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전쟁과 한 여자>의 한 장면.

영화 <전쟁과 한 여자>의 한 장면. ⓒ 엣나인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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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엔 영화 내용 일부가 담겨있습니다.

교토는 세계적인 관광지다. 그 중에서도 제일 유명한 금각사와 료안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된 사찰 닌나지는 좁고 가느다란 도로를 따라 몇 킬로미터 간격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 도로를 따라가면 문화유적뿐만 아니라 리츠메이칸 대학과 평화 박물관, 교토 미술관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관광객은 금각사와 료안지에서 일정을 끝낸다. 일 년에 수만 명의 관광객이 이 길을 오가지만 리츠메이칸 대학에 부설된 평화 박물관에 들러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평화헌법 개정 반대하는 사람들, 비판의 중심은 천황

리츠메이칸 대학 코리아 연구 센터의 초청으로 차세대 연구자 포럼에 참석하러 올해 교토에 갔다. 잠시 땀을 식히러 우동집에 들어간 사이, 한 일본인 할아버지와 말문이 텄다. 아흔 살 정도 되어 보이는 할아버지가 물었다.

"한국인인가?"
"네, 한국인입니다."
"오, 그래. 북쪽?"
"아니, 남쪽입니다."

''강고꾸'라는 한국어는 북한까지 포괄하는 단어인가?' 이렇게 생각하면서 할아버지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때맞춰 소나기가 쏟아졌고, 왼손 집게손가락 한 마디가 잘린 할아버지는 우리에게 이런 말을 했다. 위안부는 천황의 명령이었다고.

평화박물관에서는 8월을 맞아 평화헌법 수호 서명을 받고 있었다. 서명을 요청하는 쪼글쪼글하게 늙은 할머니는 분명히 말했다. "정치가와 국민은 달라요. 어느 나라도 마찬가지예요." 교토 부에서만 500개가 넘는 단체가 평화헌법 수호 입장을 밝혔다. 전날 포럼에서 만난 일본 정치학자와는 과연 아베가 평화헌법을 바꿀지 이야기를 나눴었다.

"정말 바꿀까요?"
"글쎄요. 그러면 국민 투표를 해야 하는데, 그건 일본 국민에게 새로운 경험이거든요."

 영화 <전쟁과 한 여자>의 한 장면.

영화 <전쟁과 한 여자>의 한 장면. ⓒ 엣나인필름


다음날 아베가 평화헌법 해석 변경 방침을 밝혔다. 해석만 바꾸겠다니. "아베고 아소고 죄다 식민지 조선에서 돈 벌어 지금까지 정치하는 나쁜 놈"들이라던 할아버지의 말이 떠올랐다.

광복절을 맞아 재미있는 영화가 개봉했다. 사와구치 안고 원작, 이노우에 준이치 감독의 <전쟁과 한 여자>. 독립 제작 방식이지만 지명도 있는 영화인들이 참여했다. 오랜 연륜을 지닌 명배우 에모토 아키라와 아오야마 신지 감독이 크레딧에 이름을 올렸다. 강도 높은 노출과 폭력 장면이 한국에서 삭제당하지 않고 온전히 개봉할 수 있을지 말들이 많았지만 결국 개봉했다.

영화는 멀쩡한 사람이라면 모조리 전쟁에 끌려나간 태평양 전쟁 말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창녀와 작가, 상이군인 세 명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천황 폐하의 명을 받아 전쟁에 복무하지 못하면 국민이 아닌 비국민이요, 인간 대접을 받을 수 없었던 시기다. 작가는 징용을 면하는 대신 선전 영화 시나리오를 쓰고 창녀는 미군이 승리하면 '반드시 혼혈아를 낳겠다'고 다짐한다. 오른팔을 잃은 상이군인은 강간과 살인을 반복하면서 자신을 파괴한 폭력의 실체를 밝힌다. 그 실체는 다름 아닌 천황이다.

 영화 <전쟁과 한 여자>의 한 장면.

영화 <전쟁과 한 여자>의 한 장면. ⓒ 엣나인필름


일본 국민도 국가 권력의 피해자

사회를 비판하고 금기에 도전하는 일본 영화의 전통은 유구하다. 하지만 '천황은 왜 전쟁에 아무 책임도 지지 않는가'라고 정면으로 비판하는 영화는 많지 않다. 리츠메이칸 포럼과 교토 여행을 통해 감지했던, 일본인들도 근본적인 문제는 천황이라고 느끼고 있구나라는 느낌은 <전쟁과 한 여자>를 통해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영화는 저예산으로 제작되었다. 성과 전쟁의 관계를 파헤친 <감각의 제국>이 걸친 화려한 치장은 <전쟁과 한 여자>에서 찾아볼 수 없다. 대신 카메라를 돌릴 수도 없는 좁디좁은 가게와 폭격에서 살아남은 오래된 건물, 아마도 예산의 대부분을 잡아먹었을 폐허 세트가 펼쳐진다. 창녀와 작가가 얽히는 에로틱한 장면도 강도는 높지만 허무주의가 강하게 풍긴다. 강간과 살인 장면은 처음에는 충격적이지만, 반복되는 살인을 따라가면서 관객도 폭력에 익숙해지는 느낌을 전달받는다. 그때 원폭을 연상시키는 폭발이 일어난다.

"이럴 거면 도쿄가 불타기 전에 항복했어야지! 아니면 끝까지 가든가!" 영화 속에서 에모토 아키라는 울부짖는다. 처음에 미국은 교토 원폭 투하를 계획하고 있었다. 일본의 항복이 늦어진 것은 천황제 유지를 위한 협상 때문이었다. 교토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다면, 천황제도 상당한 위협을 받았을 것이다. 그래서 매년 8월이 되면 전쟁에서 살아남은 교토의 노인들은 끔찍한 기억을 반추한다. 이미 폭격으로 불타버린 교토에 원자폭탄까지 떨어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검거된 상이군인은 자신의 범죄를 털어놓으면서 왜 중국에서 저지른 강간 강도 살인은 처벌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그건 전쟁 중이었다." "전쟁 중 범죄는 왜 처벌하지 않습니까. 천황 폐하의 명령으로 온갖 끔찍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도조 히데키는 전범인데 왜 천황은 전범이 아닙니까. 인간 선언까지 했으면서!" 상이군인이 이 말을 하며 화면을 노려보는 이 장면은 그 어떤 범죄 장면보다도 섬뜩하다.

한국은 피해자, 일본은 가해자라는 도식은 이제 국가가 가해자, 인민이 피해자라는 도식으로 바뀌어야 한다. 일본 사람들도 가해자인 동시에 엄연한 일본이라는 국가 폭력의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한국과 중국도 자국민을 언제든지 폭력의 수렁으로 밀어 넣을 수 있는 권력을 갖고 있다. 굳이 전쟁이 아니더라도 국가가 각종 방법으로 한 개인의 삶을 산산조각 내는 모습을 우리는 오랜 시간 지켜보았다. 그러한 국가 폭력의 피해자이자 그 폭력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주권자들로서, 한국과 일본의 예술가와 학자, 평범한 사람들이 서로 교류해야 한다.

평화헌법 수호 서명을 받던 할머니의 말이 떠오른다.

"일본 사람들 정말 전쟁 싫어해요. 무서워서 말을 못할 뿐이에요. 정치가들과 생각이 달라요. 그걸 꼭 한국 사람들에게 전해주세요."

교토의 이 할머니의 말씀이, 바로 <전쟁과 한 여자>의 주제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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