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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자 <한겨레> 토요판 '생명'에 동물보호단체 동물사랑실천협회와 페타(PETA, 동물을 윤리적으로 대하는 사람들)가 공동으로 주최한 '사랑을 입다' 패션쇼를 보도한 기사(관련기사 : "하얀 토끼털이 따뜻하십니까")가 실렸다.

11월 24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섬유센터빌딩에서 열린 이 패션쇼는 모피, 가죽을 비롯한 동물성 원단을 이용한 패션이 야기하는 동물학대를 알리고 대안을 제시하는 '인조모피' 패션쇼였다. 

이 기사에 달린 4천 개가 넘는 댓글 중에는 동물권, 생명존중의식 성숙의 계기가 된 이번 행사에 대한 환영이 많았지만, 동물의 고기는 먹으면서 털가죽 사용에 반대하는 건 이중적인 태도라는 의견도 상당수 있었다.

어떤 산업이 동물에게 가하는 학대를 중단시키려는 운동에 반발하는 세력이 동물에 대한 그 밖의 학대를 거론하며 문제의 본질을 흐리는 건 새로운 일이 아니다. 그들은 개식용이나 모피 반대가 소, 돼지, 닭은 마음껏 먹어도 좋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고 왜곡시키고, 동물을 먹지 않는 채식주의 운동에 대응할 때는 '식물의 고통'을 주장하곤 한다.

노동 및 비용 절감, 효율성 극대화를 기반으로 하는 대량생산, 소비체제에서 동물을 수단으로 하는 모든 산업은 동물학대 산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현실에 비추어 볼 때, 모피에 반대하려면 고기도 먹지 말라는 주장이 완전히 틀린 건 아니다.

어떤 착취에 대한 반대는 여타 착취에도 반대하는 실천을 수반할 때 훨씬 설득력을 얻기 때문이다. 복날에 "개고기 대신 삼계탕을 드시라"는 일부 애견인들의 권유가 "내가 개를 예뻐하니까 당신도 개를 먹지 말라"는, 자기애를 개에게 확장시킨 이기심으로 느껴지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완벽하지 않으면 반대할 자격도 없다는 사고방식에는 세상의 모순을 합리화하고 가능한 실천을 단념시킨다는 문제가 있다. 사람이 살면서 쓰레기를 배출하고 환경을 오염시키는 걸 피할 수 없는데 일회용품 사용을 줄이는 게 무슨 소용이냐고 말하는 것과 같다. 

내 고장 불우이웃을 돕는 사람에게 전 세계 불우이웃을 전부 다 도와주라고 비꼬는 사람은 없지만, 동물을 돕는 문제에서는 극단적인 논리로 반발하는 사람들이 많다. 소비의 자유를 침해 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동물 문제는 하찮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 광화문의 구세군 자선냄비 내 고장 불우이웃을 돕는 사람에게 전 세계 불우이웃을 전부 다 도와주라고 비꼬는 사람은 없지만, 동물을 돕는 문제에서는 극단적인 논리로 반발하는 사람들이 많다. 소비의 자유를 침해 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동물 문제는 하찮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 조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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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을 가장한 악마'... 한없이 달콤한 유혹 

나는 이런 사고방식에 '완벽을 가장한 악마'라는 이름을 붙였다. "동물에게 조금이라도 고통을 준다면 결국 누구나 마찬가지"라는, 얼핏 그럴 듯해 보이는 이런 속삭임은 사소한 실천을 무가치한 것으로 깎아내림으로써 우리를 실천의 고민에서 해방시켜주는 달콤한 유혹이다. 게다가 융통성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어쩌다 넘어졌을 때 "역시 난 안돼"라며 완전히 주저앉게 하여 그동안의 노력을 수포로 만들기도 한다.

모피를 입지 않기로 결심하는 사소한 실천만으로 수많은 희생을 막을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동물의 고통에 슬퍼하는 사람들조차 '완벽을 가장한 악마'의 꼬임에 넘어가 기존의 소비 습관을 합리화하는 모습을 보며 너무나 안타까웠다.

다른 생명을 취하지 않고 사는 것이 가능할까? 소비가 미덕인 사회에서 크고 작은 일탈을 피하기 어려운 일상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등지고 은둔자가 되지 않는 한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산에서 혼자 산다 해도 내 발 밑의 풀과 미생물, 벌레의 죽음은 어떻게 피할 것인가? 

생명을 취하더라도 무분별한 소비와 최소한의 소비는 분명 다르다. 아무리 사소할지라도 현재 가능한 것부터 실행에 옮겨야 더 큰 실천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완벽하지 않을 바에야 위선이라는 사고방식이 한편으로는 동물에 대한 의식이 부족한 사람들을 무시하고 공격하는 왜곡된 동물보호주의자들에 대한 반감에서 생겨났다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리고 철학자 피터 싱어가 지적했듯이, 사실상 모든 인간이 동물을 원료로 한 제품으로부터 혜택을 얻고 있는 현실에서 동물에 대한 억압을 여타의 사회 문제를 바라볼 때와 마찬가지의 객관성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것도 이해한다.

동물 운동은 모두를 위한 운동

동물을 대변하는 운동은 사회적 약자의 처우에 대한 보편적 공감을 이끌어내는 "동물과 인간 모두를 위한" 운동이다. 신분제, 노예제, 성차별이 철폐의 대상이 된 것은 "모든 차별은 부당하다"는 인식의 변화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한 나라의 복지 수준을 그 나라에서 사회적 약자가 어느 정도까지 배려받는가를 기준으로 가늠해볼 수 있다. 이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최약자인 동물을 배려하는 나라가 인간의 불우한 처지를 외면할 리 없다.

"한 국가의 위대함과 도덕적 진보는 그 나라에서 동물이 받는 대우로 가늠할 수 있다"는 마하트마 간디의 명언이 오로지 동물만을 위한 가르침은 아닐 것이다.

완벽하지 않으면 위선이라며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노력을 조롱하는 그대여, 그러한 세상 역시 당신이 살아가야 할 세상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주었으면 한다.


태그:#동물복지, #모피반대, #개식용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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