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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2월 10일, 찬바람이 매섭게 불던 추운 겨울에 뜨거운 열기를 불러온 사건이 있었다. 철도노조의 파업 둘째 날, 고려대학교 경영학과에 재학 중이던 주현우 학생이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제목의 대자보를 게시한 것이었다.

"하 수상한 시절에 어찌 모두들 안녕하신지 모르겠습니다!"

불과 하루만의 파업으로 직위해제된 4213명의 철도노조 소식. 그리고 파업에 대한 정부의 탄압과 88만원 세대라는 스스로의 정체성. 이런 불안한 시국에 어찌 다들 안녕하게 지내는지, 무관심으로 애써 안녕한척 지내는 것은 아닌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묻는 글이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그의 글에 화답하는 대자보는 마치 봇물 터지듯이 쏟아졌다. '안녕하지 못합니다'라는 고백에서부터 안녕하지 못한 많은 사연과 그 이유들, 그리고 또 다시 '안녕들 하십니까?'라고 되묻는 내용이었다.

'안녕들 하십니까?' 한 권으로 엮은 대자보 열풍

<안녕들 하십니까> 본문 발췌. 대자보의 내용은 물론, 게시되었던 풍경까지 글과 사진으로 자세하게 나와있다.
 <안녕들 하십니까> 본문 발췌. 대자보의 내용은 물론, 게시되었던 풍경까지 글과 사진으로 자세하게 나와있다.
ⓒ 오월의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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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2월, 철도민영화에 반대하며 파업을 주도한 노동자들이 대거 직위해제되었다. 고려대학교를 시작으로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가 붙기 시작한 것도 그 때였다. 이후로 두 달 동안 수백 건 의 대자보가 게시되며 그 열풍이 전국적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시작은 대학생들의 고백이었다. 그동안 학점과 취업을 위한 스펙쌓기에만 열올리며 사회문제에 무관심했던 스스로에 대한 반성이자, 침묵해온 일원으로서의 부끄러운 고백이었다. 내용은 주로 철도노조와 쌍용차 사태, 현대중공업을 비롯한 노동자들의 현실과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 등이었다. 사안을 다루는 정부의 안일한 태도와 민영화 움직임에 대한 비판도 이어졌다.

진주의료원 폐업과 강정마을, 밀양 송전탑 사태도 언급되었다. 중앙대학교에서는 교내 청소노동자에 대한 부당한 처우를 고발하는 대자보도 보였고, 청소노동자를 응원하는 학생의 지지선언도 덧붙여졌다. 등록금 문제를 비롯한 문제를 외면하는 정치권에 대한 규탄도 빼놓을 수 없는 대목이다.

전국 각지로 퍼져나간 대자보는 대학교 게시판을 뒤덮었고, SNS를 통해 중계되기도 했다. 페이스북에서는 '안녕들 하십니까' 페이지가 만들어진지 10일 만에 25만 명이 모여들었다. 이어서 대학교수와 초중고생, 각계 노동자와 해외 유학생들도 자신의 위치에서 '안녕'을 묻는 대열에 동참했다. 이처럼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는 그 자체로 하나의 현상이자 한 마디의 문장으로 사회를 뒤흔든 '공명'이었다.

평범한 인사말에 움직인 마음들

대자보를 책으로 엮은 <안녕들 하십니까>의 표지.
 대자보를 책으로 엮은 <안녕들 하십니까>의 표지.
ⓒ 오월의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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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들 하십니까>는 많은 대자보들 중 200여 건을 추려서 책으로 엮은 것이다. 책을 펴낸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에 따르면, 모든 대자보는 작성자의 동의를 받은 뒤에 본문에 수록되었으며 책의 인세는 우리 사회의 안녕하지 못한 곳에 전달될 예정이라고 한다.

종이 한 장에 적힌 글이 이처럼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데에는 제목으로 쓰인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문장에 있다. 일상에서 평범하게 주고받는 인사말이기에 거부감없이 쉽게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 시대의 대학생으로서 겪는 고민과 하소연을 솔직하게 담아냈기에 더욱 반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많은 사회적 이슈가 즐비한 현실에서 학생이나 노동자의 신분으로 '본분에만 충실하라'는 압박, 그럼에도 소신껏 발언하면 '종북'이나 '빨갱이'라 치부되는 세상. 어쩌면 사람들은 자기검열에 질려버린 끝에 분출구를 찾은 것인지도 모른다. 한 학생의 진심어린 대자보를 기점으로 말이다.

책의 후반부에 소개되는 대자보 중에서는 '성소수자'와 '김치녀'로 대표되는 편견에 맞서는 글도 보인다.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약한 처지에 있거나 소수이기에 쉽게 손가락질 받는 이들도 모두 이 사회의 일원임을 한 폭의 대자보에 풀어놓은 글들이 인상적이다. '안녕하냐'는 짧은 인사로 한국 사회의 다양한 부분이 폭넓게 드러난 셈이었다.

중앙대학교 청소노동자의 권리를 지지하는 대자보는 학교 측이 대자보 1건당 100만 원씩 내도록 법원에 청구한 바 있다(이후 지난 3월 9일 가처분 신청은 취하되었다). 그 뒤 오히려 '학교 측에 불편한 내용을 담은 대자보 게시를 사실상 금지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반응과 함께 중앙대 내 대자보 게시는 더욱 열띤 반응을 보였다.

대자보가 남긴 숙제, 박근혜 대통령이 풀어야

이렇듯 대자보 현상의 종합적인 맥락을 볼 때, '권위주의에 억눌린 개인의 목소리'가 마침내 터져나온 것으로 보인다. 스스로의 안위를 위해 숨죽이고 있던, 혹은 사회의 무거운 압박에 자기검열을 하던 사람들이 대자보를 통하여 각자 쌓여있던 속내를 털어놓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2014년,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가 휘날리던 겨울이 가고 마침내 봄이 왔다. 새해가 밝고 사람들은 다시 제각각 일상으로 돌아갔다. 수개월이 흐른 지금, 우리는 과연 '안녕한' 처지가 된 것일까?

딱히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 '민영화 반대'를 외치며 파업에 참여했던 철도노조는 여전히 정직과 감봉 등의 징계를 겪고 있으며, 밀양에서는 연세 많은 노인들이 여전히 송전탑 건설에 몸살을 앓는다. 여론조작의 증거가 밝혀졌음에도 국정원은 처벌받기는 커녕 또 다른 종북몰이 공안사건으로 국민의 시선을 돌려놓으려 하고 있다.

반값등록금 등 공약은 구호로만 남았고, 학생과 청년들은 일자리를 위해 서로를 밟으며 경쟁해야 한다. 성소수자를 비롯한 계층은 계속되는 편견과 폭력에 시달린다. 대자보를 썼던 고교생은 관심이 잦아든 틈을 타서 석연치 않은 이유로 징계를 당한다. 안타깝게도 아직 많은 사람들의 '안녕하지 못한' 나날은 계속되고 있다. 메아리가 되어 울린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인사말은 곧 힘겨운 국민들이 내는 신음소리와 다름없었다.

수많은 사람이 모여 만들어낸 대자보 현상에서 '무관심을 딛고 안부를 묻는' 행위와 더불어 '나 뿐만 아니라 사회에 속한 타인의 아픔도 돌아보려는' 자세를 엿볼 수 있다. 또한 세대와 계층을 꿰뚫는 통합의 키워드가 포함되어 있기도 하다. 사회 전반의 고충과 문제들이 종합적으로 나열되었던 '안녕하십니까' 대자보는 한국이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를 남긴 셈이다.

그 숙제를 이제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해결해야 하지 않을까. '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를 슬로건으로 내걸었던 후보시절을 떠올린다면, 대통령으로서 국민들의 '안녕'을 위해 일해야 마땅할 것이기 때문이다. '안녕하지 못한' 국민들이 정부와 여당에게 '안녕'을 고하는 날이 오기 전에, 밀린 숙제를 충실하게 해나가는 모습을 진심으로 기대해본다.

덧붙이는 글 | <안녕들 하십니까>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 씀/오월의봄/2014.3./1만8000원)



안녕들 하십니까? - 한국 사회를 뒤흔든 대자보들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 지음, 안녕들 하십니까 출판팀 엮음, 오월의봄(2014)


태그:#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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