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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을 맞았다. 모두가 고생스럽지만 고향을 찾아가고 반가운 가족과 친지들을 만난다. 나도 고향이 부산인 관계로 가족들과 함께 부산을 다녀왔다. 열차표를 구하지 못하여 고속버스로 다녀왔다.

명절에 고속버스로 가는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이다. 운전하고 가는 것은 엄두도 나지 않는다. 부산가는 길은 매우 힘들었지만 서울로 돌아오는 길은 쉬웠다. 그래도 7시간씩 고속버스에서 부대끼는 것이나 겨우 볼일만 볼 수 있을 정도로 복잡한 휴게소에 들리는 것은 힘든 일이다.

나는 부산을 떠나 서울에서 생활한 지 벌써 30년이 넘었지만 명절이나 부친 기일에 부산을 가지 않은 때는 없다. 그래서 부산가는 길이 힘들지는 않다. 그러나 가족들은 그렇지 않다. 장거리 여행에 익숙하지 않고 부산도 낯선 곳이다. 그래서 고향으로 이동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경험이다. '여행'이 아니라 '이동'인 것이다. 여행 도중에 만나는 신비로움이나 즐거움, 설레임... 이런 것은 없다. 오로지 목적지에만 도달하고자 하는 생각만이 지배하는 이동일 뿐이다.

그래도 고향을 가면 즐거움이 있다. 물론 이 즐거움이 여성들에게는 그리 크지 않고 오히려 고통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어쨌든 가족과 친지들을 만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이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매번 생각한다. 좀 더 여유롭게 살면서 가족과 친지들을 더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다시 부산을 벗어나 서울로 오면 나를 둘러싼 환경과 대결한다고 삶의 여유는 실종된다.

물론 원래 성격이 그리 여유롭지 못하고 강퍅한 점이 큰 원인이다. 가족이나 친지에 대한 사랑이 부족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이 닥치는 문제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개인 성격과 함께 사회 시스템의 문제가 된다.

노동자∙자영업자∙학생 모두가 장시간 노동

우리는 삶의 여유를 어느 순간 잃어 버렸다. 모든 것이 각박하고 모든 것이 여유가 없다. 일례로 한국 사람들의 노동시간은 OECD국가 중에서 두 번째로 많다. 2011년 현재 평균 2090시간이다. 이것은 OECD의 평균인 1765시간보다 무려 325시간이 많은 것으로 8.1주 이상 더 일하는 것이 된다. 한국 사람들의 노동시간은 10년 사이에 500시간 이상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세계 최고 수준이다.

학생들 역시 장시간 노동에 시달린다. 한국에서 공부는 단언컨대 노동이다. 장시간 노동을 통해서만 극복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한국의 공부이다. 이러한 장시간 노동을 정규 학교에서는 충분히 제공하지 않으니 사설학원에 몰린다. 장시간 학습, 과도한 노동에 시달리는 고등학생들을 보면 그래서 너무 안타깝다.

자영업자들은 어떨까? 나의 형님은 부산에서 식당을 하신다. 식당의 역사도 30년 가까이 되고 맛집으로 소문도 났다. 그런데 하루에 거의 16시간을 일한다. 1달에 두 번 쉬니 한달에 노동 시간이 16×28=448시간이 되고, 1년이면 5000시간이 넘는다. 타고난 체력으로 어려움을 극복하지만 하루하루가 힘들고 또 힘들다. 이런 형님을 뵈면 도저히 놀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사람들끼리 만나면 '열심히 살아라', '열심히 살자'고 하면서 서로 격려한다. 이 정도면 사회 전체가 거의 일 중독이라고 할 만하지 않을까? 삶의 여유나 질은 노동자나 학생, 자영업자 입장에서는 생각하기조차 힘들다.

'삶의 여유' 상실은 구조적문제... 경제민주화∙복지로 풀어야

이 문제는 분명히 사회구조적인 문제이다. 장시간 노동을 해야만 겨우 기업이 운영되고 장시간 장사를 해야 조그마한 식당도 겨우 유지된다. 장시간 공부를 해야만 겨우 대학에 갈 수 있다. 제도적으로 보면 사회경제 시스템의 낙후성에서 기인하는 것이고 지정학적,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김영명 교수가 분석한 바와 같이 한국사회의 단일성과 밀집성에 기인하는 것이다.

사회경제 시스템의 낙후성은 최근 '갑의 횡포'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점차 강해지는 승자독식의 사회 분위기를 낳았다. 자본의 힘은 점점 강해지고 이를 통제할 만한 노동조합이나 사회조직은 약해지고 있다. 그리고 국가는 의식주와 교육 등 인간생활의 기본적인 욕구를 해결하지 않고 또 해결하지 못한다. 현재의 생활에서부터 미래의 투자까지 모두 개인이 책임져야 하는 사회가 된 것이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우리는 경제민주화, 복지라는 중요한 과제에 대해 합의를 했다. 경제민주화는 단순히 성장이 아닌 복지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다. 경제민주화는 사회경제시스템을 개혁하여 함께 사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며 지속가능한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지난 대통령 선거 당시 여야 후보 모두가 경제민주화를 가장 중요한 공약으로 내건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경제민주화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지난 이명박 정부 5년 동안 4대강 사업을 한다면서 허비한 시간도 아까운데 다시 5년을 허비하게 생겼다. 안타까운 일이다.

사회경제 시스템의 낙후성은 한국 사회의 특징인 단일성과 밀집성으로 증폭된다. 우리사회는 다양한 가치관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이다. 모든 것을 줄세우는 사회이다. 자본이나 국가의 힘에 의해서 말이다. 최근 삼성이 총장추천제를 한다고 하면서 전국의 대학을 평가하고 한 줄로 세운 것은 이러한 현상의 한 표현이다.

우리사회는 단일성과 밀집성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에 획일적이고 집중적이며 극단적이며 조급하다. 사회경제 시스템의 문제는 어느 나라에나 있기 마련이지만 이것은 우리 사회의 특징인 단일성과 밀집성 때문에 증폭된다. 그리고 사회경제 시스템의 문제가 우리의 획일성과 집중성, 극단성과 조급성, 역동성을 강화하기도 한다.

이를 완화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선 제도개혁이 필요하다. 경제민주화로 대표되는 사회경제적 개혁이 시급한 것이다. 그리고 상호 존중과 연대를 강화해야 할 것이다. 제도개혁이 중요하지만 그러나 제도개혁만으로는 삶의 여유를 찾기 어렵다. 더구나 박근혜 정부 아래에서 경제민주화를 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상호 존중과 연대가 더욱 필요하다. 인간이라면 자신을 포함하여 누구에게나 삶의 여유를 찾을 권리, 쉴 권리가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이를 존중해야 한다. 삶의 여유를 위한 조건도 함께 만들어야 한다. 보다 나은 삶을 위해 파업하는 노동자를 존중해야 하고 보다 평등한 대우를 받으려는 자영업자들의 노력을 존중해야 한다.

이러한 상호존중과 연대의 정신이 삶의 여유를 만드는 가장 큰 인프라이다. 명절 때에만 이런 생각이 들지 않도록 상호존중과 연대의 정신이 항상 우리 사회에 넘치기를 희망한다.

덧붙이는 글 | 이 칼럼은 한국미래발전연구원 홈페이지(www.futurekorea.org)에 동시 게재합니다. 김인회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민주화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사법위원장, 참여정부 청와대 시민사회비서관 등을 지냈으며 <문재인 김인회의 검찰을 생각한다>(2011) 등의 저서를 냈습니다.



#삶의 여유#경제민주화#상호존중#김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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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미래발전연구원(http://www.futurekorea.org/)은 민주주의와 한국사회의 지속가능 발전을 위한 진보적 정책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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