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마이크로소프트(MS) 공동창업자로 유명한 미국 빌 게이츠 회장이 지난 4월 22일 청와대를 방문해 박근혜 대통령과 만나던 때의 모습을 기억한다. 물론 사진 덕분이다. 빌 게이츠 회장의 공식 직함은 빌앤드멀린다게이츠 재단 이사장 겸 벤처기업 테라파워 회장이다. '창조경제'를 주장하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과 IT분야의 신화적인 존재인 빌 게이츠 회장의 만남은 충분한 관심거리였지만, 그날 온라인을 뜨겁게 달구었던 쟁점은 창조경제가 아닌 '악수'였다. 

빌 게이츠 회장은 박근혜 대통령을 만나면서 한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악수를 했다. 그 모습을 담은 사진을 본 일부 누리꾼들은 "예의가 없다"라는 반응을 보였고, 한편에서는 '미국식 문화'이며 빌 게이츠 회장이 과거 이명박 대통령과 다른 나라 정상들과 만날 때도 격의 없이 그런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다는 의견을 표출했다. 그리하여 두 갈래 의견이 서로 맹렬히 충돌하기도 했다.

그런 이례적인 이슈를 접하면서 나는 재미있는 생각을 했다. 미국에 대한 사대주의가 극심한 나라에서 그런 쟁점은 아무래도 뒤넘스럽지 않나 하는 생각이었다. 우리 국민은 일찍이(1980년) 주한 미8군사령관 위컴으로부터 '들쥐'로 비견된 일이 있다. "한국인은 들쥐와 같아서 누가 지도자가 되건 그를 따른다"라는 지적이었다. 위컴의 그 '들쥐론'은 우리에게 모욕감을 안겨주면서도 예리하고 적확(的確)하다는 데서 오는 이중의 수치심을 갖게 한다.

세계에서 유일한 민족분단의 나라, 수많은 나라의 군대가 한꺼번에 들어와 이념을 내걸고 전쟁을 벌였던 나라, 참혹한 민족상잔의 전쟁을 치르고도 60년이 넘도록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나라, 자국 군대의 '전시작전지휘권'을 미군에 송두리째 맡긴 채 한사코 이양과 환수를 거부하고 있는 나라, 스스로 미국의 언어속국이 되기 위해 영어교육에 미쳐 돌아가는 나라, 모국어에 대한 자존심을 팽개치고 대통령이 미국 의회에서 영어 실력을 검증받는 나라….

그런 나라의 대통령과 미국 빌 게이츠 회장의 악수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보면서 '무례 논쟁'을 벌인다는 것은 정말로 어색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미국식 문화를 표출한 빌 게이츠의 그런 태도에 민감할 만큼의 자존감을 우리 국민이 챙기고 있는 걸까? 빌 게이츠로서는  한국문화와 한국인의 자존감 따위는 별 중요 사항이 아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예 자존감이 없는 민족이라는 인식을 그가 은연중 지니고 있었을지도 모르고….

그런 씁쓸한 생각들을 하면서 나는 미국 영화들에서 몇 번 본 적이 있는 미국 국무회의 광경을 떠올리기도 했다. 그들의 국무회의 모습에는 기본적인 생동감이 있었다. 영화 장면과 실제 모습과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정자세로 앉아 있지 않았다. 대통령은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다니면서 발언하기도 했고, 장관들은 손에 턱을 괴기도 하고 다리를 꼬기도 하고 팔짱을 끼기도 한 모습이었다. 때로는 격론을 벌이기도 하는데, 생동감과 활달함 속에서 열정과 진지함이 더욱 발산되는 듯했다. 

그 모습은 내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부러운 마음이 한량없었다. 우리도 저런 모습을 본받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터무니없는 꿈을 꾸기도 했다. 누가 정권을 잡으면 신속히 맨 먼저 미국으로 날아가서 인사를 하는 나라이니, 또 극진한 사대주의 가치관 속에서 미국의 문화식민지가 되고 언어속국이 되어 가고 있으니, 미국의 그런 활달하고 생동감 있는 국무회의 풍경을 우리도 잘 습득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였지만, 나는 곧 그 기대를 접었다.

가끔 우리 대한민국의 국무회의 광경을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보곤 한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건 장관들의 중학생 같은 모습이다. 모두들 정자세로 앉아서 볼펜 하나씩을 들고 뭔가를 적고 있다. 발언을 하는 사람은 대통령 한 사람뿐이다. 대통령 혼자 뭔가를 말하고, 장관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숙이고 열심히 적고 있다. 선생님의 훈화나 숙제를 모범학생들이 꼼꼼하게 받아 적고 있는 모습을 방불케 한다.

북한에서도 그런 풍경을 연출한다. 나이 어린 김정은의 뒤를 따라가면서 김정은이 뭔가를 말할 때마다 나이 많은 관료들과 군 장성들이 수첩을 들고 열심히 적는 모습을 보이곤 한다. 머리가 나쁜 사람들 같기도 하다.

대한민국 정부 관료들은 회의 때나 중학생 같은 모습을 보일 뿐 대통령 뒤를 따라가면서까지 수첩에 뭘 적지는 않는 것 같다. 북한보다는 낫고,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하지만 국무회의나 청와대 비서관  회의 때 고위 관리들이 하나같이 중학생 같은 모습을 보이는 것은 안쓰럽기도 하고 너무 후진 것 같다. 이제는 그런 모습을 좀 탈피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게 영 쉽지 않은 모양이다.

수첩에 뭘 적기보다는 머리에 잘 입력을 하면서 질문도 하고 토론도 하고 한다면 열정과 진지함이 더욱 배가되리라는 생각을 해본다. 미국의 문화식민지가 되고 언어속국이 되어 가는 판에 미국 국무회의의 생동감과 활달함은 왜 배우지 못하는지 의아하다. 어쨌거나 대한민국의 국무회의장를 비롯한 고위 관리들의 회의장을 오늘도 변함없이 잘 채우고 있는 중학생들의 모습, 정말 나로서는 신물이 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충남 태안의 <태안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빌 게이츠, #박근혜, #위컴, #들쥐론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추상의 늪」이, <소설문학>지 신인상에 단편 「정려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지금까지 12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주요 작품집으로 장편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전3권), 『죄와 사랑』, 『향수』가 있고, 2012년 목적시집 『불씨』를 펴냄.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