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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리자는 왜 루브에 있는가>
 <모나리자는 왜 루브에 있는가>
ⓒ 미래의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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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빈치는 과학과 예술분야 모두에서 탐욕스러울 정도로 새로운 것을 찾아 헤맸던 사람이다. 미술분야에서 그가 처음으로 시도한 것은 모두 서양미술사에 기록될 만한 기념비적인 것들이다. 그는 성서 속 인물들을 그릴 때 머리 뒤에 후광을 그리지 않은 최초의 화가였다."(존 캐리가 쓴 <지식의 원전> 중)

존 캐리 주장이 아니더라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1452~1519)가 남긴 <최후의 만찬> <그리스도의 세례> <모나리자> <세례자 요한> 따위 작품만으로도 그의 위대성은 영원할 것이다.

다 빈치는 이탈리아 사람이다. 그런데 그가 남긴 <모나리자>는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있다. 궁금하다. 이것만 아니라 다 빈치 남긴 작품 탄생 배경과 밝혀지지 않는 숨은 이야기들도 궁금하다.

책 <모나리자는 왜 루브르에 있는가>(미래의창)은 우리들 궁금증을 풀어준다. <피렌체 미술산보> <르네상스에 살았던 여성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만능의 천재를 찾아서> 같은 작품을 남긴 사토 고조는 <모나리자는 왜 루브르에 있는가>를 통해 <모나리자> 실제 주인공은 누구이고, <최후의 만찬>은 몇 번이나 복원됐으며 <세례자 요한> 속 숨은 메시지는 무엇인지를 밝혀주는 '다 빈치를 찾아 떠나는 이탈리아 예술 기행문'이다.

우리 옛말에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안다"는 말처럼 다 빈치는 어릴적부터 천재성을 드러냈다. 14살 때 안드레아 베르키오 공방에 들어갔고, 메데치 가문 의뢰를 받아 피에로 묘비 제작에 참여하고, 스무 살에는 스승 베로키오 작품인 <그리스도의 세례>에 조수로 참여했다. 이때 독립해 <수태고지> <동방박사의 경배> 등을 그렸다. 다 빈치는 그림에만 천재성을 보인 것이 아니라 건축설계도 특출함을 드러냈다. 대표 작품이 밀라노 나빌리오지구 운하다. 교황 아들은 그를 인정해 기술 감독으로 불렀다.

"1499년 9월, 루이 12세가 이끄는 프랑스 군대가 밀라노 공국을 점령했을 때, 지휘관들 중에는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아들 체사레 보르자도 있었다. 그는 밀라노에서 다 빈치가 설계·계량한 운하를 보고 크게 감탄하여 훗날 다 빈치를 '건축 기술 총감독'으로 불러들이기도 했다."(본문 21쪽)

다 빈치가 죽은지 20년 후 프랑수아 1세를 섬겼던 피렌체 조각가 벤베누토 첼리니는 <예술론>에서 왕이 다 빈치를 "나는 조각·회화·건축 어느 분야든지 레오나르도만큼 많이 알고 있는 자는 이 세상에 없으며, 또한 그가 위대한 철학자였다고 믿는다"고 했다. 조각·회화·건축을 넘어 철학자 반열까지 오른 다 빈치를 찾아나서는 <모나리자는 왜 루브르에 있는가>는 읽는 이들로 하여금 존경심을 이끌어낸다.

<모나리자>와 함께 다 빈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최후의 만찬>은 밀라노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 성당 수도원에서 그렸다. 크기는 무려 가로 8.8미터, 세로 5.5미터로 대작이다. <최후의 만찬>은 1494년 수도원 식당 벽에 예수가 최후의 만찬을 나누던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라고 말한 것을 극적으로 그리라는 의뢰를 받고 그렸다.

"레오나르도는 처음 구상한 것처럼 누가 주님을 배신할지 궁금해 하는 사도들에게 덮친 불안과 걱정, 두려움을 훌륭하게 표현하는 데 성공했다. 사도들의 얼굴에는 사랑·공포·분노 그리고 예수의 마음을 다 이해하지 못한 상황에서 큰 슬픔이 감돌고 있다. 또한 이에 버금가게 유다의 완고한 태도·증오·예수를 배신하는 모습이 대조적으로 잘 표현되었다. 작품 속의 인물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게 그려져 있고 식탁보 원단의 질감까지도 세밀하게 표현되어 있어 실제 린넨 천보다도 훨씬 실물에 가까워 보였다."(본문 64쪽)

이렇게 위대한 작품은 탄생했다. 하지만 다 빈치가 죽고나서 123년이 지나자 습기와 침식때문에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다. 이후 복원 작업이 이뤄졌는데 1726년, 1770년, 1946년, 1979년이다. 1999년 20년 복원 작업끝에 현재 모습을 갖췄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 주목할 점은 2차대전 때인 1943년 8월 16일 연합군이 밀라노를 대공습했을 때 수도원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최후의 만찬>만 남았다.

"벽화가 살아남은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공습이 있기 며칠 전,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의 신부들이 만약 공습이 발생하더라도 <최후의 만찬> 만큼은 지켜내야 한다며 벽화의 앞뒤 벽에 천장까지 흙 포대를 쌓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최후의 만찬>을 볼 수 있는 것은 모두 이러한 성당의 신부들의 노력 덕분이다."(본문 69쪽)

위대한 작품은 그리거나, 만든 이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함께 할 때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음을 <최후의 만찬>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제 <모나리자>를 보자. 모나리자는 세가지 이름이 있다. 이탈리아는 '라 조콘다', 영어는 '모나리자', 프랑스어는 '라 조콩드'다. 과연 모나리자는 누구일까? '모나'는 유부녀 이름 앞에 붙이는 이탈리아어 경칭이고, '리자'는 초상화 모델 이름이다. 우리 이름으로 하면 '리자 여사'"쯤 된다.

그럼 모델은 누구일까? 피렌체 유력자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의 아내인 리자라는 주장이 많다. 2008년 1월 14일,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도서관 측은 다 빈치 <모나리자> 모델이 피렌체 어느 거상의 부인이라는 증거를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1530년 10월에 피렌체 시 관리가 고서적의 여백에 "다 빈치는 세 장의 그림을 제작 중이며, 그 가운데 하나는 리사 델 조콘도의 초상화다"라고 적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더 중요한 것은 모델이 누구인지 몰라도 이탈리아 고고학자인 카시아노 달 포초가 1625년 <모나리자>를 본 소감은 지금도 똑 같은 느낌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가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완성도가 높은 그림이었다. 그림이 스스로 말을 하지 않는 것만 빼고는, 그 밖의 모든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그림을 보는 이는 누구나 그 마력에 빨려들고 만다."(본문 120쪽)

그럼 <모나리자>는 어떻게 이탈리아가 아닌 프랑스에 갔을까? 다 빈치가 1516년 프랑스로 이사가면서 모나리자를 가져갔다. 이후 프랑스 귀족과 루이 14세·16세 그리고 나폴레옹을 거치면서 루브르까지 가게 된다.

"<모나리자>는 1700년대 초 '태양왕'이라 불린 루이 14세 거처인 베르사유 궁전 살롱을 옮겨졌다. 루이 15세는 <모나리자> 미소를 싫어했고, 그림을 수행원 방으로 옮겼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모나리자>는 왕가 재산들과 함께 오랑주리의 지하 왕실 창고에 숨겨졌다고 한다. 그후 나폴레옹이 궁전 안에 박물관을 설립하자 그곳으로 옮겨져 공개 전시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루브르 박물관의 시초가 되었다."(본문 중에서)

<모나리자>는 한 때 이탈리아로 다시 돌아갔다. 지난 1911년 도난됐다가 2년 뒤 루브르 박물관에서 일한 적이 있던 이탈리아인의 피렌체 집에서 발견돼 우피치 미술관과 로마에서 잠시 전시된 뒤 루브르 박물관으로 반환되는 우여곡절을 겪는다.

한편, 지난해 8월 이탈리아 역사·문화·환경유산 국가위원회는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보관된 모나리자를 이탈리아로 반환하기 위한 서명운동에 15만여 명이 참여했다"며 오렐리 필리페티 프랑스 문화장관에게 모나리자 반환을 공식 요청했다. 하지만 루브르 박물관측은 이탈리아 요청을 거부했다. <모나리자>는 이탈리아로 돌아갈 수 있을까? <모나리자> 가치를 아는 루브르 박물관이 되돌려 줄리는 없지만 말이다.

덧붙이는 글 | <모나리자는 왜 루브르에 있는가> 사토 고조 지음 ㅣ 황세정 옮김 | 미래의창 펴냄 ㅣ 12000원



모나리자는 왜 루브르에 있는가 - 다 빈치를 찾아 떠나는 이탈리아 예술기행

사토 고조 지음, 황세정 옮김, 미래의창(2013)


태그:#모나리자, #다 빈치, #이탈리아, #프랑스, #루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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