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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오이풀에 이슬이 가득하다. 이 이슬은 하늘에서 내린 이슬과 오이풀이 일액현상에 의해 만든 합작품이다.
▲ 오이풀 이른 아침 오이풀에 이슬이 가득하다. 이 이슬은 하늘에서 내린 이슬과 오이풀이 일액현상에 의해 만든 합작품이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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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액현상이란, 식물이 제 몸에 남아도는 물을 배출시키는 현상이다. 이렇게 배출한 물들이 가장 예쁘게 맺히는 식물 중에서 으뜸을 꼽으라면 단연 오이풀과 장미꽃이다. 피침형 이파리의 끝에 동글동글 맺히는 물방울이 이슬과 어우러져 환상적인 물방울 보석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다른 식물도 이런 현상들이 있긴 하지만, 완벽한 원형에 가까울 뿐 아니라 줄지어 맺히는 것들은 그리 많지 않다.

갓 피어난 이파리에 맺힌 이슬방울들은 무엇을 닮았을까?
▲ 오이풀 갓 피어난 이파리에 맺힌 이슬방울들은 무엇을 닮았을까?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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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풀을 곁에 두고 아침마다 일액현상을 관찰하고 사진으로 담았으면 하는 생각도 했다. 그리하여 야생화 화원에 들렀지만, "그건 산에 가면 많아요" 하는 주인장의 훈계(?)에 기분이 나빠 돌아섰다. 누군들, 산에 가서 캐올 줄 몰라서 그곳을 들렀겠는가? 야생화를 돈으로 보는 주인장의 마음을 본 듯하여 불쾌했다.

작은 이슬방울이지만, 한 방물마다 우주의 신비스러운 기운이 들어있다.
▲ 오이풀 작은 이슬방울이지만, 한 방물마다 우주의 신비스러운 기운이 들어있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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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하게도 야생화는 모르는 사람들보다 아는 사람들에 의해 훼손되는 경우가 잦다. 산나물이니 약초니 뭐니 알지 못하는 사람은 일부러 찾아다니며 야생식물을 훼손하지 않는다. 그 가치를 아는 사람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연을 대하지 않으면 수단화될 수밖에 없다.

오이풀을 몇 뿌리 캐온다고 문제가 될 일도 없을 정도로 지천이지만, 내가 좋다고 그 뿌리를 캐낸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씨를 받아서 발육을 시킨다면 모르겠지만. 그리고 모든 자연은 자신들이 스스로 선택해서 뿌리를 내리고 자란 그곳에 있을 때 가장 아름답다.

오이풀의 이슬은 유난히도 맑고 예쁘다.
▲ 오이풀 오이풀의 이슬은 유난히도 맑고 예쁘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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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이슬의 계절이기도 하다. 쌀쌀한 기온 때문에 어지간해서도 아침이면 풀잎마다 이슬이 충만하다. 추석을 앞두고 성묘객들이 벌초하고 간 무덤가에 있는 오이풀을 몇 년째 만나고 있는데, 어김없이 그곳에 피어 있다. 봄부터 자란 것이라면 억셌을 터인데, 가을이 오기 직전에 한 번 잘리고 다시 새순이 돋아 가을임에도 거반 새순과도 같은 오이풀을 만날 수 있다.

그들을 볼 마음에 세수도 하지 않고 까치 머리로 나왔는데 인적이 뜸한 그 산길에 두런두런 사람들의 대화가 들린다. 아침이라고 하기에는 이른 오전 6시가 조금 넘은 시간인데 누굴까 돌아보니 배낭을 둘러멘 아저씨 아줌마들이다. 도토리와 밤을 주우러 다니는가 보다.

산짐승들의 몫까지 깡그리 긁어가야 마음이 흡족할까 싶어 마음은 불쾌한데, 그쪽에서도 어지간히 놀랐는가 보다. 웬 부스스한 사람이 새벽에 무덤가에 엎드려 사진을 찍고 있으니 말이다. 일단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서로 간에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나는 대충 사태가 파악되었으나 그분들은 사태파악이 안 되는 것 같다.

실하게 익은 밤이 툭툭 떨어진다. 떨어진 밤의 주인은 본래 들짐승, 산짐승들이며 인간은 그들의 것을 조금 빌려 먹는 것이 아닐까?
▲ 밤 실하게 익은 밤이 툭툭 떨어진다. 떨어진 밤의 주인은 본래 들짐승, 산짐승들이며 인간은 그들의 것을 조금 빌려 먹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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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저 요 아랫집에서 왔는데 이슬 사진 찍는 중입니다."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지 밤과 도토리도 줍고 버섯도 따러 왔노라고 말하며, 전날 물골 할머니 밭 근처의 밤나무 아래 풀 베어놓은 곳으로 발을 옮긴다. 물골 할머니가 밤을 주워가라며, 밤을 주우려면 밤나무 아래 풀을 죄다 베어야 편하다는 이야기에 땀을 뻘뻘 흘리며 풀을 베었는데 그들이 밥을 줍다니. 아침부터 싫은 소리를 하기도 뭐해서 "그거 주인 있는 밤나문데요" 했더니 부지런히 밤을 줍고는 떠난다.

아침을 먹으며 그 이야기를 아내에게 했더니만 그 사람들이 보통 놀라지 않았을 것이라며 거울 좀 보란다. '헉!' 놀라는 사이 "당신 카메라만 아니었어도 그 사람들이 혀를 찼을 거야. 이 동네에도 저런 정신 나간 사람이 있나 보네" 하고 아내가 말을 잇는다. 거울에서 확인한 내 모습은 카메라를 들었어도 정신 나간 사람 같았다. 하긴, 도시에서 치여 살면서 정신이 나갔다. 제정신이면 도시에서 그렇게 살겠는가 싶다.

이슬은 자기의 색을 고집하지 않아 더욱 아름답게 빛난다.
▲ 오이풀 이슬은 자기의 색을 고집하지 않아 더욱 아름답게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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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이슬 이야기로 돌아가자. 아직 활짝 피지 않아 앙다문 입술 같은 연한 오이풀 사이에 맺힌 이슬방울들을 보다 떠오른 것이 있었다. 어머니가 양계장을 할 적에 달걀을 팔러 나가실 때에 벼 지푸라기로 10개씩 쌌던 그것이었다. 탈곡을 마친 볏짚을 물에 축여 다듬고 달걀을 정갈하게 싼 어머니는 그것을 장에 가지고 나가 팔았다. 딱 그 모양이다.

더 크지도 작지도 않은 이슬방울들, 저마다 크기에 따라 맺혀았는 곳도 다르다.
▲ 오이풀 더 크지도 작지도 않은 이슬방울들, 저마다 크기에 따라 맺혀았는 곳도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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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방울 보석을 오이풀 이파리에 정성껏 싸서 장에 이고 나가 판다면 얼마나 받을 수 있을까? 공짜, 이렇게 찾아와 주기만 한다면 공짜로 그 아름다운 우주의 신비를 보여주는 것처럼 공짜가 아닐까 싶다. 작은 이슬 한 방울 속에는 온 우주의 신비가 다 들어 있다. 이슬 한 방울이 만들어지기까지 자연의 그림 자노동과 협력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터이다.

바람은 잔잔해야 했을 것이며, 대지에 습기도 적당해야 했을 터이고, 기온의 차로 풀잎이 물방울을 맺기에 좋은 온도를 간직하고 있어야 했을 것이다. 오이풀은 지난밤, 뿌리로부터 충분히 물을 공급받았을 것이며 아주 조금씩 내어놓아 이슬방울이 땅으로 떨어지지 않고 풀잎에 맺혀 있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의 조화로 만들어진 것이니 우주의 신비가 아니고 무엇이랴!

한 방울이 더 아름다워 보이는 순간이다.
▲ 오이풀과 이슬 한 방울이 더 아름다워 보이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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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이풀에 맺힌 이슬방울을 보면서 '비움의 철학'을 배운다. 비움은 이렇게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 낸다. 끊임없는 소유욕으로 가득했다면 오이풀은 이런 아름다운 이슬을 맺지 못했을 것이다. 비만으로 저 이파리가 다 터져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비만의 도시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온갖 소유욕으로 가득 차 있다. 이미 필요한 것들을 충분히 가지고 있으면서도 늘 허기져 있다. 그 허기짐은 절대로 채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공허하다, 소유욕을 버리지 않는 한, 인간은 행복해질 수 없다. 오로지 소유하려고 살아가는 이들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아파하는가?

늦게 심어 못생긴 옥수수와 주운 밤을 구워먹는다, 못생기고, 벌래 먹었어도 맛은 기가 막히다. 그 이유는 돈주고 사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일 터이다.
▲ 옥수수와 밤 늦게 심어 못생긴 옥수수와 주운 밤을 구워먹는다, 못생기고, 벌래 먹었어도 맛은 기가 막히다. 그 이유는 돈주고 사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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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오이풀과 이별을 해야 할 시간이 되었다. 내가 그를 만나러 오지 않아도 그는 오늘처럼 혹은 오늘보다 더 아름답게 물방울 보석을 만들 것이다.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자기 본성대로 그리할 것이다. 그렇게 반복하다 가을이 끝나면 조용히 대지의 품에 안겨 쉴 것이다.

그렇게 아름다웠던 순간이라고 자기를 고집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 봄에 피어날 것이고, 가을이며 이렇게 물방울 보석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긴 세월, 자신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자연의 품에 안겨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들 스스로 자연이고, 자연임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요즘 우리는 자신을 자연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가는가? 자연의 일부임을 망각하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그러면서 행복해지려고 하니 얼마나 허망한 삶을 살아가는가? 행복해지는 방법은 다양할 수 있으나, 근원적인 행복은 자연인으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덧붙이는 글 | 10월 3일, 강원도 갑천의 물골에서 하루를 묵으며 경험한 일입니다.



태그:#오이풀, #일액현상, #물골, #이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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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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