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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릴 적에 우리 집에는 소가 많았다. 내 친구들의 집에는 농사용으로 소가 한 마리 정도 있거나 혹은 없거나 했지만, 우리 집은 두세 마리 정도는 늘 있었고, 명절을 앞두고 좀 더 늘어나곤 했다. 서너 마리는 보통이었고, 많을 때는 다섯 마리까지 있었다.

당시만 해도 어느 집이나 소는 그 집 재산 목록 1호다. 우리 집에서는 특히 소를 상전 대접을 해줄 정도로 귀하게 여겼는데 알고 보니 그 소의 일부는 우리 것이 아니라 남의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임대 소 사육자였다. 익산 도수장(屠獸場)에서 명절 때 팔 쇠고기용 한우를 맡아 키워 주고 있었던 것이다. 명절에는 으레 쇠고기 수요가 늘어나기 때문에 명절 직전에는 항상 소 값이 오르게 마련이다. 그래서 도수장은 설이나, 추석 특수에 대비하여 값 오르기 전에 몇 달 전부터 미리 미리 소를 사 둔다. 그리고 그 소들을 인근 지역의 믿을 만한 농부들에게 맡겨 키우도록 하는 것이다.

명절에 대비하여 한우를 사 모으고, 이를 적당한 사람들에게 맡기는 것은 도수장 입장에서는 년중 가장 큰 사업일 것이다. 그래서 도수장 소를 키워주는 임대소 사육은 수입이 꽤 좋은 일이었다. 그렇지만 도수장 임대 소는 맡고 싶다고 해서 아무나 맡는 것이 아니었다. 한 마을에 한두집 정도나 혜택을 볼 정도로 경쟁이 치열했다.

소를 맡은 농부는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첫째, 그리 길지 않은 기간을 효과적으로 이용해서 도수장측에서 만족할 정도로 소를 비육시켜야 한다. 둘째, 맡겨진 소를 병들지 않도록 건강한 상태로 납품해야 한다. 이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장기간에 걸쳐서 쌓아 둔 신용있는 농부가 아니고는 맡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거의 해마다 빼놓지 않고 익산도수장 임대 소를 맡을 정도로 믿음직한 프로 농사꾼이었다.

아버지는 맡은 소를 잘 키우기로도 유명했지만, 사실 아버지의 능력은 돈이 될 만 한 소를 잘 고르는데 있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2~3학년 무렵, 대야 우시장에서 아버지가 소를 고르는 모습을 따라가서 본 적이 있었다. 그때 아버지가 꽤 오랜 시간 공들여 꼼꼼하게 소를 살피던 것이 기억난다.

먼저 전체적인 외관으로 크기와 체형을 보았다. 그 다음에 소의 등을 문지르면서 털의 모양이나, 윤기의 정도, 색깔에 대해서 평가를 했다. 그리고 허리를 숙이고 배 부분을 올려 다 보았다. 이어서 어께 벌어짐이라든지, 다리와 발굽을 보았고, 엉덩이쪽을 살피면서 생식기를 벌려 보기도 했다. 양쪽 뿔을 잡아보고 "천우각 (天牛角)이라... 힘깨나 쓰겄네그려..." 혼잣소리를 하기도 했다.

소의 눈꺼풀을 쳐들어 눈깔색을 살피고, 귓털을 헤쳐 귓속까지 봤다. 이때 눈빛이 탁하고, 눈이나, 귀 주위의 털이 젖을 정도로 지나친 습기가 있으면 건강하지 못하다 했다. 마지막으로 입을 벌려 입안 구석구석을 들여 다 보았다. 이때 이빨 수를 세어 소의 나이를 가늠하고, 입속을 살펴 건강 상태를 체크한다고 했다.

아버지는 소를 간색하다가 소에게서 질병의 감염이 우려될 만한 결점을 발견하면 그 즉시 주인에게 원인과 상태를 물어 확인하였다. 이때 납득할 만큼 충분한 해명이 안 되거나, 소를 팔아먹기 위한 거짓말이라고 판단 될 경우에는 흥정을 중단하고 미련없이 돌아섰다. 아버지가 돌아 설 때는 그 서늘하기가 마치 한겨울에 쌩하니 찬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소 주인이 흥정의 끈을 다시 붙잡기 위해 다급하게 아버지를 쫒아가 사정해 보지만, 한번 돌아선 아버지의 발길을 돌릴 수는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보기에 그 흠결이 소의 성장에 결정적 하자가 아니라고 판단될 경우 그것은 소 값을 깎는데 아주 좋은 빌미가 되었다. 이때가 소의 거래에 있어 가장 중요한 순간이다. 짧은 시간에 정확하고 단호한 판단을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확신이 서면 아버지는 솔직하고도 지혜롭게 주인을 설득하여 가격을 깎곤 했다. 아버지가 소를 살 때 간혹 익산도수장 사장이 동행하는 경우가 있는데, 소에 관해서는 아버지보다 몇 수위의 전문가인 그가 보기에도 아버지의 판단이 맞았음을 인정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이런 재주를 바탕으로 소를 자주 사고팔기를 반복하여 이익을 남겼다. 그러다 보니 전라북도 일대 이곳저곳 우시장을 많이 다녔다. 가깝게는 대야, 임피, 회현, 황등, 함열의 오일장은 물론 만경강을 건너서 김제, 만경, 신태인까지도 다녔다. 가끔은 멀리 부안, 고창, 정읍장까지 가신 적이 있다고 들었다. 지금은 우시장에 동물 운반용 전용차량이 있어 일정한 비용을 내면 이를 이용할 수 있다. 그러나 아버지가 우시장 출입하던 당시에는 거리가 가깝든지 멀든지 간에 다른 수단은 없었다. 무조건 소를 끌고 걸어야 했다.

장날이면 아버지는 첫 새벽에 소에게 여물을 든든하게 먹인 후 집을 나섰다. 비교적 가까운 지역이라면 아버지는 오후 이른 시간에 돌아왔다. 하지만 먼 곳이라면 밤이 늦어야 오시곤 했다. 그렇게 늦는 날이면 나는 아버지가 오시는 길목으로 마중 나가서 아버지를 기다렸다가 같이 돌아오곤 했다. 아버지가 도착하는 시간은 정해진 것이 아니므로 미리 여유있게 나가는데, 한 곳에 가만히 있기 보다는 아무래도 조금씩 아버지가 오는 방향으로 가게 된다. 그래서 대개의 경우는 애초의 장소보다 훨씬 더 멀리까지 가게 된다.

캄캄한 밤중에 아무도 없는 벌판이나 외딴 산 밑에 나 혼자 서서 언제 오실지 모르는 아버지를 기다리는 일은 아직은 어린 나로서는 여간 무섭고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럴 때면 나는 아버지가 아직 오실 때가 아닌 것을 알면서도 무섬증을 떨치기 위해서 일부러 손바닥을 모아 "아부지~~~~" 하고 소리치기도 했다. 몇 십 번이나 그렇게 매아리없는 외침이 허공을 가르던 끝에 드디어 어둠 속 저편에서 "유석이냐?" 하는 아버지의 대답과 더불어 이윽고 들려 오던 딸랑딸랑 말갛게 울리는 워낭소리는 얼마나 반가웠던가… (계속)


태그:#워낭소리, #소, #우시장, #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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