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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입학사정관전형으로 서울 유명 사립대에 입학한 새내기 J양은 대학 동기들이 은근히 자신을 무시한 것 같은 느낌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입학사정관제로 들어온 아이들은 솔직히 여기 들어올 실력이 안 되는데 운이 좋아 들어온 것 아냐"라고 수능으로 들어온 동기들이 과모임에서 한 말을 잊을 수가 없다.

입학사정관전형 입학생들은 수준이 떨어져 따로 관리 받는다?

각 대학에서는 입학사정관전형으로 들어온 학생들을 따로 관리한다. 몇 년 전 카이스트 입학생들의 연이은 자살로 인해 그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었고, 대교협의 평가항목에 추수관리라는 명목이 있어 대학들은 일정 비율 이상의 예산을 책정해 입학사정관전형 입학생들만을 위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똑같은 등록금을 내고도 단지 입학사정관전형으로 합격했다는 이유만으로 비입학사정관전형 입학생에 비해 더 많은 혜택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비입학사정관전형 입학생들의 불만을 사기도 한다. 그러나 입학사정관전형 입학생들에 대한 추수관리프로그램의 참여율은 그렇게 높지 않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자신들이 입학사정관전형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굳이 외부에 알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입학사정관전형으로 들어온 학생들은 비입학사정관전형으로 들어 온 학생들에 비해 실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대학 차원에서 자신들을 관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교과 성적 VS 비교과 성적

<오만과 편견>(Pride and Prejudice)은 200년이 지난 지금도 인기 있는 제인 오스틴의 영국소설이다. 이 소설을 단순히 신데렐라 이야기 정도로 이해한다면 작품의 참 맛을 느낄 수 없다. 제인 오스틴은 여주인공 엘리자베스를 멋진 왕자님을 만나 하루아침에 신분이 바뀌는 단순한 인물로 그리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19세기 영국은 어쩌면 지금의 우리나라와 비슷한 사회현상을 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산업혁명의 발달 단계에서 사회의 가치가 자본으로 집중되고 양극화가 심한 시기였다. 젊은 남녀의 결혼관에 있어서도 부와 권력을 가진 남성들은 배우자를 선택할 때 여성의 재산이나 외모를 최우선으로 하였고 여성들은 어떠한 배우자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신분이 달라지는 시기였다. 일종의 결혼시장에서 남녀가 거래를 한 셈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거래란 대등한 관계일 때 성립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궁금증이 생기게 된다. 소설의 남자 주인공 다아시는 재벌 2세 정도의 재력에 외모까지 훌륭하다. 엘리자베스는 외모도 언니 제인에 비해 떨어지고 집안도 형편없었다. 하지만 둘의 사랑은 마침내 맺어지게 된다. 거래가 성립한 것이다. 어떻게 둘의 거래는 대등한 관계에서 이루어 질 수 있었을까!

프랑스 교육 철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자본을 크게 세 가지로 분류했다. 경제자본, 문화자본, 사회자본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문화자본이다. 부르디외가 말하는 문화자본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자본 즉 경제적 자본과 대비된다. 문화자본은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체화되어 우리 몸에 배인 품위, 세련됨, 교양 등이고, 교육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학위, 자격증 등 사회적 능력을 대변할 수 있는 것들이 해당된다. 문화자본은 일차적으로 집안에서 형성되며 제도권교육과 평생교육을 통해서 축적될 수 있다.

가정환경과 부모의 중요성은 엘리자베스에게서 확인할 수 있다. 엘리자베스는 열악한 경제적 상황으로 인해 정규교육은 받지 못했지만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서재에서, 그리고 늘 책을 가까이 했던 아버지로부터 그 당시 여성들이 가지지 못했던 판단력, 비판력, 사고력 등 문화자본을 축적하였던 것이다. 비록 경제적 자본은 다아시에 비해 현저히 부족하지만 다아시가 가지고 있지 못했던 문화자본의 소유로 서로 대등한 조건에서 거래를 할 수 있었다고 어느 인문학자는 말한다.

대학입시도 일종의 거래라고 볼 수 있다. 학생들은 자신들이 보유한 교과성적이라는 재화를 원하는 대학의 합격증과 바꿀 수 있었다. 그리고 그동안 대학입시 시장에서 거래된 화폐는 교과성적뿐이었다. 하지만 입학사정관제가 도입되면서 입시시장에서 통용될 수 있는 화폐가 하나 더 늘었다. 학생들이 교내·외 활동을 통해 보여준 창의력, 리더십, 봉사정신, 도전정신, 독서활동 등 비교과활동을 통해 얻은 성적이 바로 그것이다.

비교과성적과 교과성적이 대등하게 대접받아야

교과성적과 비교과성적의 가치가 동등하게 인정받아야 한다. 다아시의 경제자본과 엘리자베스의 문화자본이 서로 대등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입학사정관제가 시행된 지 6년째가 되었지만 아직도 고교와 대학에선 교과성적 높은 학생이 우수학생이라는 등식이 우선한다. 또한 교과성적순으로 좋은 대학을 가는 것이 공정하다는 인식이 팽배하다.

얼마 전 특목고 출신을 우선 합격시키라고 입학사정관들을 압박한 대학의 모습이 단적인 예이다. 이 대학은 교과성적이 뛰어난 특목고 학생들을 우수학생으로 규정하고 우선 선발하고 싶었던 것이다. 입학사정관제를 가장해서 고교등급제를 통한 학생 골라 뽑기의 전형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인식 속에서 대학들이 입학사정관제 본연의 취지를 살리지 못하고 편법으로 운영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 모른다. 이처럼 대학에서 조차 비교과 성적을 제대로 인정을 해주지 않으니 일반 학생들이 비교과 성적을 불신하고 입학사정관전형 입학생들의 노력을 단순히 운으로 치부하고 있는 것이다.

우수인재에 대한 정의부터 세워야

대학들의 우수학생을 선발하고 싶은 마음은 너무나 당연하다. 대학의 발전은 우수한 교수진과 우수한 학생의 결합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우수학생에 대한 정의를 다시 세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전교 1등이라고 해서 무조건 우수학생이라고 말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지난 성폭력 피의자가 입학사정관제로 성균관대학교에 합격했다는 소식에 많은 사람들이 부당하다고 하여 결국 합격이 취소된 사건이 있었다. 나는 이 사건을 보고 입학사정관제는 반드시 유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왜냐하면 만약에 이 학생이 일반전형으로 합격을 했다면 합격을 취소할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일반전형에선 교과성적 우수자는 어떤 인성을 가지고 있더라도 우수학생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교과성적 우수자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성적 우수자이다. 그리고 우수인재를 구성하는 전부가 아니라 한 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머지 한 축이 바로 비교과성적인 것이다. 즉 교과성적과 비교과성적이 균형 잡힌 인재가 어쩌면 진정한 우수인재 인지 모른다.

우리는 아직도 교과성적 높은 학생이 좋은 대학에 가고, 판·검사가 되고 리더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러한 생각부터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과성적뿐 아니라 비교과성적이 높은 인재가 대통령을, 장관을, 판·검사를, 의사를, 그리고 국회의원을 했었다면 우리사회는 지금보다 더 성숙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비교과성적을 평가하여 정량화하는 작업이다. 대학입시에서 그 역할을 맡은 이들이 입학사정관이다. 입학사정관들부터 높은 문화자본을 가진 우수한 인재가 되어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입학사정관으로 근무하면서 느꼈던 점입니다.



태그:#입학사정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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