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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안녕하지 못한 건데?

작년 봄인가 여름인가, 학교에서 인문학 강좌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 나는 <5월의 기억과 트라우마> 뭐, 이런 주제로 이야기를 했다. 이런 이야기는 이제 광주에서도 오래 전부터 인기 없는 주제가 되어서 강좌를 들으러 오는 사람들은 몇 되지 않는다. 4주 정도로 기획한 또 다른 대중강좌에서 <5월 문학과 윤리적 분노>라는 주제를 내걸었다가 단 한 명의 청중을 앉혀놓고 이야기를 진행한 적도 있었다.(하긴 내가 유명한 작가거나 학자거나 정치인이 아닌 탓도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1980년대는 언급 자체가 금기였던 광주니 5월이니 하는 명제가 이제는 문화적 금기어가 된 것 자체가 시대의 변화를 명료하게 보여주고 있는 참이다. 어쨌거나 나는 분위기가 너무 설렁할까봐 염려되어 학생들 몇을 꼬드겨 듣게 했고, 나머지 대 여섯 분은 자발적으로 참여한 중년의 여성분들이었다.

내 경험을 이야기 하는 도중에 나는 갑자기 목이 메었고 울컥 눈물을 보이기도 했는데, 자리에 있던 내 연배 정도의 여성 한 분이 덩달아 눈시울을 붉히는 일이 있었다. 아니 나와 그 분의 반응의 순서가 바뀌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 분은 중학교에 근무하는 선생이신데, 1980년 5월의 그 비극적인 사건의 와중에 자신과 매우 가까웠던 친구가 죽음을 당했다는 것, 그 이후 좋은 옷 입지 않고 좋은 음식 먹지 않으며 살아왔다는 것이었다.

많이 무뎌진 지금은 아니지만, 그때는 가슴이 한동안 먹먹했었다. 그랬구나, 나는 사실 다 잊었는데, 저렇게 사시는 분도 있구나, 했다. 부끄러움이라고 규정할 수는 없었으나(나는 이 '부끄러움'이라는 말을, 특히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이라는 수사를 싫어한다. 너무나도 오염된 언어가 되어버린 탓이다.) 아무튼 무언가 숙연해지면서 잠깐 동안 내가 살아가는 모양을 돌아보기는 했었다. 이것이 1970~80년대를 견뎌내야 했던 세대의 보편적 정서가 아닐까싶다.

어쩌면 지금 곳곳에 대자보를 내다 붙이는 학생들의 마음이 그런 것 아니었을까? 성적과 취업과 군대와 연애 때문에 잊고 지냈던, 부러 외면했던 이웃과 사회 곳곳의 신음소리에 이제야 비로소 귀가 열리기 시작한 게 아니었을까?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관심과 이기주의로 단단히 무장하고 살아가던 아이들이, "나도 아프다, 너도 아프냐?" 하는 작은 위로와 연대 의 손길을 내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일정하게는 그런 심정들이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스스로의 위안일 뿐인 제스처(gesture), 일종의 플래시몹(flash mob)정도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하더라도 연애편지도 쓰지 않는 아이들에게 대자보를 내다 붙이게 만든 건 이 시대가 불안의 정점에 와 있고, 우리사회가 깊은 균열을 보이고 있다는 징표가 아닐 수 없다. 많은 책임이 현실 정치인들에게 있고, 그보다 더 많은 책임이 지금 대통령 자리에 있는 사람의 몫이라고 나는 생각한다.(혹은 그 사람에게 투표한 사람들의 몫이라고도 말하고 싶지만, 나는 꾹 참기로 한다. 하긴 누가 집권을 했는가와 상관없이 우리사회의 균열은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다. 다만 새로운, 그러나 전혀 새로울 것 없는 정부가 집권 1년차를 지나면서 대자보라는 낡으면서도 새로운 사회문화적 현상이 생겼다는 것이 문제의 심각성을 더하고 있다.)

언젠가 쿠바와 관련한 다큐를 보면서 느낀 게 하나 있다. 다 아는 것처럼 미국의 봉쇄조치 때문에 쿠바는 여전히 가난한 나라에 속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공장에서는 생산성과 효율성을 위해 새로운 기계를 도입할 법도 한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낡은 기계가 잦은 고장을 일으킬 때마다 그 기계를 수리해서 쓴단다. 왜냐하면 새로운 기계를 들여오면 대신 몇 사람의 노동자를 해고해야 하니까 서로의 일자리를 나누기 위해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쿠바사람들은 평균적으로 가난하지만 그 가난이 크게 불편하거나 고통스럽지 않다는 것이다. 능력주의가 최고의 가치로 여겨지는 한국사회에서 살고 있는 내겐 참으로 경이로운 상황이었다.

정영목이 번역해서 은행나무에서 출판한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의 책 <불안>의 내용을 조금 인용하면, 자동현금인출기(ATM)는 1968년에 개발되었는데 그로부터 10년 후 세상의 ATM 숫자는 5만 대로 늘어났으며, 2천년에는 백만 대로 늘어났다. ATM 한 대는 37명의 은행 출납계원이 하는 일을 대신 한다. 미국에서는 1980년에서 1995년 사이에 일반인을 상대하는 은행 업무에 종사하던 노동자들 가운데 반 정도인 50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는데, 이 새로운 기계의 발명이 한몫 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두 가지 사례 중 경제적 효율성을 따지는 시장체제로 일찌감치 편입되었고, 오늘날 우리사회 균열의 가장 큰 원인은 경제적 불안(좀 더 정확하게는 고용불안)에서 기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어느 시대든 교역과 교환과 거래가 이루어지는 장으로서의 시장이 존재했기 때문에 시장은 자본주의만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정체성을 규명하는 데 있어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모든 것의 상품화와 시장 의존성, 특히 시장이야말로 자본주의를 이해하는 키워드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시장이 오직 자본의 측적이라는 관점에서만 합리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라 할 때, 자본주의체제는 빈부격차의 확대를 재생산해 내는 폭력적 체제라 할 수 있다. 더욱이 기업가와 노동자 모두 이러한 시장논리에 종속되어 있는 한, 기업이든 국가든 경제공동체의 번영이 그 구성원의 끝없는 희생을 통해서만 달성되고 유지될 수 있다는 인식은 결국 각자의 이익을 위한 대립적 투쟁-폭력을 내재화하고 있다.

세계자본주의의 반(半)주변부에 속한 한국사회가 빠른 속도로 세계시스템에 흡수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며, 이와 함께 안으로 중심부에 자본과 권력이 집중되는 것은 당연해 보이기도 한다.(그런데 정말 당연하기만 한 것일까?) 따라서 주변부 지역의 소외 현상은 그 어느 시기보다 두드러지게 된다. 전지구적 자본주의는 주변부적 다양성, 지역적 다양성을 규격화하거나 표준화하여 모든 사회 체계와 문화를 동질화하려 한다. 즉 사회 전체에 대한 효율적인 관리를 목표로 하는 사회 시스템이 형성되면서 중심부의 비대화와 주변부의 빈곤화라는 양상이 뚜렷해지고 있는 것이다.

한탄이었는지 푸념이었는지 알 길은 없지만, 선출권력이었던 노무현 대통령이 권력은 이미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언급했던 게 오래전 일이다. 기업 경영성과 평가기관인 시이오(CEO)스코어에 따르면, 삼성그룹과 현대차그룹의 2012년 매출액 합계는 476조원으로 규모만 단순 비교할 경우 국내총생산(GDP)의 35%에 이른다. 이 비율이 2008년에는 23.1%였던 점에 비춰 보면 두 그룹으로의 쏠림 현상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두 재벌그룹이 우리사회의 명운을 틀어쥐고 있는 형국이 된 것이다. 그러자니 삼성그룹이 각 대학에 총장추천학생들을 보내달라고 채용예정인원을 할당해 주는 폭력적 요구가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는 것이다(사회의 비판적 여론에 화들짝 놀란 척 한 삼성이 그러한 방식을 거두어들이기는 했으나).

대만이나 오스트리아나 독일과 같은 나라의 경우 우리와 같은 대재벌그룹이 나라 전체의 명운을 틀어쥐고 국가위에 군림하는 게 아니다. 저들 나라의 경쟁력 있는 중소기업 중심의 경제구조가 훨씬 더 많은 고용을 창출하고 소득재분배가 용이하다는 사실에서 우리가 배울 점은 없는가. 기업 간의 상생과 협력 역시 그러한 경제구조가 훨씬 더 잘 되고 있다는 사례는 충분히 알려져 있지 않은가. 그러니까 나는 지금 우리사회의 균열이 이 사회경제적 불평등이라는 폭력적 구조에서 기인하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중이다. 예로부터 거의 모든 민란은 이 먹고사는 문제의 고단함에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물론 대학생 아이들이 써서 내다붙인 대자보들에는 우리사회의 여러 문제들, 그러니까 국가기관의 불법대선개입문제, 강정마을의 해군기지 건설강행과 밀양 송전탑문제, 철도노조의 파업과 공적자산의 민영화문제, 각급의 비정규노동자 문제 등이 거론되고 있다. 더불어 취업과 생활의 불안을 호소하는 내용들도 있다. 나는 그 모든 문제 제기의 근원에는 우리사회의 폭력적인 불평등의 구조가 놓여있다고 믿는다. 정치도 학계도 언론도 이러한 문제에 눈과 귀를 닫고 상황에서 아이들은 그리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문제의식을 대자보를 통해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계간 창작21에 개제한 글입니다.



태그:#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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