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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하기로 했던 선배 화가, 고갱이 예정보다 일찍 떠나자 자신의 귀를 잘라 그에게 보냈던 남자, 결혼은커녕 제대로 연애도 못 해본 지독하게 불운했던 남자, 자처해 정신병원에도 입원했지만, 권총으로 삶을 마감한 불행한 남자, 화가 빈센트 반 고흐다.

화가로 살았지만 살아 생전엔 그림 한 점 제대로 팔아보지 못한 비운의 예술가였다고 한다. 딱 한 점 그의 말년에 우리 돈 가치로 하면 약 40만 원 정도에 팔아 본 적이 있었다고. 서양미술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한사람으로 손꼽히는 그의 그림은 경매에서 한 점에 580억 원을 호가하는 것도 있다고 한다.

한 쪽 귀가 잘린 채 자폐적으로 어딘가를 바라보는 그의 자화상에서 모진 풍파를 겪었지만 세상과 타협하기 싫은 한 남자의 고집이 보인다. 반면에 짙고 밝은 초록과 노랑의 색깔은 따뜻해서 불행한 그의 삶이 더욱 애틋하다.

고흐보다는 한 세기쯤 전에 우리나라에도 기행(奇行)을 일삼은 화가가 있었다고 한다. 물론, 실력도 뛰어나서 알 만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아주 유명한 화가라고 저자는 말한다. 후대에 전해지는 그림이 거의 없다보니 실력에 비해 빛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의 자화상을 보면 그 또한 비범한 예술가임에 틀림이 없어 보인다. 한쪽 눈은 감은 채 찌그러져 있는데 그 이유가 한 세도가가 그가 그려준 그림에 대해 트집을 잡자 '네 까짓 놈의 그림을 그려주느니 맹인으로 사는 게 낫다'며 제 손으로 한 쪽 눈을 찔러버렸다는 것이다. 열흘을 굶다가 그림 한 점을 팔았는데 술을 사 마시고 엄동설한에 동사하고 말았다는 졸기에 가면 현실에 타협하지 않는 예술가의 삶이 비감을 불러일으킨다.

지난해 12월 초에 나온 신간, <그림으로 들어간 사람들>(이여신 지음, 예문당 펴냄)을 읽으면서 새삼 알게 되는 내용들이 많다. 저자는 중세시대부터 르네상스시대를 거쳐 고전주의, 낭만주의, 계몽주의 등 유럽과 영국의 걸작들을 당시의 이야기와 함께 소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최북과 같은 화가와 고구려시대의 벽화, 신윤복과 김홍도의 풍속화, 그리고 정조의 화성행차를 묘사한 행궁도와 같은 역사화 등을 우리의 국사와 함께 소개하고 있다.

강희제, 테레지아, 진주귀고리를 한 소녀, 단오풍정, 루이14세, 엘리자베스1세, 잔다르크, 미인도, 나폴레옹, 윤두서, 사신도 등의 그림이 실린 표지. 책 속엔 그들의 이야기가 한 보따리씩이다.
 강희제, 테레지아, 진주귀고리를 한 소녀, 단오풍정, 루이14세, 엘리자베스1세, 잔다르크, 미인도, 나폴레옹, 윤두서, 사신도 등의 그림이 실린 표지. 책 속엔 그들의 이야기가 한 보따리씩이다.
ⓒ 예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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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은 초상화 또는 인물화에 이야기의 초점이 맞춰져 있는데 설명과 함께 보는 그림의 주인공과 눈을 맞추며 의미를 새기는 일은 흥미롭다. 왕비를 다섯 번이나 갈아치우며 권위를 과시했던 15세기 영국 왕 헨리 8세는 알고보니 유럽의 가톨릭과 절교를 선언하고 영국성공회의 시조가 되는데, 소개된 초상화를 보면 꾹 다문 작은 입, 넓적하면서도 각진 사각턱에서 강한 자신감이 보인다.

'짐이 곧 국가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권위를 한껏 뽐낸 것으로 유명한 인물, 루이 14세다. 하얀 레깅스에 타이즈, 그리고 굽이 빨간 구두를 신고 풍성한 검은 가발에 화려한 망토를 걸친 초상화 속의 그는 프랑스의 탐미주의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남자로서 보기엔 딱 광녀(狂女)느낌이다. 몸과 입에서 심한 악취를 풍겼다고 하니 화려한 베르사이유 궁전의 악취가 내 코에까지 전해오는 느낌이다.

루이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어머니로 알려진 마리아 테레지아의 초상화를 보면 지금의 기준으로 봐도 그 미모가 대단하다. 한 마리의 사슴을 연상시킨다. 초등 의무교육을 실시하고 개병제를 도입했으며, 신분이 천한 병사들에게도 급료를 주어 생활을 안정시키는 등 신성로마제국의 황후로서 그녀의 업적 또한 대단했다고 하니 요즘 시쳇말로 엄친녀라 할 만하다.

역사상 최고의 '악녀'로 불리는 여인, 청나라 말기 서태후의 초상화도 등장한다 옷이 이만여 벌이나 되고 그녀를 위한 주방장만 128명을 두며 사치와 향락을 일삼았다는 그녀는 청일전쟁 당시 군자금으로 화려한 정원인 이화원을 지었다고 한다. 그림 속 서태후는 이목구비가 반듯해 보이지만 가뜩이나 입 밑 턱의 길이가 짧아 보이는데 입을 앙다물고 있어 한층 미욱해 보인다.

<그림으로 들어간 사람들>을 읽고 보다보면 천오백년 전 삼국시대에 당나라에 조공을 바치러 간 사신들의 모습을 '당염립본왕회도'라는 그림에서 만날 수 있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사신들의 나이, 외모 등을 보면 세월의 간격을 넘어 대화라도 나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우유를 따르는 여인'으로 유명한 네덜란드 화가, 요하네스베르메르의 작품 '진주귀고리를 한 소녀'라는 작품도 만나 볼 수 있는데 저자의 설명으로는 이 작품이 '네덜란드의 모나리자'라고 불린다고 한다. 설명을 읽고 다시 보니 미소를 짓는 듯 마는 듯 또는 왠지 해맑은 듯 보이는 눈빛에서는 서글픔도 읽힌다.

조선후기 천재화가 신윤복의 그림 <미인도>를 보면서 조선시대의 미의 기준을 읽는 것이 재미있다. 30가지나 되는 미인의 기준을 보자. 살결, 치아, 손은 희어야 하고, 눈동자, 눈썹, 속눈썹은 검어야 하며, 입술, 볼, 손톱은 붉어야 한다. 목, 머리, 팔다리는 길어야 하고, 치아, 귀, 발은 짧아야 하며, 엉덩이, 허벅지, 유방은 투터워야 한다. 그리고 손가락, 목, 콧날은 가늘어야 하고, 코, 머리, 유두는 작아야 한다. '미인도'속의 미인을 다시 보니 그 기준에 대체로 들어맞아 보인다. 당시 쌍거풀이 있으면 두 집 살림을 한다고 믿었다는 설명이 재미있다.

악취를 풍기던 루이14세는 아카데미를 만들었는데 그림에도 위계를 두었다고 한다. 역사화, 초상화, 풍경화, 풍속화 등으로 그 순서를 정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러한 위계가 존재했다면 김홍도의 '고기잡이'나 '대장간의 풍경', 또 '씨름도'와 같은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대부분 평민이하 계층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신윤복의 '단오풍정'도 마찬가지겠다. 그런데 이런 그림들을 보면 풍자와 해학이 넘치고 사실적인 묘사를 대하면서 당시 상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림 속의 사람들과 풍경, 풍속은 시간차를 두고 우리 앞에서 아른거린다. 그림 속 미인, 장군, 황제, 왕비들의 표정과 옷차림에서 여러 가지를 알아낼 수 있다. 역사적 사건을 기록한 역사화에서는 당시의 희로애락을 함께 한다. 그림이 주는 즐거움이다.


그림으로 들어간 사람들 - 인물화 속 사람들에 얽힌 흥미진진한 역사적 이야기들

이여신 지음, 예문당(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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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헨리8세, #진주귀고리, #해부학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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