 유월의 언덕에서 그의 친구에게 "박종철은 어떤 친구였나?"라고 물었다.

수학여행에서 찍은 사진.(아래에서 첫 번째가 김치하 촌장, 두 번째가 박종철)
 수학여행에서 찍은 사진.(아래에서 첫 번째가 김치하 촌장, 두 번째가 박종철)
ⓒ 김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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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철이는 공부를 하거나 학생운동을 하거나 한결같이 성실했다. 고2 겨울방학 때, 종철이가 집 근처의 독서실에서 몇 개월 동안을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공부하는 모습을 봤는데, 무서울 정도로 끈기와 집중력을 발휘하며 공부하는 것을 보고 나는 도저히 못 따라갈 것 같아서 포기했다."

김치하(51)씨와 박종철은 부산혜광고 단짝이었다. 재수생 시절에는 김씨의 서울 누나 집에서 함께 지내며 공부해서 1984년 서울대에 함께 입학했다. 박종철은 언어학과, 김씨는 서양사학과에 진학했다. 그리고 박종철은 운동권 학생이 됐고, 그는 평범한 학생으로 친구를 지켜봤다. 그리고 친구의 죽음으로 인해 그의 삶은 달라졌다. 그에게 "박종철은 어떤 친구였나?"라고 거듭 물었다.

"종철이는 친구들과는 물론이고 운동부와 노는 친구들과도 친하게 지냈다. 당시 고등학생들이 그랬듯이 종철이 또한 술과 담배를 몰래 하는 정도의 일탈을 하기도 했다. 고1 때는 학교 운동장이 좁아서 다대포 해수욕장에 가서 교련 사열 훈련을 했는데 연습이 끝나면 포장마차로 몰려가 라면도 먹고, 술도 마셨다. 그러다 술에 취한 종철이를 집에 데려다 주었다가 종철이 형(박종구)에게 단체로 혼났다."

그에게 "박종철은 어떤 친구인가?"라고 다시 물었다.  

"나에게 종철이는 열사보다는 따뜻한 친구이다. 종철이는 자신의 죽음으로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되고, 민주화를 이루는 동력이 되면서 역사 발전의 몫을 다했다. 그런데 친구가 목숨을 바쳐서 일군 민주주의가 진전은커녕 퇴보하고 있는 현실에 서 있다. 친구에게 미안하고 부끄럽다."

독재정권에 희생된 두 친구와 살아남은 한 친구

부산혜광고 1학년 말 겨울방학에 해운대 포장마차에서 홍합탕에 소주를 마시기 위해 어른 흉내를 냈다. (우측에서 두 번째 박종철, 좌측 첫 번째가 김치하 촌장)
 부산혜광고 1학년 말 겨울방학에 해운대 포장마차에서 홍합탕에 소주를 마시기 위해 어른 흉내를 냈다. (우측에서 두 번째 박종철, 좌측 첫 번째가 김치하 촌장)
ⓒ 김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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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겐 두 친구가 있었는데 두 친구 모두 독재정권에 희생됐다. 한 친구는 박종철, 또 다른 친구는 학과 동기인 최우혁. 최우혁은 1984년 서울대 서양사학과에 입학해 학생운동을 하다 제적됐고, 군에 입대했다가 의문의 자살을 했다. 박종철기념사업회 운영위원인 김씨는 27년째 최우혁열사기념사업회 대표를 맡고 있다.

"종철이 때문에 유가협 사무실을 자주 갔는데, 종철이는 도울 사람이 많은 반면 우혁이는 별로 없어서 우혁이 추모사업에 집중했다. 87년 당시, 종철이 아버님이 서울에 오시면 친구 아들이 편해서인지 저를 수시로 불러서 의논도 하고 심부름도 시켰다. 우혁이 아버님도 저를 자식처럼 대해 주셨고, 결혼식 때는 우혁이 아버님이 주례를 서주셨다."

그는 떠난 친구의 빈자리를 조용히 채웠다. 그는 운동권이 아닌 평범한 학생이었고, 정치인이나 권력자가 아닌 그냥 시민이고, 가장이고, 동네 사람이다. 그에게 "친구 박종철과 최우혁이 50대인 당신에게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사는 게 힘들지만 잊지 말아야 하고, 간직해야 할 무엇이 있다. 80년대에는 민주화를 향한 열망이 있었고, 그 열망이 삶의 가치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얄팍한 처세와 욕망으로 바뀌었다. 야속하고 안타깝다. 그때 깃발을 들었던 종철이의 운동권 동지들 가운데 권력과 명예를 좇아 신념과 양심을 저버린 경우가 있다. 종철이와 우혁이가 그 모습을 본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 과거에 무엇을 했느냐보다는 현재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한 것 같다. 외쳤던 자에 의해 역사가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묵묵히 씨를 뿌린 사람들에 의해 역사는 진전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가장의 임무를 완수한 뒤에 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했다. 

"육십이 넘으면 종철이와 우혁이를 기리는 작은 박물관과 역사교실을 열고 싶다. 두 친구의 진정한 정신은 고문 피해자와 의문사라는 역사적 사실을 뛰어넘어 미래를 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래 세대인 어린이들에게 친구들의 정신을 심어주는 것이 살아남은 나의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인생 2막의 장소는 아내의 고향인 경기도 양평을 염두에 두고 있다. 이것을 10년 프로젝트로 계획하고 있다. "

"미래세대에게 어떤 정신을 심어주고 싶은가"라고 되물었다.

"이웃을 경쟁의 대상으로 삼는 돈 중심 사회가 아닌 이웃을 서로 보듬으며 사는 사람 중심의 공동체 정신을 심어주고 싶다. 종철이가 꿈꾸었던 것은 사람 중심의 공동체 세상이었다. 종철이가 희생하며 뿌린 공동체 씨앗을 꽃 피게 해달라고 미래세대에게 부탁하고 싶다. 세월호 참사에서 드러난 것처럼 민주주의는 훼손되고 부패 무능이 판치고 있지만 나는 믿는다. 세상이 어렵고 힘들지만 언젠가는 전진할 것이라는 희망을 갖는다. 종철이의 정신은 그런 것이다. 독재와 폭력의 어둠 속에서도 역사는 진전한다는 믿음을 종철이는 심어주었다."

모락산 아이들의 힘

그는 IMF가 덮친 1998년 당시, 다니던 회사의 부도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 괴로움을 잊기 위해 안양시민학교 야학교사로 자원봉사 하다가 상근 활동가인 아내를 만나 그해 10월에 결혼했다. 안양민청련 활동가였던 그의 아내가 생협(율목생협)과 공동육아운동에 앞장섰는데, 아내가 임신 중이어서 대신 회의에 참석했다가 얼떨결에 합류했다.

개똥이네 공동육아 회의에 참석하러 갔다가 졸지에 이사장이 된 것이다. 엄마들 틈바구니에서 청일점이 된 그는 최초의 아빠 이사장이 됐다. 그게 억울해서 아빠들을 공동육아 사업으로 이끌어냈고, 8년간 최장수 조합원으로 활동하면서 지역공동체에 관심을 갖고 활동했다. 물론, 동네 아빠엄마들과 토론하고, 고민하는 것보다는 뒤풀이 술자리의 재미가 그를 동네 공동체에 푹 빠지게 했다.

2005년, 그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다. 자신이 사는 안양 평촌의 인근 비닐하우스에서 할아버지와 살던 초등학생이 도사견에 물려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부모의 돌봄을 받지 못한 소년의 처참한 죽음에 충격을 받은 그는 내 자식만 챙기는 삶을 되돌아봤다. 그리고 소외된 아이들을 위한 동네 공부방 '모락산 아이들'을 동네 사람들과 지역단체들의 힘을 모아 2007년 만들고 초대 공동대표를 맡았다.

모락산 아이들은 지역 아이들의 보금자리가 됐다. 집에 가도 반겨줄 부모도 없고, 밥을 챙겨줄 누구도 없는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쳐주는 것은 물론이고, 밥 먹고, 쉬고, 뛰노는 안식처가 됐다. 이 동네 아이들은 개들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됐고, 동네 사람들은 방치된 아이들이 사라진 동네를 안심했다.

그는 후원금 모집책이다. 아이들에게 따뜻한 밥을 먹이기 위해선 운영비가 절실했기에 가방 끈 긴 선배와 친구, 스승들을 찾아다니며 손을 벌렸다. 메가스터디의 손주은, 박종철의 형 박종구, 최갑수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등이 후원에 동참했다. 그렇게 10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모락산 아이들은 상근교사 4명이 29명의 초중고 학생들을 잘 돌보는 지역아동센터로 변화 발전했다.

그의 현재 직함은 '어처구니 촌장'이다. 어처구니는 모락산 아이들 임대건물 지하에 마련한 동네 문화공간이다. 아이들의 관악기, 현악기, 북과 장구 등의 풍물연습 공간이자 동네 사람들이 모여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문화공간으로 마련했다. 원래는 비가 새는 열악한 공간이었는데 그를 비롯한 모락산 아이들 운영위원들이 비지땀을 흘린 결과 어엿한 공간으로 탈바꿈됐다.

모락산 아이들 운영위원회의
 모락산 아이들 운영위원회의
ⓒ 조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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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장인 그에게 "모락산 아이들에 참여한 보람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모락산 아이들이 10년 넘으면서 어려서부터 공부방에 왔던 아이가 학교를 졸업해 군인이 됐다. 군인에게 휴가는 목숨처럼 귀한 시간인데도 동생들의 캠프에 맞춰 휴가 나와서 봉사하고 귀대하는 모습을 보고 공동체 교육의 보람과 기쁨을 느꼈다. 공부방에서 자란 우리 아이들이 사랑을 받고 또, 나누면서 어엿한 사회구성원으로 성장하는 것만 같아서 기쁘다."

그에게 "가슴 아팠던 일은 없었냐"고 물었다.

"모락산 아이들 운영위원으로 활동했던 이주헌 선생(의왕시청 공무원으로 공무원노조에 참여하면서 해직과 복직을 경험)이 작년에 백혈병으로 입원했는데 한 달 만에 돌아가셨다. 급작스런 죽음에 모락산 사람들은 허탈감에 시달렸다. 그런데다 공동대표를 지낸 박정일 시인이 딸을 갑작스럽게 잃었다. 그런데도 자녀를 잃은 고통을 묵묵히 견뎌내며 모락산 아이들을 돌보는 그 모습 보면서 형언키 어려운 슬픔과 감동을 느꼈다. 그의 모습을 보면서 망연자실하고만 있을 순 없어서 힘을 냈다. 박 시인이 모락산 아이들과 어른들을 일으켜 세웠다."

"가슴 아픈 감동"이라고 거들었더니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모락산 아이들은 특정인의 힘과 노력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 공동체의 힘과 노력으로 만들어졌고, 그 원리로 운영되고 있다. 그게 모락산 아이들의 힘이다. 운영위원들과 교사, 자원봉사자들은 함께 모여 밥을 먹고, 막걸리도 마시고, 슬픈 일이 있으면 같이 울고, 기쁜 일이 있으면 함께 웃고, 세월호의 아픔에 동참하기 위해 동네 촛불도 함께 든다. 모락산 아이들의 진정한 힘은 소명의식을 가지고 아이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는 교사와 자원봉사자, 후원자들이다."

경기도 의왕시 내손동 포일성당 부근의 모락산 자락. 밤이면 쓸쓸한 가로등이 켜지고, 아침이면 마을버스를 타기 위해 내달리는 가난하지만 따뜻한 동네에서 그는 모락산 아이들과 모락산 어른들과 함께 살아간다. 그는 뜨거운 깃발을 쥔 적이 없고, 욕망의 금배지나 높은 자리를 넘본 적도 없다. 그저, 동네 사람들과 막걸리 잔을 기울이면서 가난한 아이들이 희망의 꽃으로 피도록 거름이 되려고 애쓰며 살아갈 뿐이다. 아무리 봐도 그는 박종철의 진짜 친구다.

모락산 아이들이 주관한 의왕시 촛불추모회에서 모락산 아이들이 연주를 하고 있고, 김치하 촌장이 불을 밝혀주고 있다.
 모락산 아이들이 주관한 의왕시 촛불추모회에서 모락산 아이들이 연주를 하고 있고, 김치하 촌장이 불을 밝혀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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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박종철, #김치하, #모락산아이들, #최우혁, #6월 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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