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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여행은 그리움이다

학창시절의 그리움 가운데 가장 큰 추억은 수학여행이다. 난생 처음 살아온 고향을 떠나보는 것도 수학여행이 처음일 것이다.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처음으로 고향을 벗어났다. 아버지와 함께 부여 홍산의 고모집에 간 것인데, 지금은 승용차로 1시간이면 갈 거리를 1박 2일로 다녀와야 했다.

중학교 수학여행은 두 번째 외출이었다. 당일 소풍이었는데도 수학여행으로 명명된 그 여행에서 고속도로를 처음 봤다. 비포장이거나 시멘트 도로가 고작이었던 고향에서 벗어나 시원하게 뻥뻥 뚫린 고속도로를 달리는 기분은 상상 이상이었다.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처음으로 동해바다를 봤다. 아마 2박 3일로 여행한 것도 그 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대학교 역사교육과에 입학하면서 여행은 일상이 됐다. 어쩌면 어린시절 채우지 못했던 여행의 갈증 때문이었는지 악착같이 돌아다니기에 힘썼다. 교사로 부임하고 경제력이 생기면서는 등산에 입문했다. 동료 교사들과 평택에서 오전 11시 50분에 출발하는 전라선 열차를 타고 남원에서 내려 지리산을 등반하거나, 토요일 저녁 서울 용산에서 관광버스에 올라 전국의 유명하다는 산은 모조리 올랐다.

여고에 근무했던 시절 고적답사반이라는 역사여행 동아리를 만든 것도 여행에 대한 갈증 때문이었다. 주말에는 아이들과 평택과 인근을 답사하고, 휴일에는 1일 투어, 방학 때는 1박 2일 또는 2박 3일의 여행을 했다. 지금도 고적답사반 출신의 제자들을 만나면 여행 이야기를 많이 한다. 화톳불을 지피며 밤새 나눴던 이야기, 비가 퍼부어대는 만리포 해변의 작은 파라솔에서 선생님들과 둘러앉아 밤새 술잔을 기울이며 나눴던 교육에 대한 고민, 세상에 대한 꿈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평사리에서 평택의 마을을 보다

중학교로 전근한 뒤 두 번째 수학여행이다. 전근 첫 해였던 2005년도에 설악산을 다녀왔으니 9년만의 경사다. 이번 여행지는 남해 푸른 물결이 출렁이는 경남 통영 일대다. 우리학급은 37명 아이들이 모두 여행에 참가했다. 생전 다른 여행다운 여행을 못해본 수현(가명)이도 당당한 구성원이 됐다.

5월 27일 잠자리에서 일어나 막 눈곱을 떼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샘, 오전 7시 40분까지 가도 돼요?' '샘, 먼저 버스에 타도 돼요?' '도시락은 꼭 싸가야 되나요?' '오전 7시 40분에 오든, 버스를 타든 저희들 맘이지 왜 나에게 물어봐'라고 툴툴거리며 지난 저녁에 미리 챙겨둔 가방을 들고 덕동산 잔디공원 앞으로 나갔다. 버스에 올라 인원수를 세는데 영석(가명)이를 제외한 36명의 아이들이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평소 지각을 밥 먹듯이 하는 수현이와 빈이도 뒷자리 한구석을 차지하고 해맑게 웃고 있다.

남도로 내려가는 길, 하염없이 비가 내린다. 지난 2005년 수학여행 때에도 비가 내렸다. 우산을 쓰고 여행하는 것도 나름 운치가 있지만 활동량이 많은 아이들에게는 장애물이 틀림없다. 2시간 반을 달려 남원 광한루에서 점심을 먹고, 섬진강을 따라 좀 더 남으로 내려가 하동군 악양면의 평사리에 도착했다. 소설 <토지>의 무대였던 평사리는 1998년 이후 민속문학마을로 조성돼 있다. 마을은 물안개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지리산 형제봉의 3부 능선쯤에 자리 잡고 있었다. 천하의 명당이랄 수는 없지만 밭농사 위주의 전통사회에서 사람이 깃들만한 경관이다.

입장료 1000원을 내고 마을 안쪽으로 들어서니 각종 상점들이 즐비하다. 민속문학마을이라고 해서 상점의 종류가 특별하지는 않았다. 음식점들도 마찬가지였는데, 음식과 상품을 통해서마을의 전통과 문화를 이야기하지 못하는 점이 아쉬웠다. 폭우가 쏟아지자 아이들은 대부분 마을 입구에서 서성이다 버스 안으로 돌아간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평사리에서의 삶이나 <토지>라는 소설의 배경지식이 없는 아이들의 입장에서는 최참판댁이나 길상의 집, 대숲으로 오르는 골목길의 모습이 그저 밋밋하고 재미없는 풍경일 수 있겠다.

동료교사들과 함께 오르다 골목길 사거리에서 혼자 농업전통문화전시관으로 올라갔다. 인적이 없는 전시관 앞들은 평사리들판을 가장 아름답게 조망할 수 있는 위치다. 비온 뒤의 들판은 참으로 깔끔하고 장쾌하다. 전시관 옆 훈장집을 기웃거리다. 문학관으로 오르는 돌담길을 따라 걸었다. 구불한 돌담을 돌아서면 아랫마을에서 올라오는 사잇길이 보이고 그 틈새로 작은 초가집이 내려다보이는 모습이 100년 전으로 시간여행을 하는 것 같다.

통영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하동 나들목에서 남해고속도로를 1시간 반쯤 달려 통영에 도착했다. 우리 숙소는 통영항 서남쪽 끝자락,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콘도다. 숙소에 올라 커튼을 활짝 열어 제치니 통영항이 손에 잡힐 듯하다. 비는 하염없이 퍼붓고 자유시간을 많이 달라고 징징대던 아이들은 저녁밥을 먹자마자 복도와 방을 뛰어다니며 장난치기에 바쁘다.

다음 날 아침 빗속을 뚫고 거제도 선박박물관과 어촌민속박물관을 답사했다. 지방자치시대에 들어오면서 각 자치단체는 앞 다투어 박물관과 사료관 건립을 하였다. 거제도의 것도 그러한 것 같은데,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인지 아름다운 풍광과 건물의 규모에 비하여 컨텐츠가 빈약하다. 오후에 답사한 한산섬은 역사적 의미에서나 아름다운 풍광에서 한려수도의 정점이랄 수 있었다. 나는 재촉하는 학년부장을 모른척하며 반장 기형이를 비롯해서 몇몇 아이들과 세병관·수루·각종 선 정비를 꼼꼼하게 살펴봤다.

저녁 나절에는 교사들이 출장비로 받은 돈을 거출해 통영수산물시장으로 장을 보러 갔다. 선생님들은 해산물이 풍부한 고장에 왔으니 싱싱한 자연산회를 맛보고 가야만 한다고 입을 모았다. 통영 수산물시장은 대천 어항이나 마량항과 다를 바 없었지만 관광버스에 대한 갓길 무료주차를 허용한다든지 상인들이 앞다퉈 친절하게 안내를 해주는 점이 달랐다.

노점들을 오가다가 1kg이 넘는 도미 2마리와 광어 1마리를 6만 원에 샀다. 자연산을 기대했지만 모두 양식이다. 길가에서 평생을 어부로 살았다는 어르신을 만나 물어보니 요즘에는 어획량도 적은 데다 통영에서는 워낙 가두리 양식업을 많이 해서 자연산을 보기 힘들다고 말했다. 나머지 돈으로는 문어와 해삼을 사고 상추와 양념고추장같은 부재료를 구입했다. 수산시장에서 구입한 회를 식탁위에 펼쳐놓으니 제법 그럴 듯하다. 선생님들은 음료를 서로 권하며 아름다운 통영의 밤을 밝힌다.

통영의 경제적 기반은 양식어업과 관광산업이다. 그래서인지 지방자치단체에서도 관광산업 육성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도시 이미지 일체화사업도 통영이 가장 앞섰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대부분의 관광산업이 그렇듯이 통영도 지나친 상업주의에 함몰된 철학의 부재가 곳곳에 눈에 띄었다. 깊이 있는 인문학적 이해와 느리지만 긴 호흡으로 자기만의 색깔을 입혀가는 통영의 미래를 기대해본다.

진주성의 추억

이런저런 이유로 여러 차례 진주와 진주성을 답사했지만 내 기억 속의 진주는 무채색이다. 진주는 낙동강 서쪽지역의 중심이다. 삼국시대에는 가야와 백제·신라와 백제를 연결하는 요충지여서 수차례의 격전이 전개되기도 했다. 진주시 답사에 대한 나의 기대는 이런 역사적 배경과 독특한 음식이다.

진주에 당도하기 전 아이들에게도 진주의 역사적 의미, 음식문화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진주음식의 특징은 깔끔하고 담백함이다. 대표음식으로는 진주비빔밥과 진주냉면 그리고 진주 한정식을 꼽는다. 진주비빔밥은 흰 쌀밥 위에 다섯 가지 나물과 육회가 곁들여져 칠보화반이라고 부르며, 진주냉면은 꿩육수나 동치미육수를 사용하는 평양냉면과 달리 죽방멸치와 소고기·버섯·바지락을 넣어 푹 끊인 육수를 사용하는 점이 독특하다.

하지만 진주비빔밥과 진주냉면은 전주비빔밥과 평양냉면처럼 전국구가 되지 못했다. 그것은 근대 이후 교통망이 취약해진 것이 하나의 원인이고, 사철음식인 평양냉면과는 달리 진주냉면은 여름 한 철 음식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진주성에 들어갔다. 1970년대 후반 군사정권에 의해 진주성은 말끔하게(?) 정비됐다. 덕분에 성내에 거주하던 주민들은 밖으로 쫓겨나게 됐고, 성곽은 박제화된 유물이 돼 멀거니 서 있게 됐다. 성 안에는 본래 진주관아와 민가들이 존재했다는 역사적 사실조차 알지 못하는 관료들의 무식의 소치 때문인데, 다행스럽게도 근래 박물관을 건립하고 성곽 주변을 정비하여 볼품을 많이 회복했다.

촉석루 위에 섰다. 늦봄 남강의 풍경은 이팔청춘이다. 절벽을 타고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은 나그네의 가쁜 숨을 식혀주는 데 그만이다. 필자는 촉석루에 올라서면 임진왜란 당시 왜군장수를 품에 안고 남강으로 뛰어내렸다는 논개보다는 <진주난봉가>라는 신민요가 먼저 떠오른다. 난봉꾼 남편을 만나 지지리 고생하다가 결국 목매달아 생을 마감했다는 비련의 여인에 관한 서사시. 진주난봉가는 한 때 필자의 18번이기도 하였다. 촉석루 아래 암거로 내려가 남강 풍광을 감상하고 있을 때 동행한 장선생이 '논개의 신분이 뭐였지?'라고 지른다. 그 말에 뜨끔해 다시 생각해보니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렇다고 시인 변영로의 주장대로 '기생 논개'로 규정할 수도 없어 '글쎄'라며 말끝을 흐렸다.

점심을 먹고서도 진주냉면이 그리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선홍빛 육회가 얹어진 진주 비빔밥도 눈앞에 삼삼하다. 그렇다고 아이들만 버스에 태워 올려 보낼 수도 없어 입맛만 다시다가 여름방학 배낭여행 때를 기약하며 버스에 올랐다.

덧붙이는 글 | 중학교 2학년 아이들과 남도 수학여행을 다녀오면 쓴 기행문



태그:#수학여행, #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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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연구를 하고 있으며 평택인문연구소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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