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올해는 백남준이 1963년 독일 부퍼탈에서 첫 전시를 열고, 비디오 아트를 탄생시킨 지 50주년이 되는 해다. 그래서 '이제는 백남준을 이야기 할 때'라는 타이틀로, 백남준 전문가 인터뷰에 이어 그의 생애와 예술에 대해 연대별로 소개한다. - 기자 말

'머리를 위한 선(禪)'(Zen for Head)' 1962. 비스바덴에서 열린 '플럭서스 국제 신음악' 공연에서 잉크와 토마토주스를 사용한 먹으로 그린 행위음악
 '머리를 위한 선(禪)'(Zen for Head)' 1962. 비스바덴에서 열린 '플럭서스 국제 신음악' 공연에서 잉크와 토마토주스를 사용한 먹으로 그린 행위음악
ⓒ 백남준아트센터

관련사진보기


백남준은 무신론자지만 꽤 선불교적이었다. 선문답이 쌍방형이고 무상보다는 경이로움에서 깨달음을 얻고 일체의 벽을 허물며 길 없는 길을 가고 화두를 던져 답을 찾은 방식이라 그런가. 1960년대 '머리를 위한 선' '바람을 위한 선' '걸음을 위한 선' '접촉을 위한 선' '필름을 위한 선'과 같이 '선' 연작을 계속 발표했다.

그러나 백남준은 '선'의 양면을 봤기에 선이 "아시아의 전쟁과 빈곤에도 책임이 있다"와 같은 비판도 할 수 있었다. 선불교가 마치 세계에서 일본 것인양 알려져 있지만 그 이면에는 군국주의를 정당화하는 데 악용된 면도 있다고 백남준은 말한다.

그 예로 백남준은 일본 선불교의 전설적 인물인 '스즈키'가 쓴 글을 든다. 영어판에는 그런 내용이 없지만, 일어판에는 만주사변을 정당하고 선을 일본 황국의 본류로 기술했다는 것. 이는 마치 히틀러가 신(神)이 자기 편이라고 한 말과 같은 사례다.

그럼에도 백남준은 선을 차원 높은 창조적 영감과 에너지로 받아들인다. 서양의 아방가르드를 동양의 선으로 정화시키고 서구의 속도문화를 동양의 명상 문화로 제어한다. 그러면서 서구의 테크놀로지를 단지 기술주의에 함몰시키지 않으면서 기술로 기술에 대항하는 방식으로 기술을 인간화하고 예술화한다.

백남준, 20대 후반 '벽암록' 등 선어록에 심취

슈톡하우젠의 '오리기날레'에서 불경을 낭독하고 있는 모습(사진촬영: 클라우스 바리슈) 1961. 백남준은 <임제록>과 <벽암록> 등 같은 선어록을 즐겨 읽었다. 백남준아트센터(2012)에 열린 헤르조겐라트 박사초청강연 때 소개된 영상을 찍은 것
 슈톡하우젠의 '오리기날레'에서 불경을 낭독하고 있는 모습(사진촬영: 클라우스 바리슈) 1961. 백남준은 <임제록>과 <벽암록> 등 같은 선어록을 즐겨 읽었다. 백남준아트센터(2012)에 열린 헤르조겐라트 박사초청강연 때 소개된 영상을 찍은 것
ⓒ 백남준아트센터

관련사진보기


백남준은 20대 후반 이런 불경에 심취했다. 위 장면은 백남준이 '오르기날레'에서 선어록을 읽는 모습이다. 그는 <금강경> '사구게'에 나오는 "모든 가시적 법은 꿈과 같고, 허깨비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이슬 같고, 번개와 같으니 응당 그걸 응시해야하리(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같은 경구를 좋아했다.

그중에서도 백남준은 특히 '벽암록'(18번)에 나오는 '무봉탑'(無縫塔)을 좋아했다. 이 이야기는 혜충 국사가 입적하기 직전 당나라 대종(代宗)황제와 하직할 때에 나눈 대화로 황제가 "내가 국사를 위해서 뭘 해드리면 좋겠습니까?"라고 물으니 국사는 "저를 위해 이음새가 없는 무봉탑을 세워 주십시오"라고 답한다.

형체도 이음새도 없고,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무봉탑이라. 이는 결국 황제가 마음을 비우고 우주의 모든 법계를 하나의 탑으로 세워 백성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그들을 편안케 하라는 뜻이다. 하여간 이런 선문답에 매료된 백남준은 예술동료 마리 바우어마이스터에게 병풍에 직접 한자로 써서 선물할 정도였다.

가장 멀리 보고 가장 깊게 사유하기

백남준 I '심플' 1962. 비스바덴에서 열린 '플럭서스 국제 신음악' 중 허긴스의 '위험한 음악 2번' 퍼포먼스. 사진: 하르트무트 레코르트. 오른쪽에 "살아있는 암 고래의 질 속으로 기어 들어가라"는 영문이 보인다
 백남준 I '심플' 1962. 비스바덴에서 열린 '플럭서스 국제 신음악' 중 허긴스의 '위험한 음악 2번' 퍼포먼스. 사진: 하르트무트 레코르트. 오른쪽에 "살아있는 암 고래의 질 속으로 기어 들어가라"는 영문이 보인다
ⓒ 백남준아트센터

관련사진보기


백남준은 1962년 비스바덴에서 플럭서스 이론가인 딕 히긴스가 기획한 '위험한 음악 2번'에 참가해 정장으로 아기욕조에 들어가 "살아있는 암 고래의 질 속으로 기어 들어가라"고 외치며 온몸에 물을 붓고 신발에 물을 담아 마시는 해프닝을 벌였다.

이 장면을 이영철 미술비평가는 "난 바다 깊은 곳에 잠수하면 누구도 보지 못하고 누구에게도 조정 받지 않으면서 더 심오하고 일관성 있는 궤도를 따라 움직일 수 있다"고 한 '푸코'의 말을 인용하며 "백남준은 심해에서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를 가지고 자유롭게 사유하고 싶어 하는 인간"으로 해석한다.

백남준은 이렇게 보면 푸코가 말한 아무도 근접할 수 없는 곳에서 깊이 '사유하는 자'이기도 하고, TV가 '멀리 본다'는 뜻이지만 랭보가 말한 것처럼 그냥 보는 자가 아니라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가장 멀리 내다보는 '견자'(voyant)기도 했다.

융합된 사고가 총체적 예술을 낳다

백남준 I '총체(조작된) 피아노' 1958-1963. 백남준은 연주도 하지만 피아노의 금기를 깨고 그걸 밟고 부수기도 하고 때론 오브제로도 활용한다. 백남준 국제학술심포지엄(2013.04.26)에서 소개된 영상자료를 찍은 것임
 백남준 I '총체(조작된) 피아노' 1958-1963. 백남준은 연주도 하지만 피아노의 금기를 깨고 그걸 밟고 부수기도 하고 때론 오브제로도 활용한다. 백남준 국제학술심포지엄(2013.04.26)에서 소개된 영상자료를 찍은 것임
ⓒ 백남준아트센터

관련사진보기


백남준은 동서양의 학문과 예술·철학과 과학을 꿰뚫고 있었기에 동서의 장벽을 넘어 상생의 방식으로 연결하기에 적합한 인물이었다. 백남준은 당시론 매우 드물게 동서양은 언제나 만날 수 있고 상호소통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백남준은 또한 물아일체라는 동양의 관점에서 우주만물을 통합적으로 봤다. 그러기에 서양의 첨단기술과 동양의 정신세계를 사상과 이념·인종과 지역의 경계 없이 그물망처럼 요즘말로 네트워킹 방식으로 연결시키려 한 것인가.

동양에서 음양이 둘이 아니고 하나이듯 그에게는 음악과 미술이 둘이 아니고 하나다. 그런 면에서 음악전공자인 백남준이 시각예술가가 된 것은 자연스럽다. 그의 친구 '예를링에게 보낸 편지'(1962)에서 그가 "내 작품은 그림도 조각도 아닌 단지 시간예술이라는 걸 명심하라"고 한 것 또한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백남준의 이런 종합적 사고는 총체적 예술(art for all senses)을 낳는다. 시각예술인 미술에 청각과 촉각적 요소도 도입한다. 시간예술인 음악에 공간예술인 미술을 융합시키고 전자 빛으로 그리는 TV개념을 도입한다. 거기에 몸을 붓처럼 사용한 행위예술도 포함시킨다. 그런 예술에서는 '자연·기계·인간'도 같은 생명체일 뿐이다.

만 서른에... "황색 재앙! 그것이 바로 나다" 선언

백남준 I '칭기즈칸의 복원(1993)' 뒤로 백남준이 영어, 프랑스어 등 친필로 쓴 "황색 재앙! 그것이 바로 나다"가 보인다. 이 말은 그의 유명한 말 "세계역사의 게임에서 우리가 이길 수 없다면 그 규칙을 바꿔야 한다"도 연상시킨다
 백남준 I '칭기즈칸의 복원(1993)' 뒤로 백남준이 영어, 프랑스어 등 친필로 쓴 "황색 재앙! 그것이 바로 나다"가 보인다. 이 말은 그의 유명한 말 "세계역사의 게임에서 우리가 이길 수 없다면 그 규칙을 바꿔야 한다"도 연상시킨다
ⓒ 김형순

관련사진보기


백남준은 1962년 만 서른에 문화제왕으로서 포부를 밝히며 "황색 재앙! 그것이 바로 나다"(Yellow PERIL! C'est moi)라고 선언한다. 이 말은 프랑스 절대왕정시절 루이 14세가 한 '짐이 곧 국가다'를 패러디한 것이다. 자신의 출현을 13세기 몽골제국이 유럽을 쑥대밭으로 만든 사건에 비유하며 유럽의 트라우마를 건드렸다.

이건 구호가 아니라 1984년 1월 1일 '위성아트'로 실현했다. 실제로 백남준은 칭기즈 칸보다 더 넓은 영토를 차지하는 '문화 칭기즈 칸'이 됐다. 물론 그 방식은 비폭력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백남준이 우리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은 우랄알타이어 계통의 북방민족의 후손으로서 그 긍지와 자부심을 되찾아줬다는 점이다.

이 선언은 백인주도사회를 향해 야심찬 포부와 기개를 거침없이 드러낸 그만의 '커밍아웃'으로 당시 유럽인들에게 고등사기나 완전 범죄처럼 보였을 것이다. 서양과학의 산물로 서구인이 신성시하는 피아노를 관객 앞에서 박살낸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백남준은 이처럼 기가 엄청 세고 자부심으로 넘치는 작가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다. 1992년 백남준의 회갑전이 과천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릴 때 도올 김용옥이 그와 한 대담에서도 그런 점을 재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 그 중 일부를 소개한다.

올림피아호텔(1992.08.16)에 도올 김용옥이 백남준을 찾아가 인터뷰하는 장면
 올림피아호텔(1992.08.16)에 도올 김용옥이 백남준을 찾아가 인터뷰하는 장면
ⓒ 김용옥

관련사진보기


"우린 역사를 너무 잘 못 봐. 선진이다 후진이다 이런 게 없는 거야. 선진이라는데 가보면 후진도 있고, 후진이라는데 가보면 선진도 있지. 내가 일본가 보니까 일본이 아무것도 무서울 게 없더라고. 그냥 우리랑 똑같았어. 그래서 다시 음악의 본고장 독일에 가서 보니깐 거기서 작곡가들이라는데 전부 엉터리들이었어.

그뿐만이 아니야 미술도 그래. 난 그 유명한 그림들 일본사람들이 근사하게 인쇄해놓은 것으로만 봤잖아. 그래서 굉장한 것으로 생각하고 동경했지. 그런데 직접가보니깐 허름한 캔버스 위 나달나달하는 페인팅 형편없더라고. 뭐 인상파다, 르네상스다, 루벤스다 하는데 비싸다고 하니깐 대단하게 보였던 거야. 난 정말 실망했고 이따위 것 가지고 내게 그렇게도 동경했던가. 박물관에 그냥 멍하니 앉아있었어.

작곡가도 말이야. 그 대단한 독일이라는데 쓸만한 몸에 4~5명밖에 안 되더라고. 나머지는 어차피 쓰레기야. 그러니깐 난 용기가 나더라고. 내가 낄 자리도 아직 많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중략) 그래서 난 곧바로 작곡가 행세를 해버린 거야."

위 인터뷰에서 보면 우리가 근현대기 4대강국에 끼여 식민과 분단과 독재에 치여 방황하는 동안 백남준은 17살에 한반도를 떠난 후 여러 나라를 경험하면서 오히려 한반도에만 갇히지 않고 몽골까지도 우리의 계보로 보는 큰 안목을 갖췄다.

"내 피 속에 흐르는 '시베리안-몽골리안' 요소가 난 좋다, 내가 쇤베르크처럼 극단적인 건 이 때문이다"라고 한 백남준의 말이 쉽게 이해가 된다. 그는 또 "예술은 보편성이 아니고 텃세다"라고 했는데 이 말은 그도 타국에서 서구적 우월감에 많이 시달렸다는 뜻으로 해석되지만 백남준을 그들을 항상 유머와 지성으로 압도했다.

백남준은 또 "선사시대, 우랄 알타이족의 사냥꾼들은 말을 타고 시베리아에서 페루·한국·네팔·라플란드(핀란드 등 북유럽)까지 세계를 누볐고, 그들은 농업중심의 중국사회처럼 중앙에 집착하지 않았고 더 먼 곳을 보기 위해 멀리 여행을 떠나 새 지평선을 봤다"며 우리 혈통과 원류를 더 멀게 넓게 포괄적으로 봤다.

1960년대에 '플럭서스', 파격적 전위운동

1962년 비스바덴에서 플럭서스 첫 공연에서 피아노를 파괴하는 멤버들. 백남준 국제학술심포지엄(2013.04.26)에서 소개된 영상자료를 찍은 것임
 1962년 비스바덴에서 플럭서스 첫 공연에서 피아노를 파괴하는 멤버들. 백남준 국제학술심포지엄(2013.04.26)에서 소개된 영상자료를 찍은 것임
ⓒ 백남준아트센터

관련사진보기


1960년대 초 백남준을 이야기하면서 떼놓을 수 없는 미술운동이 바로 '플럭서스'다. 이 단어에는 '흐름'(flux)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이는 고대철학자 헤라클레토스가 주장한 "만물은 창조의 흐름에서 유전한다"와 같은 맥락이다. 이 운동은 1961년 뉴욕에서 리투아니아 출신 미국 건축가 조지 마치우나스(1931~1978)에 의해 발원된다.

이 운동은 1960년대 권위적 기존미술과 전통에 벗어나 위에서 보듯 급진적이고 실험적이고 미술운동으로 '반예술'적이었다. 또 당시 냉전 이후 이념 대립의 팽배로 숨 막히게 돌아가는 세상에 구멍을 내고 교란시키며 그 위계를 깼다. 게다가 아나키즘·보헤미안 취향·도가의 무위사상까지도 수용한다.

네오다다의 성격을 띤 이 운동은 예술가의 주체성마저 부정하고 문화민주화와 지방화를 지향한다. 예술이 상업화·대상화·물질화되는 걸 반대하고 대립되는 갈등이나 충돌이 생겨도 개의치 않는다. 무엇보다 창조적 발상에 높은 점수를 줬다.

예술에서 고급과 저급을 없애고 삶과 예술의 경계도 허물고 일상과 대중성도 받아들이고 타 장르도 포용한다. 또한 즉흥성·우연성·상호성·비결정성·비위계성을 중시하며 노이지를 포함한 사운드·이미지·일상에서 발견하는 오브제와 텍스트를 활용하고 재미·풍자·유머를 가미해 더 단순하고 간결한 놀이방식을 취했다.

'플럭서스' 운동에 참여한 백남준

딕 하긴스의 '그래피스 119'. 1962년 플럭서스 공연 중 하나로 하긴스, 트로우브리지, 백남준, 보이스, 슈미트, 클린트베르크, 포스텔, 놀즈, 스포에리 등이 참가했다.
 딕 하긴스의 '그래피스 119'. 1962년 플럭서스 공연 중 하나로 하긴스, 트로우브리지, 백남준, 보이스, 슈미트, 클린트베르크, 포스텔, 놀즈, 스포에리 등이 참가했다.
ⓒ 백남준아트센터

관련사진보기


이 운동은 마치우나스가 1962년 서독 미 공군에서 그래픽디자이너로 일하게 되면서 그 중심지가 뉴욕에서 비스바덴으로 옮겨졌다. 이곳은 슈톡하우젠을 따르는 전위음악가도 많았고, 이미 실험음악과 행위예술에도 관심이 많은 지역이었다. 그해 9월 비스바덴에서 첫 공연의 닻을 올린다.

회원으로는 음악가인 라 몬테 영·존 케이지·디 히긴스와 알리슨 놀스 부부·백남준·시게코 오노·조지 브레히트·시인 잭슨 맬로·베이스연주자 페터슨·종합예술가 보스텔 등이 있었다. 그야말로 동서가 같이 한 최초의 국제주의 미술운동이다. 회원 중 하벨과 란즈베르기스은 훗날 체코와 리투아니아의 대통령이 되기도 했다.

뉴욕과 달리 독일과 유럽에선 여러 도시를 순회한다. 9월 독일 비스바덴에 이어 10월에 암스테르담, 11월에 코펜하겐·런던·쾰른·파리 등에서 공연했다. 백남준은 이 단체의 기관지 <데 꼴라주>의 편집도 맡는데 이 책에 나오는 '플럭서스 섬'을 보면 당시 백남준과 그 회원들이 생각한 이상향이 뭔지 알 수 있다.

마치우나스는 1963년 뉴욕 소호에 본부를 창설하고, 그해 "부르주아의 병폐와 지적이고 전문적이며 상업화한 문화를 추방하라"며 "죽은 예술, 모방·인위적 예술·추상적이고 환영적이고 수학적인 예술을 추방하라, '유럽주의'를 추방하라"는 내용이 담긴 선언문을 발표했고, 1964년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게시했다.

백남준과 호형호제하던 요셉 보이스

백남준과 요셉 보이스가 공동 출연한 도쿄공연(1984.6.2)에서 둘이 피아노 치는 모습. 서울시립미술관(2013.01.30) 본관1층에서 전시회 때 찍은 사진
 백남준과 요셉 보이스가 공동 출연한 도쿄공연(1984.6.2)에서 둘이 피아노 치는 모습. 서울시립미술관(2013.01.30) 본관1층에서 전시회 때 찍은 사진
ⓒ 서울시립미술관

관련사진보기


끝으로 백남준의 예술적 동반자이자 절친 이었던 요셉 보이스에 대해서 알아보자.

두 사람은 같이 '플럭서스' 회원이었고 예술적 동반자로 그 우정은 평생 유지됐다. 백남준이 퍼포먼스를 할 때 보이스가 이를 방해하는 관객을 끌어낸 후론 더 가까워졌다. 보이스는 백남준의 낯선 독일생활을 각별히 보살폈다. 백남준의 인덕도 대단했지만 두 사람의 우정은 참으로 아름답고 숭고하게 보인다.

문화민주주의자인 요셉 보이스는 "모든 사람은 예술가"라며 인간의 타고난 창조력과 가능성을 옹호했다. 백남준도 "19세기까지는 많은 사람이 시각예술로 자신을 표현할 수단이 없었으나, 카메라가 나옴으로써 누구나 작품을 할 수 있게 됐고 사람들의 창조 욕망이 높아져 미술시장이 활성화됐다"며 보이스의 생각에 동조한다.

요셉 보이스가 공연에서 빠지지 않는 게 담요인데 이는 전후 상처받은 사람들의 아픔을 감싸고 덮어주려는 의도였다. 또한 양극화된 사상과 사회체제가 충돌하는 곳에서 그 상처를 씻어주고 치유하는 상징물로 생각됐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는 '사회적 행위로서의 조각(Social Sculpture)'이라는 개념도 제창한다.

그의 전반기 대표작은 역시 '죽은 토끼에게 어떻게 그림을 설명할까'(1965)이다. 얼굴에 꿀과 금박을 바르고, 양쪽 발에는 펠트와 쇠로 밑창을 댄 신발을 신고, 죽은 토끼를 품에 안고 약 3시간 동안 토끼에게 미술관에 걸려 있는 그림을 설명해주면 인간과 동물의 소통이 가능함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요셉 보이스 I '죽은 토기에게 어떻게 그림을 설명할까' 1965년 토끼에게 그림을 설명하고 있는 요셉 보이스. 소마미술관(2011.06.16)에서 열린 '요셉 보이스'전에서 전시된 그와 관련서적 전시 중에서 찍은 것임
 요셉 보이스 I '죽은 토기에게 어떻게 그림을 설명할까' 1965년 토끼에게 그림을 설명하고 있는 요셉 보이스. 소마미술관(2011.06.16)에서 열린 '요셉 보이스'전에서 전시된 그와 관련서적 전시 중에서 찍은 것임
ⓒ 김형순

관련사진보기


토끼가 그의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유에 대해 보이스는 "토끼가 가장 연약한 자연을 뜻하면서 부활도 상징하기 때문"이라며 "또한 많은 사람들이 사는 동기가 자신의 이익과 이권을 쫓고 있다면 토끼는 자연이기에 그렇지 않다"고 설명한다.

보이스는 2차 대전 중 비행기에서 추락해 의식을 잃고 죽을 뻔한 경험은 했고 마침 타타르족에게 발견돼 지방(脂肪)과 펠트 천로 치료받는다. 그런데 이 경험이 그의 예술 활동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 이후 우리 '굿'에서 칼·거울·방울이 나오듯 그의 작품에 생명을 살리고 추위를 녹이는 상징으로 지방과 펠트 천이 단골로 등장한다.

그리고 1974년 후반기 대표작인 '나는 아메리카를 좋아하고 아메리카는 나를 좋아한다'가 뉴욕 르네 블록갤러리로 열렸고 그 전시장 바닥에는 잡초더미와 펠트 천 등이 수북이 깔려 있었다. 보이스는 여기서 코요테와 3일 동안 동거하며 대화를 시도한다.

코요테는 아메리카원주민들이 신성시하던 동물로 아메리카를 상징한다. 이 작품은 결국 아메리카를 점령한 백인이 코요테를 비천하고 교활한 동물로 낙인찍었다며 이런 점이 시정돼야 잃어버린 미국의 참모습을 되찾을 수 있다는 메시지도 담겨있다.

독일에서 최고작가로 추앙받는 요셉 보이스 누구?
요셉 보이스는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대학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 1971년 뒤셀도르프 예술아카데미 안에 무료 '자유국제대학(FIU)'을 설립하고 거기서 강연하는 모습. 소마미술관(2011.06.16)에서 열린 '요셉 보이스'전에서 소개된 영상자료를 찍은 것임
 요셉 보이스는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대학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 1971년 뒤셀도르프 예술아카데미 안에 무료 '자유국제대학(FIU)'을 설립하고 거기서 강연하는 모습. 소마미술관(2011.06.16)에서 열린 '요셉 보이스'전에서 소개된 영상자료를 찍은 것임
ⓒ 김형순

관련사진보기


1921년 5월 12일 독일 크레펠트에서 태어나 개념미술가 요셉 보이스(Joseph Beuys 1921~1986)는 어려서 클레베에서 자랐다. 동식물·조각·과학과 기술 등에 흥미가 많았고, 소아과 의사가 되기를 꿈꿨다. 1940년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2차 대전이 터져 독일공군에 입대, 폭격기부조종사로 복무한다.

1943년, 그가 탄 JU-87기가 러시아 크림반도에서 격추됐다. 의식불명상태에서 유목민 타타르(Tatar)족이 발견돼 구조되고, 동물 지방과 펠트 천으로 치료를 받는다. 1945년에는 독일 내 연합군수용소에 수감됐다가 다음해 풀려난다. 전쟁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며 산전수전을 겪은 그는 미술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1947년 뒤셀도르프 예술아카데미에 입학해 조각을 공부한다.

1950년대부터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해, 1953년 부퍼탈에 있는 폰 더 하이트(Von der Heydt) 박물관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1961년에 그는 뒤셀도르프 예술아카데미 조각과 교수로 임명됐다. 1962년에는 플럭서스에 참여하고 백남준과 가까이 지내며 다음해 그 페스티벌에서 첫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1967년에 학생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독일학생당'(DSP)을 창당했고 1972년 '카셀 도큐멘타'에서 '국민투표를 통한 직접민주주의조직'을 만들어 100일간 민주주의, 예술에 대해 강연을 하고 관객과 토론도 했다. 1976년에는 독일북서주 의원선거에, 1979년에는 유럽의회 녹색당후보로 출마하기도 했다.

1971년 교육민주화의 실천가인 보이스는 뒤셀도르프 예술아카데미 안에 '자유국제대학'(FIU)을 둬 누구나 대학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한다. 이 문제로 대학과 갈등을 빚어 다음해 결국 교수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1979년 뉴욕구겐하임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열려 국제적 명성을 떨쳤다.

1982년 그는 '카셀 도쿠멘타'에서 전시장 주변에 7000그루 나무를 심는 퍼포먼스를 벌렸다. 이는 역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회복하는 공공미술이었다. 이를 통해 그의 확장된 예술개념인 '사회조각'도 구현한다. 보이스는 1986년 1월 23일 뒤셀도르프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그러자 다음해 그의 아들 벤젤(Wenzel)이 7000번째 나무를 심어 이 프로젝트를 완성했다.

덧붙이는 글 | [백남준과 플럭서스 관련 전시_러닝 머신(Learning Machine)] 백남준아트센터 2층에서 2013년 6월 27일-2013년 10월 6일까지 열림 [참여 작가] 김나영 & 그레고리 마스, 김영글, 김용익, 김월식, 김을, 앨리슨 놀즈, 디자인얼룩, 조지 마키우나스, 박이소, 피터 반더벡, 백남준, 벤 보티에, 조지 브레히트, 토마스 슈미트, 미에코시오미, 안강현, 요코 오노, 정은영 with 심채 선·박문칠, 조 존스, 볼프 보스텔, 존 카버노프 [기획 및 참여 큐레이터] 구정화, 안소현, 이유진 [더 자세한 정보] 백남준아트센터 홈페이지 참조 www.njpartcenter.kr



태그:#백남준, #선불교, #플럭서스, #요셉 보이스, #김용옥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문화 중 현대미술을 대중과 다양하게 접촉시키려는 매치메이커. 현대미술과 관련된 전시나 뉴스 취재. 최근에는 백남준 작품세계를 주로 다룬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