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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전 신설동에 있는 미션스쿨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학기 초 특별 활동반을 정하는데, 별로 특출날 것이 없던 나는 뭘 할까 고민하다가 '전자반'에 들어갔다. 그 당시 학교에서는 '합창반'이 가장 잘 나갔다.

미션스쿨인만큼 월요일 예배 시간마다 합창단은 따로 강당 무대에 올랐고, 축제 때도 가장 큰 공연을 펼쳤었다. 그래서인지 학교에서 제법 잘 나가는 친구들이 지원하는 곳이 합창반이었다. 물론 그냥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당연히 실기 시험, 즉 음악 선생님 앞에서 노래를 부른 후 합격, 불합격 여부가 결정된다.

기계치에 수학을 싫어했던 내가 '전자반'을 선택한 것은 순전히 조그만 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큰형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해서다. 나와 11살 차이나는 큰형은 내가 중 2 때, 방 2칸짜리 전세방의 안방에다 조그만 트랜스(형광등 같은 전자제품에 들어가는 변압기) 제조 공장을 만들었다. 실패를 하더라고 젊어서 실패하는 것이 낫다는 판단이었다. 덕분에 작은형과 내가 쓰던 방에 다섯 식구가 머물게 됐다. 부모님들도 어찌됐든 장남을 밀어 주고 싶은 마음이었으니 말이다.

시간될 때마다 큰형 공장에 호출돼 트랜스 작업을 도왔다. 그렇게 1년 반 정도, 조금 넓은 공간이 필요했던 큰형이 공장을 묵동으로 이전 한 뒤에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형 공장에 불려 가서 일을 하곤 했다. 물론 월마다 용돈이 궁했던 내게 형과 형수가 월급날마다 찔러 주는 용돈은 매우 요긴했기에 말이다.

아카시아가 피던 5월의 어느 음악 시간, 선생님은 가곡 '선구자'를 아이들에게 한 명씩 불러보게 했다. 나도 불렀다. 뭐 남들 앞에 서는 것 자체를 싫어했지만, 앞선 친구들이 멋지고도 마음껏 '삑사리'는 내고 나니 부끄러움 것 같은 건 없었던 것 같다. 내 차례가 끝난 후, 선생님은 급히 출석부에서 내 이름을 확인했다.

"너 합창반에 들어와야겠다."
"와."


반 친구들의 탄성이 흘러 나왔다. 나는 조금, 아니 많이 떨렸다. 아마도 반 친구들 중에는 그때까지 내 이름도 모르는 녀석이 많았을만큼 난 조용했기 때문에, 아이들이 주목은 나를 떨게 했다.

"노래는 예전부터 했었니?"
"아니요."
"수업 끝나고 나 좀 보고 가라."


반 친구들의 탄성이 또 나왔다. 17살, 내가 뭘 잘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남들이 인정해 줄 수 있는 가능성을 알게 된다는 것은 '환희'였다. 당연히 합창반에 들어가고 싶었다. 아니 내게 재능이 있다면 음대를 지원하고도 싶었다. 그 날부터 합창반 선생님과 전자반 선생님의 자존심 싸움이 시작됐다. 가뜩이나 전자반을 지원하는 학생들이 없어 특별 활동반 자체가 폐지될 가능성 때문에, 당시 대학생이었던 졸업한 선배들의 도움까지 받고 있는 상황에서 전자반 선생님은 한 명의 학생이라도 잡아야 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합창반을 가지 않기로 했다. 누나 친구 중에 성악을 전공하는 이가 있었다. 어렵사리 그 누나와 통화를 했다. 음대를 갈 생각이 있는데, 어찌 해야 하는지 물었다. 그 누나는 여러 가지 얘기를 했다. 물론 25년이 지난 지금 기억 남는 건, 레슨을 받아야 한다는 것  뿐이다. 문제는 레슨비였다. 월 30~50만 원 정도가 필요했었다.

우리 집 형편에서 무리였다. 내 기억으로 고등학교 한 학기 수업료가 15만 원 정도였는데, 나는 항상 학기말에 가서야 겨우 낼 수 있었다. 당시 상고를 졸업해 직장을 다니고 있었던 작은형은 대학을 가고 싶어 했다. 어릴 적 작은형은 그림에 상당한 소질이 있었다. 자기가 돈을 벌어서라도 미대를 가고 싶었다. 그러나 작은형도 큰형과 누나처럼 자신의 봉급을 우선 집안 살림에 써야 했다.

그런 상황을 봐왔던 내가 음대를 위해 비싼 레슨을 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아예 꿈조차 꾸지 말자는 심정으로 합창반 제안을 거절한 것이다. 올해 개봉한 영화 <파파로티>를 보면서 옛날 생각이 들었다. '파바로티'를 '파파로티'로 잘못 알고 있으면서도 끝까지 자신의 꿈을 위해 매진하는 건달 이장호(이제훈 분)가 나는 부러운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장호에게 상진(한석규 분) 같은 선생님은 그야말로 축복이다.

박용흠 작가의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이란 만화가 있다. 1980년 대 후반 외삼촌의 만화 가게에서 일을 봐주다 월간 만화잡지에서 봤던 기억이 난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2010년 이준익 감독이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한 바 있다. 원작에서 맹인 검객 황정학은 자신에게 검술을 배우는 견자에게 묻는다. 자세한 대사는 기억나지 않지만, 내용이 이랬다.

"하루살이가 하루에 얼마나 날아 갈 수 있을까?"

견자가 아무 말도 못하자 황정학이 말을 이어 간다.

"하루살이가 기껏 날아봐야 하루에 10리를 갈 수 있을까? 그러나 하루살이가 천리마 등에 오르면, 하루에 천리를 갈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영화 <파파로티>에서 하루살이 이장호를 천리를 가게 했던 것은 천리마 상진이었다. 어릴 때는 '왜 내게 천리마 같은 스승이 없었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내 주변에 천리마 같은 스승이 너무도 많다는 것을 느끼게 됐다. 그리고 하루에 천리를 가는 것과 함께 어느 방향으로 가야할지도 중요하다는 것을 배우게 됐다. 또한 나는 누구를 위한 천리마인가도 생각하게 된다.

내 삶의 좌우명은 '이인행(二人行)이면 필유아사(必有我師)'이다. 원래 논에에서는 '세 사람이 가면, 그중에 반드시 내 스승이 있다'라는 의미이지만, 나는 '삼인행(三人行)'을 '이인행(二人行)'으로 바꿔서 생각한다. 나 아닌 모든 사람에게서 배운다는 의미다. 어찌 사람에게만 배울 수 있을까? 인류의 지식은 동식물, 즉 자연에게 배운 것도 상당하다. 그러니 나 아닌 모든 세상 만물에게 배우겠다는 것이 정확한 의미일 것이다.

불행히도 천리마 같은 스승 중에 하나인 자연과 뭇 생명을 훼손하는 일이 적지 않다. 환경운동연합 월간지 <함께 사는 길>에 '대형국책 사업, 그 후'를 연재하면서 우리나라에서 벌어졌던 대형 토건 사업의 실체를 하나하나씩 습득해 가는 과정에서 천리마 같은 스승의 뜻을 져버리는 일이 많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경인운하, 평화의 댐, 한탄강 댐, 시화호 간척사업, 새만금 간척사업, 또한 4대강 사업 등은 자연의 섭리와 인간의 도리를 모두 저버리는 사업이다. 어찌 그 죄값을 다 갚을 수 있을지.


#파파로티#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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